제목: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 2
본문: 시편 110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0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기록한 다윗도 이 말씀이 어떻게 성취될지는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메시아는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첫째로 왕으로서 메시아의 통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1-3절). 그 이유는 메시아는 사람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거나, 자신이 힘을 모아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인 메시아의 통치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시작된다는 면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공유하는 것은 어떤 인간 왕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통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 땅에 그 권능을 나타낼 때가 올 것이다. 그 때 그의 원수와 그의 백성이 분명히 구분될 것이다. 원수들은 정복될 것이고 백성들은 그와 함께 통치할 것이다. 메시아의 통치는 일부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가 해당된다. 이 모든 측면에서 메시아는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로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이 공의로운 통치 앞에서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지금 선택해야 한다.
다음으로, 제사장으로서 메시아의 중보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메시아,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4절)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절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다윗은 여호와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다. 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그 말 자체의 무게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맹세이고 하나님은 절대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맹세는 약속을 확증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나 서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두고 맹세한다. 내 생명을 걸고 맹세한다거나 부모님을 걸고 맹세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렇게 더 이상의 논쟁을 끝내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는 그렇게 할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고 말한다(히 6:13). 그렇게 해서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신 것이다(히 6:17). 하나님은 맹세를 통해 자신의 생명과 이름을 걸고 이 말씀을 다윗에게 주신 것이다.
그렇게 주신 말씀은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먼저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메시아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제사장
1절에서는 ‘왕’이었던 메시아가 여기서는 ‘제사장’이 된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 수 있지만, 이 말씀을 기록한 다윗이나 그후에 이 말씀을 읽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그들에게 상식은 ‘왕은 제사장이 될 수 없고, 제사장은 왕이 될 수 없다’이기 때문이다.
일단 혈통적으로 그렇다. 하나님은 오직 레위 지파,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반면에 사울 이후의 합법적 왕은 오직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이 왕으로 세워졌다. 왕은 어떤 경우에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고 백성을 축복하기도 하고 제사를 드리기도 하는 등 제사장의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고유의 일이 아니었기에 제사장의 권위 아래서 이루어졌었다.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려고 했을 때 제사장은 그를 만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며 분향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병이 들게 하셨다(대하 26:16-20). 제사장이든 왕이든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그 둘은 겹치지 않았다.
또한 왕과 제사장은 임무가 달랐다.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왕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했고(형벌, 보상), 제사장은 그 율법에 따라 죄를 범했을 때 백성들을 위해 제사드리는 역할을 했다(죄사함). 왕은 통치자였고 제사장은 중보자였다. 왕과 제사장 모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방향이 달랐다. 왕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면, 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에게는 공의가 우선이었다면 제사장에게는 긍휼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왕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제사장은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메시아는 1-3절에서 밝힌 것처럼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차적으로 메시아는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주가 되기 위해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이라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것처럼, 메시아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 되기 위해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바로 메시아를 아론이 아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이다. 더 위대한 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딱 3곳에서 등장한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 갑자기 등장한 후에 시편 110편 4절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등장하는 곳은 히브리서다. 히브리서는 사실 구약의 두 말씀에 대한 정교한 강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된다(18절).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강해한다.
히 7:2–3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그림자(예표)라는 말이다. 그는 의의 왕이고 평강의 왕이었다. 두 표현 모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합당하다. 그분은 공의로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은 또한 성경의 다른 어디에서도 그 시작과 끝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창세기는 ‘족보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을 소개하면서 전혀 그런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최소한 ‘누구의 아들’ 정도로 소개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목했다. 멜기세덱은 그 이름도 그렇고 그 직책도 그렇고 마치 본래 그런 존재인 것처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항상 왕이고 항상 제사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멜기세덱은 메시아의 그림자다. 실체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으로서 영원한 왕이시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것이 다르다.
히브리서 저자의 이 논리에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진짜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하지 않는가.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멜기세덱이 아론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도 더 뛰어나다는데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명세다.
첫째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치고 멜기세덱은 그에게 축복했던 사실에 주목해서 이렇게 말한다.
히 7:4–7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으니,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은 제사장 지파인 레위의 조상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마치 백성들이 제사장을 위해 십일조를 내듯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제사장과 같았다면 그의 후손들에게도 당연히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서열(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맹세하셨음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강조한다. 5-7장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4번이나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수님이 레위 지파가 아닌데 제사장임을 주장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낸 논리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시편 110:4에서 예언되었다.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을 맹세를 하시면서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사실을 언급한다.
히 7:20–21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렇게 메시아는 아론의 서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 됨으로써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단지 왕이면서 제사장인 것이 메시아를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아론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만큼 정통성이 있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메시아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으로서 영원한 제사장, 따라서 완전한 제사장이 된다. 그런 면에서 메시아는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가 되신다.
영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메시아는 단지 아론의 반차를 따르거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거나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멜기세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메시아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온전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그리고 그가 드리는 제사를 통해 온전함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제사장의 문제고 하나는 제물의 문제다.
히 7: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히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
제사장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제사장 자신이 온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위한 제사를 끊임없이 드려야했고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를 통한 중보는 언젠가는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게 됐다. 이것이 제사장의 문제다. 여기에 그들이 드릴 수 있는 제물의 문제도 있었다.
히 10:1–4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이 실제적인 효용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짐승의 피가 실제로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을 통해서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다.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과는 다른 중보자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메시아가 그 중보자가 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셨다. 죄 없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전한 제물을 바친 온전한 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히 7:24–28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이렇게 불완전한 제물과 불완전한 제사장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히 9:15).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맹세의 성취임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분명히 밝힌다.
히 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 유일한 제사장이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시다. 더 이상 죄를 위한 어떤 제사도 필요없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그 어떤 죄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길로 누구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서두에서 말했든, 제사장의 특징은 긍휼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비교할 수 없는 긍휼을 보여주셨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참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모든 면에서 그렇게 되셨다. 그만큼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왕이신 예수님과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지만,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신다. 마치 서로 다른 두 인격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둘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내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불순종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떨며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반면에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결같은 긍휼함을 보여주신다. 정당화될 수 없는 그 어떤 불순종도 우리를 그분에게서 끊지는 못한다. 언제나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메시아가 완전한 중보자이시기에 다시 죄가 나와 하나님 사이를 끊어놓을 수 없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다. 메시아는 왕이며 제사장이지, 왕이거나 제사장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비교할 수 없는 중보를 원한다면, 메시아의 비교할 수 없는 통치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둘 다’ 받아들이거나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거나다. 하나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 경우, 이 시편이 말하는 마지막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을 경험할 것이다. 바로 비교할 수 없는 심판자다.
메시아, 비교할 수 없는 심판자(5-7절)
시 110:5–6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여기서 다윗은 자신에게 익숙한 전쟁의 이미지를 통해 왕이며 제사장인 메시아를 반역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묘사한다. 이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다. 머리를 쳐서 깨뜨리고 시체가 가득한 모습은 잔혹해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의 예언은 이것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을 분명히 말한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는 여호와, 즉 성부를 의미할 수도 있고, 메시아이신 성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봐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메시아에게 승리를 주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앞의 ‘주’는 메시아를 그 ‘오른쪽에 계신 주’는 여호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하늘의 보좌에서는 메시아가 여호와의 오른쪽에 앉아있었지만 ‘노하시는 날’에는 여호와가 메시아의 오른쪽에서 그 강력한 힘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하시는 날’은 진노의 날이고 예언서에서 많이 언급되는 ‘주의 날’이다. 메시아가 다시 오실 때 있을 심판을 의미한다. 계시록에서 배웠던 어린양의 진노의 날이다. 그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릴 것이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린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단어는 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이야기에서 야엘이 시스라의 머리에 장막 말뚝을 박아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다. 그렇게 완전히 으깨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록은 이 날에 있을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계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 19:17–18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우리는 악과의 싸움에서 ‘겨우’ 승리하는 것이 익숙해졌을지 모르지만, 메시아의 승리는 그렇지 않다. 이 승리는 압도적인 승리다. 메시아의 원수는 대항하여 싸우기는 하지만 어떤 승리도 쟁취하지 못한다. 그들은 심판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메시아와 그의 군대는 쉼을 누리고 승리를 만끽할 것이다.
시 110: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결국 모든 원수는 패하고 메시아가 그 머리를 들고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정된 결론이다. 이 결론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메시아의 모습이 너무 잔인하고 어쩌면 옳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메시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봐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누구도 이런 경험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최후의 심판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아닌 타락한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사람이 그들에게 동조하고 거기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함께 심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렇게 심판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를 심판 전에 먼저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사람이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그런 하나님을 거절하면서 왜 나를 심판하냐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이다. 하나님은 구원 받기 위해 무엇을 하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내가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비교할 수 없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싶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심판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거절했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이 심판은 공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갑자기 기분이 좋지 않아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죄인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의를 그냥 용납하지는 않으신다. 불의를 용납하는 왕은 절대로 좋은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는 법치 국가인데, 명목 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 어떤 죄를 범해도 다 용서 받고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정과 번영은 없을 것이다.
좋은 왕은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비교할 수 없는 중보자를 통해 구원하시고, 비교할 수 없는 통치자를 통해 심판하고 다스리실 것이다.
도전
시편 110편은 이런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셨고 또한 남은 예언을 성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그를 대적할 것인지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어른들이 볼 때 아이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작은 것에 빠져서 더 큰 것을 보지 못할 때 그렇다. 부모는 더 크고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아이는 하찮은 것에 만족해서 더 가치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는 눈 앞의 것을 당장 가지고 싶은 마음에 그런 선택을 한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유대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는 것에 만족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예수님은 이 땅에서 배부른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을 주실 분이셨기 때문이다. 먹고 다시 배고플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주리지 않을 생명의 양식이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좀 더 잘 살 수 있게 하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멸망할 이 땅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내셨다. 그런 예수님께 이 땅의 먹을 것만 구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그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참된 생명을 줄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을 때(요 6:35-58),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다(요 6:66). 그들은 이 땅의 먹을 것을 줄 예수님을 원했지,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양식같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예수님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눈 앞의 것을 갖고 싶어서 비할 수 없는 가치를 포기하는 어린아이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지는 않으셨다. 어쨌든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실 수는 있는 분이셨다. 그러니 일단은 먹을 것을 주면서 그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천천히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드러낼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최종 결정을 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다.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유일한 메시아 예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영웅을 찾든지, 선택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선택을 마주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는 다른 영웅을 선택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바른 답은 정해져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엇과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메시아이시기 때문이다. 영원을 버리고 순간을 얻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심판을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간은 없다. 지금은 보이는 것에 따라 살다가 그래도 죽기 전에는 예수님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정말 어리석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지금 누릴 수 있는 복을 굳이 나중까지 미룰 이유가 없다. 지금 내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라. 자비하신 제사장이신 예수님께 삶을 맡기라. 공의의 통치자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라. 지금 그렇게 하라.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살라.
히 10:26–3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손을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