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본문: 시편 81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81편은 아삽의 시로서 앞선 아삽의 시와 유사한 상황을 배경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신실한 자들이 던진 질문이 시편 79편, 80편이라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시편 81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기도는 이러했다.

시 80: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시 79:9–10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

이들의 기도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81편을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거절했다. 하나님께 그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구하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81편 초반의 예배로의 초청은 다른 시편과는 그 뉘앙스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이는 예배로의 초청이라기 보다는 예배를 회복하라는 명령에 더 가깝다.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된 예배를 회복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신명기 6장에서 모세가 말하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십계명에서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첫계명으로 주어졌다. 이 계명은 예배 의식에 대한 계명만이 아니다. 즉, 너희가 원하는대로 살아도 되지만 모여서 예배할 때 만큼은 나를 예배해야한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삶에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그들에게 두지 않기를 명령하셨던 것이다. 예배의 자리에 있을 때와 그 자리를 벗어났을 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의 삶이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인 것이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 예배와 각자의 삶의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결국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느냐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이 진정성 없는 허울 뿐인 예배를 드리거나 순종 없는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허울 뿐인 예배를 드리지만 순종하는 삶을 살지도 않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만 불순종하는 삶을 살지도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열매이기에 둘 다 있든지 혹은 둘 다 없든지가 되어야 맞다.

물론 사람은 다양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둘이 언제나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그 사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보이기 마련이다.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삶을 알 수 있고, 그의 삶을 보면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는 모습이 어떠할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우리의 한계도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실한 것 같은 그리스도인이 삶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면 분별은 좀 더 쉬워진다. 예배에 대한 나의 마음, 순종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점검해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서 나의 마음에 자리하고 계신지를 알 수 있다.

시편 81편은 바로 이 원리에 근거해서 기록되었다. 특히 6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원래 자리에 두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함이 강조되어 있다. 그 회복은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삶에서의 순종으로 증명된다. 81편의 저자 아삽은 마치 하나님의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런 회복으로 나아올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성령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고 깨우치신다.

81편은 대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6절 이후의 말씀과 그 전의 말씀으로 구분하는데, 우리는 7절의 “셀라”를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1-7절)와 ‘하나님을 기대하는 순종’(8-16절)이라는 소제목으로 구분하여 말씀을 살펴보자.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1-7절)
명령(1-3절)

시 81:1–3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2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3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먼저 예배의 대상은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신데, 그 능력을 자기 백성을 위해서 사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우리의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시편의 뒤에서도 언급되지만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능력”이 되심을 놀랍게 경험했다.

특별히 3절에서는 “우리의 명절”을 언급하는데, 정황상 장막절이 가장 유력하다. 매년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지속되는 장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억하고 또한 가을 수확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부족함 없이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던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때로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시는 것 같은 기적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기도 하셨고, 때에 따라 내리는 비를 통해 그렇게 하기도 하셨다. 방법은 때에 따라 달라졌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능력이시라는 사실은 역사를 안다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더욱 가까운 분으로 또한 유일한 분으로 묘사하는 표현이다. 다른 어떤 신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 그들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 된다.

2절은 이 예배에 여러 악기들이 동원되어야 함을 말한다. 시를 읊는다는 것은 노래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목소리로 예배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고, 수금, 비파가 추가된다. 소고는 탬버린과 같은 타악기이고 수금과 비파는 기타와 같은 현악기다. 구약에서 소고는 주로 여자들이 기쁘게 춤을 추며 연주하는 악기로서 소개된다(예, 출 15:20, 미리암과 여인들). 수금과 비파도 슬픔보다는 기쁨을 연주하기에 더 적합하다. 쉽게 말해 여기 언급된 악기들은 ‘흥을 돋우는’ 악기들이다.

이는 1절에서 말하는 예배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즉, 기쁨이다(“기쁘게 노래하며”,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아삽은 나팔을 불어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자들을 불러 모으라고 명한다.

구약의 예배를 보면 이렇게 ‘기쁨’이 예배의 주된 분위기인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시편이 이스라엘의 찬양집인 것을 고려해보면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예배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편도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는 ‘할렐루야 시편’으로 마무리된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유(4-7절)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해야할 첫째 이유는 이것이다.

시 81:4–5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5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던 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할 것을 명령하셨다.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이보다 더 확실한 이유도 없다. 우리가 전도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할 이유? 명령이기 때문이다. 감사할 이유? 명령이기 때문이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 명령이기 때문이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할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도 될까? 그렇지 않다.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왕이신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기쁘게 예배할 것을 명하셨고 그의 백성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한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하는 것은 나의 그날 기분이나 컨디션에 달린 문제가 아니고 순종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이 어쩌면 강압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무조건 하나님이 하라는대로만 해야한다니, 난 그렇게 못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런 생각 역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시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 안에서 행사하신다. 어떤 명령들은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지만, 대부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의 이유를 설명하신다. 여기 예배의 이유도 그렇다.

시 81:5–7 …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6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7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5절 끝의 말씀의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요셉,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 보기도 하고, 시편을 기록한 아삽이나 혹은 어떤 선지자나 예배를 인도하던 레위인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6절부터 나오는 “나”는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5절 끝의 “나”도 하나님으로 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든 6절 이후에 언급된 예배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심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고난 중에서 구원하였고 인도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밝히셨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삶에 불평하면서 차라리 애굽이 낫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애굽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었고 광주리로 벽돌을 날라야 했다. 그들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셨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 3:7–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통 중에서 건져내셨다. 우렛소리로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들을 시험하시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심을 증명하셨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시고 그것 하나에 대한 보상처럼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구원하시며 인도하셨다.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셨다. 자신을 나타내시고 증명하셨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이후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할 이유는 사실 차고 넘쳤다고 할 수 있다. 그 마땅한 일을 할 것을 아삽은 말한 것이다.

우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기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을까? 우리에게는 출애굽도 없고, 광야의 만나도 없고, 시내산의 놀라움도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날마다 구원하고 계시고 끝날에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의 기업이 있다. 우리에게 매일의 공급하심이 있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며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개인의 영역으로 가면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들이 생각날 것이다. 내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럼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먼저 이 예배가 명령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기억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아는만큼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순종(8-16절)
순종은 타락하기 전의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타락 후에는 너무나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권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 권위 위에 있기를 원한다. 그것이 사탄이 깨뜨린 하나님의 질서다. 따라서 순종에 대한 명령은 이 깨어진 질서를 바로 잡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8-12절)
하나님은 먼저 그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심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시 81:8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말 좀 들어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한다. 말을 듣고 받아들여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순종하라는 명령이다. 이스라엘은 바로에게서 해방되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바뀐 것일뿐 종이라는 신분은 동일하니 출애굽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주인이 어떤 주인이냐에 따라 종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애굽의 신들을 대표하는 바로는 그들을 괴롭게 하는 주인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그들에게 해를 가하는 주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만을 섬길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 만이 그들의 필요를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 81:9–10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10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이 문구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와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문구다. 하지만 나머지 두 구절과 다르게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실제로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고 계시다. 14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그 입에 채워주실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원수에게 승리하는 것과 기름진 밀,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만족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이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입을 벌린만큼”과 같은 또 다른 수식어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복을 주시는 모습과 방법은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하나님은 물질적인 복을 약속하신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에게 그 복을 약속하셨다.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신명기의 핵심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원리를 잊지 말 것을 반복해서 당부했다. 순종하면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의 말을 잊었고 순종하지 않았다.

시 81: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시 81:12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죄악된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게 두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시는 끔찍한 형벌이다. 로마서 1장이 이 형벌에 대해서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더러움에 우리를 내버려 두시고,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시고,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을 때, 우리는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등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그들을 그냥 원하는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다. 그 결과가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고 열왕기, 역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가 원하는대로 살면 그곳이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아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지옥은 이보다 비할 수 없기 고통스럽겠지만, 우리가 원하는대로 살 때 우리는 그 지옥의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만족하는 삶, 행복한 삶,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사탄이 가장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본심을 우리가 오해하게 한 것이다. 최초의 사람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탄은 그들에게 다가와서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너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것을 먹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같은 편이 아니라 원수로 만든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도 여전히 이런 죄의 습성이 남아 있어서 순종이 어렵다. 여전히 하나님이 나의 원수인 것 같은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들을 하지 말라고 하니 원수 같은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예레미야의 말에 이렇게 답했었다.

렘 44:16–18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18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이런 오해를 오늘날의 사람들, 심지어 성도들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오히려 편안하고 풍족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 같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답답하고 지루하고 뭔가에 억눌린 삶을 사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 시대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애 3:32–33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무엇이 하나님의 본심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기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원하는 것보다 어쩌면 하나님은 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참된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며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순종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결국 나에게 좋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라. 하나님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그런 이기적이며 제멋대로이면서 능력만 있는 그런 신인지,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신지 성경을 통해 배우라. 특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이 다른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어떻게 다른지 보라. 하나님은 절대 심판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평안이고 우리의 행복임을 배우기 바란다.

다음으로, 일단 순종해 보라.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단 순종해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결국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섬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원수로 알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간계에 이간질에 속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사탄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명령(13-16절)

시 81: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알지 못하더라도 선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선한 뜻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시 81:14–16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15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16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물론 이 승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미워하면서 복종하는 체만 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그런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반면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삶을 주실 것이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는 다르게 적용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순종하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분명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선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마땅하다.

도전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회복하는 2022년”이다. 정말 회복하고 있는가?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봐야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나의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한다.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예배에 나오고 말씀을 보고 있다면, 거기서부터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기쁘게 예배하고 기대하며 순종하라고 하신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 예배보다 직장이나 학업이 더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 순종보다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게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