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배신을 준비하는 유다, 구원을 준비하는 예수님
본문: 누가복음 22장 1~13절
설교자: 조정의
1. 배신을 준비하는 유다(1~6절)
1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때는 유월절 그리고 무교절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아빕월(출 13:4; 34:18; 신 16:1) 혹은 니산월(4월) 14일,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 일주일로 니산월 15일부터 21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셈이라,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쳐서 유월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고 있었다”고 말했고, 마가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합니다(막 14:1). 유다의 배신은 무교절 이틀 전인 수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배신한 시점이 유월절 하루 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밤이 유월절 밤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눅 22:52). 왜냐하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년 애굽(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출 12:29).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는데,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출 12:30).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처음 난 생명을 죽이실 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가족 대신 죽을 희생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대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잡고 우슬초 묶음으로 그릇에 담은 피를 적셔 그 피를 문 인방(위, 아래)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집 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 12:5~14).
죽은 양의 피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 집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리라” 약속하셨고, “유월절”의 뜻이 바로 “넘어가다”였습니다(출 12:13). 이스라엘은 영원히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출 12:24). 나중에 자녀가 유월절의 의미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27).
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은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모세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때까지 약 1500여년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통해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이 특별한 날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셨지만(요 1:29), 그렇다고 해서 배신자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하지만 유다만 배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던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2절).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들은 정치적인 영향력과 힘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함께 모여 심각하게 논의합니다(마 26:3).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에 대한 궁리입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니(요 14:6)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을만큼 말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으로 백성의 죄를 깨우치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러 왔다고 하자(마 5:17),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율법으로(요 5:39)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고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해서든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논쟁을 이기시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약이 바짝 오르고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정말 할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부터,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내, 예수님을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적어도 2백 70만명의 순례가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로마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하여 많은 병사를 투입시켰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도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명절에 모인 수많은 백성이 민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었습니다(막 14:2).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잡아 죽이고 싶어도, 소문 내지 않고 비밀리에 예수님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배신자 유다입니다. 유다라면 예수님이 있는 정확한 장소를 그들에게 몰래 알려줄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가룟인(유대사람) 유다, 그는 열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 중 한 이름 없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택하신 열두 제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눅 6:12).
예수님이 몰라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70).
그러면 유다는 어차피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이라 아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았을까요? 그에겐 아무런 은혜도 비취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항상 옆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그분과 교제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눅 9: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했고(마 14:33),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남아서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요 6:68-69).
하지만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
참된 주의 제자는 단지 주를 지식적으로 알고 부르는 것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제자는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가룟 유다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항상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깊은 사랑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풍성히 누렸지만, 그분의 말씀을 좇지 않고 따르지 않는 거짓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 불렀습니다(요 17:12).
사탄은 이 거짓 제자를 통해 악한 일을 이루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간 예수님을 직접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고(마 4), 그 이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마 16:23). 그리고 이번에는 “멸망의 자식”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사탄의 뜻을 좇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성전 경비대장들은 로마 군사가 아니라 성전의 경비를 맡은 유대인 경찰 장교들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넘겨줄 지 방법을 함께 찾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어땠을까요? 막힌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들은 아주 기뻤습니다. 드디어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배신자 유다에게 예수를 판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 유다는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냐?”고 묻습니다(마 26:14). 그리고 당시 노예가 거래되는 가격인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마 26:15).
그때부터 유다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예수님을 몰래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마 26:16).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2세기 무렵 영지주의 분파에서 쓰인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나를 팔아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니 배신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레네오 주교(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의 제자)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통해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어떤 원한이 있었을까요?
후에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에게 도로 가져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마 27:3), 그는 예수님에게 어떤 원한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배신한 것일까요?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 안에 있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한 마디로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정도로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한 손에 하나님을 또 다른 손에 돈을 쥘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유다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상의 풍조와 내 욕심을 좇는 것, 그것이 죕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 곧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성공, 인기, 명예, 돈, 안정된 삶, 계획대로 이루어진 평탄한 삶, 그런 것을 잡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언제든 손에 쥔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쥔 손을 놓아버리는, 배신자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낙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 1:21).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만 붙잡는 삶입니다. 한 손에 다른 것을 잡고 있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삶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님만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그리스도가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 3: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선택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 죄인을 위해 희생양으로 대신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2. 구원을 준비하는 예수님(7~13절)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다음날이 되어 목요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날을 “무교절”, 마태와 마가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막 14:12)이라고 부르는데, 유월절을 포함한 전체 절기의 첫 날을 가리킵니다. 니산월(4월) 14일 목요일 저녁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 준비를 위해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제자들입니다.
8절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절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냐?”는 질문을 모든 제자가 함께 합니다(마 26:17; 막 14:12). 그 안에 누가 있었을까요? 배신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확한 위치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다면 함께 듣고 있던 유다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대제사장들에게 그 장소를 밀고하여 예수님을 잡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던 유월절 만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눅 22:15).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이 맺어졌다는 의미를 설명할 아주 특별한 식사를 하지 못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어린양을 죽일 필요가 없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할 특별한 식사입니다.
또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임 당하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일찍 잡히셨다면 그 정확한 시간보다 먼저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정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가서 나귀를 풀어 오고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함께 먹을 장소를 알려주실 때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확히 예비하신 장소를 찾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는데, 원어로 보면 그 사람은 남자입니다. 당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눈에 쉽게 띄였을 것입니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거든 그 주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절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당시 유월절 순례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공간을 내어주었지만, 이 사람은 누가 선생인지, 누가 그 선생의 제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 주인이 예수님과 이미 이야기를 마친 사람으로 예수님이 미리 유월절 식사하실 곳을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집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집이었고, 집 주인은 마가의 아버지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마가의 아버지는 제자들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8). 그래서 이것은 미리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으로서 정확하게 장소를 예비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성 안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따라 집 주인을 만났고, 주인이 보여주는 큰 다락방을 보았습니다. 1층 주인집 위에 올려진 2층의 공간으로 계단을 타고 따로 출입할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고 누워서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펴져 준비 되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당시 한 가족을 대표로 희생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내셨는데, 그들은 양 외에도 쓴 나물, 포도주, 무교병 등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먹을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이고(막 14:16), 날이 저물어 예수님과 나머지 제자들이 다락방에 합류할 때까지 계속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그 장소를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마 26:20).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셨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이 그 특별한 만찬을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그분의 영광을 계속해서 비추셨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다락방에 모든 제자가 모였을 때, 마귀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지만, 예수님은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요 13:2-5).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유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시고, 그와 저녁을 함께 먹고 잔을 그와 함께 나누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4~20).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토로하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를 팔아서 살인자의 손에 넘길 사람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다른 제자와 똑같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고, 자기를 넘길 기회만 찾고 있는 제자의 발을 씻기고, 그에게 자기 살과 피의 의미를 설명하며 돌아올 기회를 주는 사랑,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영생을 얻기를 끝까지 오래 참고 온유하게 기다리는 사랑
유월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얼마나 오래 방황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생을 받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외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더 이상 배신하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불신하지 말라고,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 사랑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라고, 형제 자매를 그 사랑으로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라고, 그 사랑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고, 그 사랑 때문에 봉사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나가 전파하라고 우리를 강권합니다. 여러분 그 사랑의 부르심을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오늘 돌이키십시오. 오늘 순종하십시오. 오늘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으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는 연약한 우리를 일으키는 유일한 힘은 주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