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받은 대로 받아 주라

본문 : 로마서 14장 1-12절

설교자 : 이병권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음식들이 더러 있습니다. 닭발이나 곱창, 번데기, 홍어나 생굴 같은 음식들이 그런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음식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음식은 아마도 보신탕일 것입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여론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는 음식입니다. 외국인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한국 문화 중 하나가 보신탕이라고 합니다. 개를 먹는 것이 그들에게는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미국 어느 교회에서 몇몇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주일 애찬이 보신탕이라면 어떨까요? 우리 성도님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다함께 보신탕을 먹는 모습을 보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생각의 차이가 있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다른 모습들이 서로에게 시비 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위협하는 갈등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명령을 하는지 살펴보고 교훈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 이전까지 바울은 조금 일반적인 권면을 했었다면 14장부터는 조금 더 특별하고 구체적인 권면을 시작합니다. 로마 교회에 있었던 문제를 직접 다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믿음이 강한 우리” 다시 말하면, ‘믿음이 강한 자’로 구분되는 그룹이 있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믿음이 약한 자’로 구분되는 그룹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갈라놓았는지 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채소만 먹는 믿음이 약한 자가 있습니다. 채소만 먹는다는 것은 다이어트나 건강을 위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믿는 자가 되었거나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자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교의 정결법에 따라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고기에 대해서, 우상에게 바쳐지거나 병들거나 혹은 자연적으로 죽거나 그들이 정한 방법으로 도축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족시켜야만 먹을 수 있는 정한 음식인데 대부분의 고기가 그들 기준에 맞지 않는 부정한 것이었고 확인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기에 아예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음식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14: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음식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 지키는 날과 절기도 그들을 나뉘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구약의 절기들, 수전절이나 다른 날들을 지키는 것이 유대 배경에 있던 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먹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들, 그 모든 일의 근본적인 문제는 율법에 대한 믿음과 유대교의 전통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자,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중에도 구약의 정결법에 대해 자유하다고 확신했던 자들은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날에 대해서도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긴장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강한 자들이 하나님 명령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고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들이 옛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명령, ‘받으라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받되”라는 말이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환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공동체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이 “너희”에게 주어졌는데, 믿음이 강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한 쪽 편에서 다른 편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건가? 생각할 수 있는데,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먹는 자,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이 다수였기에 그들에게 무게를 두고 있지만, 바울은 양쪽 모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외 없이 모두가 따라야 하는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함께 환영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에 대해서 사랑으로 용납하고 한 가족으로서 서로를 인정하며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비판과 업신여김은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토론을 벌이는 회의소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연약한 사람들을 심문하는 법정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그들을 환영하는 것은 그들 의견에 대한 존중을 포함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받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믿음이 약한 자라 할지라도 가까이 하기 불편하고 답이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받아주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유, ‘하나님이 받으셨다

14:3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에 우리도 그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준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우리도 거절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면 우리도 받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인색합니다. 나와 다른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말을 할 때도 습관처럼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이 있으면 뭐지 하고 쳐다보게 됩니다. 우리가 단일민족이고 서로 밀집해서 살아가는 고밀집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획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불편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명령은 이런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나와 다르더라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편협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공정하십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위선적이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완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최선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셨기에 우리도 받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내가 받은 사람을 너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너를 받았는데, 니가 다른 사람을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질문, ‘너는 누구냐?’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너는 누구기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냐?’ 종에 대한 평가, 종에 대한 권리, 그 모든 권한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종을 비판하고 업신여기며 받으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내가 주인의 자리에 앉는 것과 같습니다.

종을 세우는 분도 주님이시고 종을 낮추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종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답. ‘우리는 주가 아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주님을 신뢰하여 주님이 받으신 자들을 기꺼이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같은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면, 그렇게 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주님을 높이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6절부터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있는데 “주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계속 주를 위하여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는 여기서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대답, ‘우리는 주의 것이다

우리가 주의 것이기에 우리가 사는 목적과 이유가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기에 우리가 서로 정치적인 견해가 다를 수 있고 교회에 대한 생각과 원하는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슈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생활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나타나든지 그 중심에는 같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형제의 생각이 부족하더라도 그 생각이 주님을 위한 생각이라면 존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어느 자매의 열심과 수고가 그 행함에 있어서 미흡함이 있더라도 그 수고가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격려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선한 동기와 양심으로 한 일이라면 비난이나 정죄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에서 벗어나거나 믿음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죄가 아니라면 우리는 사랑으로 받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모든 일이 다 허용되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와 서로의 덕을 위해서 조언할 수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 역시도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해 서로가 받아주고 서로가 주를 위해 수고한다면, 내가 주가 아니라는 사실과 내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더 하나 되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사는 것, 주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주를 위해 살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으시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으시기 위해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받으셨기에 우리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으셨기에 우리도 서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았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받은 대로 받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경고입니다.

경고, ‘심판을 받는다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여기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이 받는 영원한 심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믿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심판은 형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급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한 대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14: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직고한다는 말은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행한 일을 보고하며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우리가 형제에 대해서 더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우리가 다른 지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날에 하나님 앞에서 다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이 경고의 말씀이 우리를 돌이키게 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판단하는 잘못된 태도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지난 잘못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나는 괜찮은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하여서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잘못들, 그리고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믿음이 약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믿음이 약한 자를 비판하는 것이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무엇을 위함인지 누구를 위함인지 주님 앞에 섰을 때 괜찮은 것인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받으라는 명령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전화 받는 것을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면 우리는 그 사람과 내가 직접 연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화끼리 직접 연결된 것이 아니라 통신사의 기지국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전화를 하더라도 직접이 아니라 거쳐서 연결됩니다.

교회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직접 연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 자매를 대할 때에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를 대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통해서 서로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형제, 자매를 생각하고, 주님을 통해서 형제, 자매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이해하고 주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통하면 받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가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나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받으셨기에 나도 형제, 자매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대로 서로를 받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