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울의 유언
본문 : 사도행전 20장
설교자 : 조정의
만일 7-8년 헌신하여 세운 교회를 떠나 완전히 새로운 선교지로 보내심을 받는다면, 남겨진 교회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말할까?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떠난다면?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지만, 삶을 바쳐가며 온 맘 다해 사랑한 성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눈물과 진심으로 전할 것이다.
바울이 그랬다. 세 차례 전도 여행을 약 7-8년간 다니면서 세우고 돌아본 교회들과 작별하고 이제 예루살렘, 로마를 거쳐 완전히 새로운 선교지인 스페인으로 갈 계획이었다. 다시는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 성도들과 볼 수 없을 것을 각오했고, 심지어 성령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 것이라 말씀하셨다.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몰랐다(22-23절). 바울의 유언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교훈을 배워보자.
1. 유언의 배경: 작별 여행(1-6, 13-16절)
에베소에서 일어난 큰 소요가 그치고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갔다(1절, 고전 16:8-9). 지난 수년간 자신이 세운 교회를 하나하나 방문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고별 설교를 한 것이다. 마게도냐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가 있었다. 바울은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고별 설교) 헬라에 이르렀다(2절).
헬라는 아가야 지방을 의미하는데, 그곳엔 고린도 교회가 있었다(아덴, 겐그레아). 바울은 문제 많던 이 교회를 향하여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방문하여 그들을 세워주고 위로했던 것이다. 석 달간 머물면서((고전 16:5-6, 겨울 지냄) 바울은 로마서를 집필했는데, 곧 로마를 통과하여 스페인으로 가려는 뜻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롬 15:22-29).
고린도 교회에서 제법 긴 시간의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수리아 안디옥 행 배를 타려 했지만 유대인이 자기를 해하려는 공모가 있음을 알아채고 왔던 길로 돌아가기로 한다(3절).
4절에 기록된 여러 동역자들은 ① 마게도냐(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빌립보?)와 ② 아가야(바울이 직접, 고전 16:1-4), ③ 아시아(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 ④ 갈라디아(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 네 지역을 대표하는 일꾼들로 예루살렘 구제에 필요한 헌금을 각 교회에서 후원받아 바울에게 건네주는 역할을 했다. 동역자들은 바울과 만나기로 한 드로아에 먼저 가서 기다렸고, 바울은 누가와 함께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냈다(6절, “우리는”).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레(7일) 머물며 고별 설교를 했고,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통과해(섬들) 해안 도시 밀레도에 도착했다(13-15절). 내륙으로 들어가 3년을 헌신한 에베소에 들리고 싶었지만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만남을 위해 밀레도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16-17절).
2. 유언의 성격: 사도가 목사에게
유언의 내용을 살펴보기 앞서 바울이 전한 유언의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 바울의 고별 설교는 사도행전 전체에 기록된 바울의 다섯 번째 설교로 믿는 자에게 전파하는 설교문으로는 유일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상이 목사였다(17절).
고별 설교의 내용은 두 가지로 크게 구분되는데, 첫째, 바울이 그들에게 보인 삶의 본을 따르라는 것(17-27절), 둘째, 바울이 떠나고 나서 목사로서 성도를 마땅히 어떻게 섬겨야 한다는 것(28-35절). 사도(원로)가 목사에게 전하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첫째, 바울은 목사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고로 바울의 본은 목사뿐만 아니라 성도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 바울이 목사에게 성도를 어떻게 섬기라고 권면한 것을 통해 우리는 성도가 목사의 인도와 돌봄과 보호 아래 어떻게 신앙을 지켜야 할지 배울 수 있다. 가령 부모에게 자녀를 정직하게 키우라고 권면했다면, 자녀는 정직하게 자라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걸 배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고별 설교는 일차적으로 목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성도 또한 지켜야 할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그러면 바울의 유언—고별 설교—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3. 유언의 내용: 세 가지 교훈(18-35절)
(1) 목숨걸고 사명을 지켜라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24절). 그는 18절에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후에 나오는 모든 내용(겸손, 눈물, 시험-19절, 가르침, 증언, 사랑, 희생 등)의 목적 혹은 원동력이 바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는 것,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경주)이었다.
후에 22장(천부장)과 26장(아그립바 왕)에서 바울이 변명할 때 주 예수님이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신 장면을 회상한다(다메섹 도상). 주 예수를 만난 그때 바울은 그분의 영광과 사랑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주를 위한 삶을 시작했고(빌 1:20-21) 신실하게 끝마치는 것이 목숨보다 귀한 일이 됐다(22:15, 21; 26:16-18).
바울은 남겨진 교회가 모두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했다. 로마에 쓴 편지를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했다(롬 14:7-8). 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우리 삶은 방향 없이 달리는 삶이 아니다(고전 9:26). 우리에겐 분명한 삶의 목표, 달려갈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오라고 명하신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다(28절). 우리는 모두 그분의 영광과 사랑에 사로잡힌 자들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그때부터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바울처럼 목숨보다 예수님 따르는 삶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바쁜 삶을 살 수 있다. 많은 성공을 거둔 삶, 부를 쌓는 삶, 주변의 인정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아니라면 모두 불타 없어질 공적이 아닌가? 반대로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고전 3:13-15). 계속해서 사명을 기억하라. 반복해서 되새겨라. 목숨 걸고 사명을 지켜라.
(2)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라/전하라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다(24절). 그래서 27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심지어 26절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담대히 선언한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음은 좁은 의미에서 전도만 가리키지 않는다. 32절에 “은혜의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신자에게 유익한 모든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뜻을 포함한다. 그래서 20절에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물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르치는 “복음”도 포함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21절).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이 자신처럼 성도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길 바랐다. 그 말은 곧 성도들이 올바른 진리 위에 굳건히 서 있기를, 신실한 가르침을 부지런히 배우길 원했단 말이다.
이유: 바울은 곧 교회에 불어닥칠 거짓 교사의 위험을 내다보고 경계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습 3:3; 겔 22:27)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니골라 당, 계 2:15)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29-30절).
바울이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가르친 진리에서 교회가 조금이라도 변질된다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31절에 이렇게 호소한다.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가르쳤는지 하나의 예시가 7-12절에 나온다. 드로아에서 주일에(주간의 첫날, 7절) 떡을 떼려 모였을 때 밤중까지 강론(토론)했는데 유두고(“운 좋은 사람”)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그만 삼 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하나님 은혜로 그를 살리고 바울이 무얼 했나? 11절,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설교) 떠나니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다(딤전 3:15). 진리에서 멀어지면 교회는 무너진다. 가르치는 사람은 바울처럼 열정적으로 공적인 장소에서든 사적으로든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쳐야 한다(딤후 4:1-2). 배우는 사람은 부지런히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한다(딤후 3:14). 그래서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한 말처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길 바란다(벧후 3:18).
(3) 희생적인 사랑을 행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희생적인 사랑으로 성도를 섬겼다. 19절에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 말했는데 그의 눈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삼 년 간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훈계할 때 나타났다.
그의 겸손은 33-35절에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삶을 불태우며 희생적으로 그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했지만 정작 물적인 필요는 그들에게 조금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3-35절). 받는 것이 잘못되서 그런 게 아니다(딤전 5:18). 그들 중 약한 자들이 받는 것으로 시험을 받아 진리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희생적인 사랑을 행하여 자비량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바울은 후에 빌립보에 편지할 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빌 2:3). 겸손은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할 사랑이다. 바울은 뒤이어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했다(빌 2:5).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면, 우리가 낮추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면, 자기를 낮춘 이들 또한 높이지 않으시겠는가?
바울은 또한 로마 교회 편지하면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했다(롬 15:1). 때로 왜 나만 붙들어줘야 하지? 왜 나만 끌어당겨야 하지? 왜 나만 섬겨야 하지? 억울할 때가 있지 않은가?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처럼. 연약한 성도가 주변에 왜 이리 많은지(“이 모든 백성을…내가 낳았나이까”(민 11:12). 바울은 우리가 서로 받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으셨다면, 나같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받으셨다면 내가 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왜 받지 못하겠는가?
바울이 전한 고별 설교(유언)는 우리에게 익숙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고전 13:13).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그 믿음의 힘으로 세상 거짓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32절에 바울이 한 말을 보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소망,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러므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빌 3:14).
사랑.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 제자인 줄 안다(요 13:34-35). 사랑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장 겸손한 사랑이다. 주고 나서 받기를 기대하는 ‘공평’이 아니라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복되게 여기는 ‘희생’이 바로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이다.
이런 믿음, 소망, 사랑이 모든 성도의 삶에 항상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