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울의 간증

본문 :  사도행전 22장

설교자 : 조정의

바울은 성전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뻔한 상태로 로마 천부장의 손에 이끌려 안토니아 영내로 들어왔다(21:31-36). 천부장은 바울이 애굽 출신의 악명높은 로마 반역자라고 생각했지만, 능숙한 헬라 말로 바울은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시민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기 백성에게 변명할 기회를 달라고 했고(38-39절), 허락을 받아 층대 위에 서서 유대인들에게 자기 민족의 언어, 히브리 말로 구원 간증을 했다(40절).

구원 간증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놀랍고 큰 역사를 일으킨다. 신자는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 영혼을 택하시어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하시는지 그 놀라운 역사에 감탄한다. 하나님이 자기 삶에 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불신자는 간증을 들으며 현재 자기 삶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를 염려한다. 신자가 누리는 은혜와 영생을 동경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도 곧 만나주시기를 소망한다.

바울도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간증했다: ① 구원받기 전: 나도 너희와 같았다, ② 구원받은 때: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셨다. ③ 구원받은 후: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을 산다. 바울의 간증을 통해 신자는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불신자는 구원의 은혜 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길 기도한다.

1. 구원받기 전: 자기의 의를 따랐던 때(1-5절)

바울은 구원받기 전, 자신이 얼마나 그들과 같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형들아”(아비, 형제)라는 친숙하고 공손한 호칭으로 불렀고(1절; 행 7:2), 민족의 언어 히브리 말로 말했다(2절). 3절에선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배경이 철저히 정통 유대교였음을 밝힌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빌 3:5).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서 자랐다(이 성에서 자라). 교육은 정통 유대교 교육 중 최고(힐렐, 아키바)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빌 3:6). 바울은 말한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3절; 갈 1:14). 더했으면 더했지 너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계속 동질감을 느낄만한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 조상들의 율법”(3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14절). 다메섹에서 바울의 회심을 확인 시켜 준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다(12절). 그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라고 바울을 불렀다(13절).

바울이 율법에 열심이 대단했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도 있었다(4-5절). 지금 유대인들이 바울이 믿고 있는 도를 박해하고 바울을 죽이기까지 하려 했던 것처럼 바울도 과거엔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4절; 8:3).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다(5절). 바울은 그들에게서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 남녀를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했다(5절; 행 9:1-2).

바울은 청중이 과거 자신처럼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것은 좋지만 큰 문제가 있다고 믿었다. 그 열심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란 것이다. 로마서 10장 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모든 죄인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ν)가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는 것이다. ‘옳은 것’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단 말이다(삿 21:25; 롬 1:32).

‘신과 함께,’ ‘지옥’ 등을 보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삶을 총결산한 뒤 그 사람의 의로움에 따라 영원한 형벌과 보상이 주어지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 손가락질하는 범죄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에 신에게 격분한다. 동시에 ‘선량한’ 사람이 합당한 보상을 받기를 신에게 간청한다. 이생에서 안 되면 내세에서라도 반드시 합당한 처벌이나 보상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정)의는 살아있어야 한다!

문제는 의로움의 기준을 자기 스스로 세운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지만,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은 너무 많다. 자기 의를 세우려 애쓰는 자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굳게 믿었다. 특히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얘기한 것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다(빌 3:6).

예수님은 여러 가르침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그들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셨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perfect)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그래서 결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셨다(마 5:17-48).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 비유를 통해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는 의롭다고 굳게 믿는 자가 결국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고 경고하셨다(눅 18:9-14). 의로움의 기준, 의롭다는 최종 판단 모두 하나님!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기 삶을 평가해야 한다. 왜 죄인이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지 않는가? 결국, 자기 기준으로 자기 삶을 바라보고 이 정도면 의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완벽한 기준으로 자기 삶을 바라보라.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히 거룩하고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결코 이를 수 없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완벽함’(만점)을 요구하신다.

2. 구원받은 때: 하나님 의를 만났을 때(6-16절)

바울은 마침내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만나주셨을 때 그분을 믿어 얻게된 하나님의 의였다.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했다(롬 3:21-22).

6절부터 바울이 설명하는 장면은 그가 구원받은 때 곧 나사렛 예수께서 그를 만나주셨을 때의 장면이다. 그가 다메섹에 가는 중 가까이 갔을 때 오정쯤(낮 12시) 되어(역사적 사실),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자기를 둘러 비쳤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빛도 보고 음성도 들었지만, 그 빛을 내신 분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이해한 사람은 바울뿐이었다(8-9절; 행 9:7).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쓴 게 아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주셨다(8절). 

후에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절). 바울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셨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의인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처음에 바울은 자기를 만나주신 분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두려움에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대답했다(8절). 하지만 나사렛 예수이심을 알고 나서 그는 다시 한번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다(10절). 그의 믿음을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님께 둔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눈을 멀게 하셨다가 아나니아를 통해 다시 뜨게 하셨는데(13절), 그와 같이 하나님은 죄로 눈먼 바울을 의인 예수님을 통해 깨끗이 씻어주셨다(16절). 자기 죄를 씻으시고(대속)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신 예수님 이름을 힘입어 구원받고 이를 공표하는 침례에 순종했다(16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죽음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최후의 심판을 내리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의롭다’는 판결을 받을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다. 자기 의를 내세우든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의를 자랑하든지. 

당신의 모든 공덕을 하나님 앞에 쌓아보라. 선량하고 도덕적으로 잘 살았다는 것, 종교생활에 헌신한 것, 가난한 자를 돕고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것, 가족과 성도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가족을 부양한 것…또 뭐가 있지? 하나님의 율법을 가져다가 점검해보라. 어떤 부분을 얼만큼 잘 해냈는지 적어보라. 당신의 의로움을 최대한 다 쌓았다면, 하나님께 여쭈어보자.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어림도 없다. 하나님은 완벽을 요구하신다. 당신은 절대로 자기 의를 내세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의를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벽한 의로움을 삶과 죽음과 부활로 확증하셨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연약함, 우리 허물, 우리 죄를 모두 씻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분의 완벽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갈 3:27).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로 구원받는다.

바울이 로마서를 비롯한 모든 서신서마다 강조한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또 지금 자기 간증을 듣는 유대인들, 최선을 다해 자기 의를 세우려 애쓰는 동족들이 제발 알기 원했던 올바른 지식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세울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분만이 우리 자랑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3. 구원받은 후: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17-30절)

생각보다 많은 신자가 구원받은 것에 안도하고 감사하지만 구원받은 후 어떻게 그리고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른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바로 오는 여러 세대에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엡 2:7).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는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말과 삶으로 증거하는 것으로. 주님이 바울을 만나주시고 그에게 명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5절; 마 28:18-20).

바울은 구원받은 후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그 일을 마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렀다. 

이 간증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17-21절까지 바울이 어떻게 청중의 죄를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는지 보자.

바울은 다메섹 회심 약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했던 때, 자신이 본 환상을 이야기했다(17절). 주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 주님은 이렇게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바울이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주님을 설득한다.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19-20절). 무슨 말인가? 그토록 열심히 자기 의를 좇던 자가 이렇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사인 예수님을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다(롬 6:23).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가 바울의 회심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다른 곳으로 부르셨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1절). 예루살렘 유대인의 거절로 바울은 그곳을 떠나 여러 이방 지역을 다니며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은 바울의 증언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을 향해 격분했다.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23절).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라고 소리 질렀다(22절).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한편 구원받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다. 유대인의 큰 소동으로 천부장은 바울이 뭔가 잘못한 게 있다고 판단하고 채찍질하며 심문하여 밝히려 했다(24절). 다행히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어 반영구적인 불구상태나 죽음까지 이르는 무서운 채찍질을 면하게 되었다(25-29절). 하지만 바울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튿날 제사장들과 온 공회 앞에서 심문받는 걸 시작으로(30절), 40 여명의 암살 조직의 위협, 세 차례 이방 재판관의 심문, 로마까지 포로로 끌려가며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 등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대가를 아직도 많이 치러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자랑했다. 아무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했다(빌 1:20).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 권리, 자기 의 등 자기 중심성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고 거절하는 자의 특징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자기 중심성을 버려야 한다. 

자기 중심성의 문제를 깨닫고 하나님 의를 오직 은혜로 얻은 자는 기쁨으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8:35).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친히 보여준 역설이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잃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역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에게도 참이다.

누구든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욕구와 기대와 기준을 가지고 살면 잃어버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자기 중심성을 부인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은 우리를 구원한다. 참된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따를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당신은 어떤 간증을 남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