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스라엘의 실패 보고서

본문 :  로마서 11장 7-12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말씀 “이스라엘의 실패 보고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분석과 영향, 그리고 전망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실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이 이러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소수의 이스라엘,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바울은 앞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믿음이 아닌 행위를 의지한 이스라엘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지만 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애를 쓰다가 예수님을 통해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중요한 단어로 5절에 나오는 “남은 자”를 살펴봤는데, 오늘 말씀에도 “남은 자”가 나옵니다. 하지만 7절의 남은 자와 5절의 남은 자는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단어 자체도 다르고 지칭하는 대상도 다릅니다. 7절의 남은 자는 택하심을 받은 자가 아닌 그 나머지의 대상을 말합니다. 5절의 남은 자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5절의 남은 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소수의 이스라엘이고 7절의 남은 자는 하나님의 의를 거절한 대다수의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습니다. “우둔하여졌다”는 것은 돌과 같이 되는 것, 굳어지고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옛날 성경으로 말하면 이러합니다. ‘완악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는 교만함에 대해서 처벌하십니다. 그들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완악함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완악하게 된 자들은 스스로 선택한 죄 속에 갇혀서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갑니다. 멸망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여기서 다시 하나님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합니다. 그들이 우둔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해서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 번에 걸쳐서 구약을 인용합니다.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8절은 구약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의 말씀과 이사야의 말씀을 함께 인용한 것입니다(신29:4; 사29:10).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리고 이사야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영적으로 눈 먼 사람이 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지 않으면 그 놀라운 일을 직접보고 들을지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시편의 말씀을 추가로 인용합니다. 바울은 이번에도 율법서와 예언서, 시편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구약 성경이 이것을 증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1: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시편 69편의 말씀인데 다윗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특별히 8절과 연결되는 것이 ‘눈이 흐려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흐려졌다는 것은 어두워졌다는 의미인데, 완악하게 되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처럼 영적으로 어두워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의 모습은 다윗이 대적에 대해서 구했던 기도가 응답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들의 밥상”으로 표현되는 것, 그들에게 자랑이며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들에게 있어서 안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악에 대해서 보응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쉬운 복음, 어린 아이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인데, 왜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믿지 않는 걸까? 왜 대다수의 이스라엘이 여전히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을까?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많이 들었는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 믿어야 될 것 같은데 여전히 자기 고집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믿지 못하고 왜 깨닫지 못할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어떤 민족보다 잘 알고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고 옛적부터 하나님을 경험하며 쌓아온 교훈과 전통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민족보다 구원에 더 가까이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 당시, 오늘까지도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걸까요? 이스라엘의 실패, 분석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쓰고 온갖 일을 다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시면,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악함을 걷어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빛을 비추셔서 어둠을 몰아내지 않으시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언급하면서 다시 하나님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동안 살펴봤던 것처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를 따라 선택한 결과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다시 언급하는 것처럼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눈이 흐려져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완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과 잘못된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영향입니다. 영향은 다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간’과 ‘효과’입니다. 실패의 영향이 얼마동안 지속되는지 그 기간이 중요합니다. 만약 실패가 영구하다면 영원히 실패가 지속된다면 소망은 없습니다. 또한 영향에 있어서 결과가 중요한데,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징계라면 반드시 그 징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은 결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 ‘넘어지다’는 단어는 ‘떨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떨어졌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징계가 영원하기에 이스라엘은 이것으로 끝일까요? 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은 영구적이고 희망이 없는 걸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실패는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일시적인 것이고 이스라엘은 잠시 넘어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실패 없이는 얻을 수 없는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한이 있는 징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이 때에 맞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과 함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총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가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실패는 영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한이 있습니다.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효과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실패, 그들의 넘어짐으로 인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선교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두 번째와 세 번째 선교 여행 때, 고린도와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먼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반대하고 복음을 거부했을 때 바울은 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너무나 좋은 결과, 효과라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이것은 좋은 결과, 효과가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정말 화가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이스라엘에게도 좋은 결과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이른 효과가 이스라엘에게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자극합니다. 이방인이 얻은 구원을 이스라엘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누려야 하는 복을 이방인이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효과가 됩니다. 긍정적인 결과로 이스라엘이 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정말로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짓 신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를 일으킨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로 통해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고 분노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 목적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보통, 우리는 시기심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는 시기심에 대해서 통찰력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시기심이란 다른 사람이 소유한 어떤 것을 자신도 갖고 싶은 욕망이다. 시기심이 좋은지 나쁜지는 욕망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그것이 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어서 가질 권리가 없다면 시기심은 죄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선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누리도록 허락하신 복이라면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을 시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을 원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불만족이나 이기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이 일을 행하십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일으키시고 이방인의 구원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주도록 하시는 겁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전망입니다.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훗날 이스라엘이 충만함에 이를 때에는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이 상황을 시소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낮아졌을 때 이방인은 높아졌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높아졌을 때는 이방인은 낮아지게 될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낮아짐에도 이방인이 이렇게 높아졌는데 이스라엘이 높아졌을 때는 얼마나 더 높아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했을 때 이방인이 누리는 복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 누리게 될 풍성함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종종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이 이러하다면 나중에는 얼마나 더 풍성함이 될 것인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두 아들이 나옵니다. 형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더욱이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가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동생에 대한 원망은 결국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의 모습은 형과 닮아있고 이방인의 모습은 동생과 닮아있습니다. 그러면 두 아들을 대하시는 아버지는 어떠하십니까?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큰 아들과 작은 아들, 같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같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이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두 아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하더라도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는 두 아들 모두 소중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이스라엘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랐던 율법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이 구별되기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구별되는 것을 넘어서 이방인을 차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어떤 일을 합니까? 복음은 갈라진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하나 되게 합니다.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을 주셨고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실패도 뜻대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구원의 복이 이방인에게로 흐르게 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그 복은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꺾이고 눈을 가리고 있던 어둠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넘어졌지만, 충만한 모습으로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망, 아주 밝습니다. 지금은 어둡게만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전망도 아주 밝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나라의 상황과 경제적인 위기와 코로나와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확정된 밝은 미래를 흔들 수 없습니다.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했고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우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눈부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구원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측면에서는 그 완벽한 계획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말 어쩌다 얻어걸린 일입니다. 우리가 뭘 했다고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된 걸까요?

우리는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그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기에 우리가 보게 되었고 우리가 듣게 되었고 우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우리가 이처럼 복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셨고 듣게 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절대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어떠함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히 베푸신 은혜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실패를 따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실패까지도 그 뜻대로 사용하셔서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에 합당히 반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