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르게 보고, 다르게 살기
본문: 다니엘 1장 1~21절
설교자: 이병권
한 어머니가 시집간 딸의 집에 가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는 일찍 일어나 혼자 밥을 차려먹고 출근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사위가 잘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고마움을 느낍니다. 딸의 집에서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낸 어머니는 이번에는 아들에게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며느리는 자고 있는데 아들이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을 차려먹고 출근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한심하게 보였고 며느리가 괘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황은 같은데 그 상황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평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 일입니다. 모세가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을 한 명씩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보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의 정탐꾼이 사십 일 동안 가나안을 살펴보고 돌아옵니다. 열두 명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모두 같은 것을 듣고 모두 같은 시간을 보내고 모두 같은 것을 경험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열두 명은 서로 다른 평가를 합니다. 열 명은 부정적인 평가를 했고, 두 명은 긍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어떻게 보느냐가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열 명은 그 땅의 백성은 장대한 자들이고 자신은 메뚜기 같았다고 합니다. 그 땅의 백성을 이길 수 없으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두 명은 다릅니다. 그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르게 말합니다.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합니다.
누구 말이 맞습니까? 열 명이 아니라 두 명의 말이 맞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바르게 본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로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많은 일들을 어떻게 보느냐 따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결국 보는 것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바르게 볼 때
저는 오늘 다니엘 1장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교훈을 가지고 바르게 보면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하나의 사건, 다니엘과 친구들이 왕의 음식을 거절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그 앞에 배경이 나오고 그 뒤에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건의 배경, 사건의 내용, 사건의 결과입니다.
첫 번째로 사건의 배경입니다. 사건의 배경, 다니엘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1-2)
이야기의 시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배경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정복되는 장면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여호야김이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여호야김은 어떤 왕이었을까요? 여호야김은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기도 했고 기록된 예언서를 불에 태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는 율법책을 발견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개혁을 주도했는데, 그의 아들 여호야김은 하나님 말씀,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립니다. 결국 그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것이 오늘 사건의 배경이 됩니다. 지금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지금은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불에 탔고 모욕을 당했으며 유다는 바벨론에 편입되어서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긍정적인 것을 찾는다면 바벨론은 정복한 나라의 인재들을 교육시켜서 관리로 등용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소수이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엄격한 선발 기준이 있었습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3-4)
선발 기준이 이러합니다. 우선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어야 했습니다.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신체적으로 흠이 없고 잘 생겨야 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에도 뛰어나서 공부도 잘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선발된 소년들은 3년 동안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집안도 좋고 외모도 좋고 머리까지도 좋은 최고의 인재들만 뽑아서 특별 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엄격한 기준을 다니엘과 친구들은 만족시켰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6) 다니엘과 친구들은 이 모든 기준에 맞는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지 않았다면 정말 그 나라에서 인정받으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벨론에 붙잡혀 와서 낯선 곳에 끌려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교육을 잘 받고 인정을 받으면, 왕 앞에 서는 관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에서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벨론에서 요구하는 것들 잘 따르고 시키는 것들 뭐든지 잘하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책잡힐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 아닐까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건을 만든 것입니다. 만약 다니엘이 바벨론의 것을 다 따르고 모두 받아들였다면 오늘 다니엘 1장은 없을 것입니다. 기록될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저항했기 때문에 사건이 되었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니엘이 어떤 일을 했는지, 두 번째로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사건의 내용, 다니엘은 뜻을 정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만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뜻을 정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낯선 땅에서도 하나님을 따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마음에 새긴다는 것입니다. 굳은 각오로 마음에 결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왕의 음식과 포도주가 다니엘에게 문제가 되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 문제가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지만, 왕의 음식을 거절하고 채식을 했던 것을 보면 왕의 음식에서 고기가 문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왕의 음식에는 율법에서 금한 부정한 고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에 짐승을 잡으면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가지고 가서 포도주와 함께 바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다이어트를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을 지키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절합니다. 왕의 음식이 자신을 더럽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다니엘을 뜻을 정합니다. 굳게 결심합니다. 이런 결심이 쉬울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학자들은 다니엘의 지금 나이를 15세 정도로 말합니다. 15세, 한창 먹을 나이입니다. 먹고 돌아서면 또 배고플 나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이 분명했습니다. 뜻을 정합니다. 그리고 매 끼니마다 바벨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음식들을 거절합니다.
이런 결심이 쉬울까요? 다니엘은 기대하지 않았던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짓 우상들을 섬기는 타락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살아야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무너졌고 그들의 포로가 되어 그들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왕의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10) 왕의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죽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같이 훈련을 받고 있는 소년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남들은 다 잘 먹고 있는데 왜 저렇게 튀려고 하는지 욕하지 않을까요?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각오한 결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 기준을 낮추라는 압력과 공격들, 타협하라는 유혹들, 다니엘이 만난 어려움은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니엘처럼 뜻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삶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준을 가지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겠다고 결단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과감하게 끊어야 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돌이켜야 하는 삶의 태도나 습관, 절제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께 기도하며 이렇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뜻을 정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을 넘지 않겠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겠습니다. 거룩을 지키겠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세상의 타락한 문화를 거절하겠습니다. 더러운 것들, 부도덕하고 음란한 것들을 멀리하겠습니다. 불법을 버리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사람들의 조롱을 받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따라 뜻을 정하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이런 기도와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을 거절합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세 번째로 사건의 결과, 다니엘은 인정을 받습니다. 다니엘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뜻을 정하여 왕의 인정을 받습니다.
사건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12-13)
왕이 정한 음식을 임의로 바꾸는 일은 목숨이 걸린 일이기에 책임을 맡고 있는 환관장도 함부로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친구들은 열흘 동안 테스트 과정을 거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 대신, 물과 채식으로 식사를 하고 열흘 후에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러합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15)
채식을 했던 다니엘과 친구들은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했다고 합니다. 혈색이 더 좋았고 더 건강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친구들은 왕 앞에 설 때까지 교육을 받는 3년 동안 채식을 허락받게 됩니다. 3년 내내 채식을 합니다.
물론, 여기 말씀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육식보다 채식이 더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훗날 다니엘도 고기를 먹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10:3). 이것은 단순히 고기를 먹고 안 먹고 채식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니엘과 친구들이 인생에서 만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한 사건이고 왕의 음식 대신에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을 선택한 사건이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한 사건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거룩한 목적으로 3년 동안 왕의 음식을 포기했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보상하십니다.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19-20)
다니엘과 친구들은 정해진 3년 동안의 교육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서게 됩니다. 바벨론의 왕은 다니엘과 친구들을 인정합니다.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친구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1장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21) 고레스 왕은 바벨론이 멸망한 다음에 세워진 바사의 왕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서 바사의 정치에도 관여하며 계속해서 왕을 섬기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누구보다 빨리 목숨을 잃을 것 같은 다니엘인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누구보다 위험한 길을 선택했던 다니엘인데,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도 그 막강한 나라 바벨론이 멸망할 때에도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강건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사건의 배경과 내용 그리고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배경은 다니엘이 어려움을 만난 것이고, 내용은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이고, 결과는 다니엘이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되고 다니엘처럼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보고,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부족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똑같은 동사가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다’라는 단어인데, 우리 성경에는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의 배경에서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2) 여기 “넘기시매” 라는 말이 ‘주다’라는 단어입니다.
두 번째, 사건의 내용에서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9) 여기 “얻게 하신지라” 라는 말이 ‘주다’라는 단어입니다.
세 번째, 사건의 결과에서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17) 여기 “주시고” 라는 말이 ‘주다’라는 단어입니다.
세 차례에 걸쳐서 ‘주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동사들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누가 주었다는 겁니까? 주어는 모두 같습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다니엘이 어려움을 만났고, 다니엘이 뜻을 정했고, 다니엘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냥 보면 다니엘이 주어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보면 누가 주어입니까?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다니엘이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런데 바르게 보면,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합니다. 그런데 바르게 보면, 하나님이 뜻을 정한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르게 보면,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니엘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셔서 다니엘을 위해 행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초에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된 일부터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배한 결과로 보이겠지만 바르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1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 왕에게 하셨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다니엘과 친구들이 왕의 음식을 거절하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환관장과 좋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겠지만 바르게 보면,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다니엘과 친구들이 어떤 지혜자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은 바벨론 왕의 명령대로 바벨론에서 교육한 결과로 보이겠지만 바르게 보면, 하나님이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만난 어려운 환경도 다니엘이 얻은 사람의 은혜도 다니엘이 받은 지혜도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선하신 뜻을 위해 그 뜻대로 역사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르게 보면, 불평하지 않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만난 어려움으로 실족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 환경을 통해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이 어려움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그렇게 바르게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이 주어가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믿음으로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위해서 뜻을 정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좋은 결과를 거둘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뜻을 정하고 말씀에 따라 산다고 해서 항상 내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대로 했을 때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거둘 때도 있습니다. 뜻을 정하고 실천했을 때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더 고생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얻는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내가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고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고 내 삶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은 그런 나와 함께 하시고 그런 나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삶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주님을 위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