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제의 하나님, 오늘의 나
본문: 시편 44편
설교자: 최종혁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신다.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이 땅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믿고 살까? 궁극적으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성령님은 두 가지를 통해 그 믿음의 기초를 놓으신다. 객관적인 기초와 주관적인 기초다. 객관적인 기초는 바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란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

주관적인 기초는 우리의 경험이다. 경험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과 내 경험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간증)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주권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힘있게 와닿는 것은 바로 나의 경험이다. 내가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큰 확신으로 이어진다.

이런 기초 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 기초는 우리가 성경을 알면 알수록,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그 말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큰 확신으로 자라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삶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며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기대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이 상황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질 때 그렇고, 그런 상황이 길게 이어질 때 그렇다.

시편 44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그런 당혹스러움을 볼 수 있다. 이 시편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을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상황은 분명하다. 그들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 패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배운 하나님과 이 상황을 도저히 함께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상황들이 있고 그럴 때 우리는 다양하게 반응한다. 변하지 않는 믿음을 보이기도 하지만 분노하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포기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이 시편에서 보여지는 반응은 ‘당황’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이 시편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길게 기록한 후 하나님께 묻는다. 23-24절.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I. 과거의 사실(1-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1절)

우리 조상들의 날, 옛날, 그리고 귀로 들었다는 표현들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해들은 세대의 사람들이다.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주기를 좋아한다. 사실 나이를 떠나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속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해줄 것을 명하셨다.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의식을 통해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거대한 제국인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는지를 전해주라고 명하셨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셨는지를 계속해서 기억하게 하는 절기였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의 핵심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너희를 사랑하셨고 보호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세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글로 기록해 두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때는 그 때로부터는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들었다. 그 일들은 잊을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히 한가지 역사를 주목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2절)

이것은 분명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한 역사에 대한 표현이다. 단순히 그런 영광스런 역사만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아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강조한다. 우리가 그 땅의 백성을 쫓아내어 정착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3절에서 대조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강조된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3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을 했다. 그들의 팔로 칼을 들고 싸우고 땅을 차지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보다 더 강하고 지혜로워서 그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크고 강하거나 혹은 더 의롭고 거룩해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작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가나안 땅은 그들이 처음부터 넘볼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있었던 처음 두 전쟁이 이것을 증명한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하고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상황을 그려보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말도 안되는 전쟁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와의 전쟁을 앞두고 여리고 앞인 길갈에 진를 치고는 단체로 할례를 행했다(수 5장). 적군을 눈 앞에 두고 군사들을 전쟁 불능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여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단번에 몰살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할례를 행했다.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데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우기 위한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전략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하루하루 성을 빙글빙글 돌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것을 보고 있었을 여리고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여리고는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애굽이라는 대국조차 붙잡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건너편에 있던 왕들을 무너뜨리고 이제 자신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엄청난 무기, 병력, 말들이 들이 닥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와서 한 일은 성벽 주위를 한바퀴 도는 것 뿐이었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며 여리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직접 성벽을 돌기만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게 무슨 전쟁인가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저 견고한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고 그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어진 아이성의 함락은 전혀 반대의 경우를 보여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작은 아이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있던 죄를 제거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했을때, 아이성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은 정복 전쟁의 초기에 이들의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지를 보여주었다. 이후의 전쟁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성벽을 돌지 않았다. 그들의 칼과 팔로 싸움을 싸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들의 칼로 땅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팔로 스스로를 구원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하셨다.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주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주의 얼굴의 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여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분의 능력으로 그들이 승리하였다.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성경에서 때로 이 표현은 대상의 어떤 무언가가 기쁨을 주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신 7:7-8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말 1:2-3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성경을 아무리 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이유를 이스라엘 자체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유대인들이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그들이 더 하나님께 순종한 겸손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들 사랑하기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그렇게 하셨다. 무엇도 이 주권적인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베푸셨고 언약에 성실한 사랑을 베푸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나 지략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어떤 땅에서 내쫓으실 수도 있고 누군가를 어떤 땅에 뿌리 박게 하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 다른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자들이 승리한다. 이것이 그들의 조상들의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이 사실은 현재의 기대로 이어진다.

 

II. 현재의 기대(4-8절)

현재의 기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4절)

먼저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부른다. 단순히 과거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나의 왕으로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만 주권적으로 일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왕으로 일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구원은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5절)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대적을 누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복할 것을 기대한다. 그들 조상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처럼 이들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절)

지금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조상들을 통해 들은 것이 있어서 그렇고 또 하나는 이들 자신의 경험때문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7절)

이들도 구원하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기초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조상들을 통해 전해진 간증을 통해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기초는 탄탄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에 대한 이들의 반응도 보라.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8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들이 한 일인 것처럼 교만해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자랑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길 원한다. 하나님을 종일 자랑하고 영원히 감사하기 원한다는 말은 과거의 하나님이 오늘도 동일하게 승리하게 하시고 또한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하시기를 기대하며 그 하나님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참 건강한 기대다. 이 기대에 무엇하나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런데 현재의 사실은 그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강한 대조의 표현이다. 그 기대와 현재 마주치는 사실은 너무나 다르다.

 

III. 현재의 사실(9-22절)

전쟁에서 패배했다(10-12)

당연히 승리를 기대했는데 패배가 찾아왔다. 대적이 승리했고 우리는 노략당했다. 죽임을 당했고 포로로 잡혀갔다. 마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장사꾼같았다.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물건을 파는 사람처럼 자기 백성을 전쟁에서 패하게 놔두신 것이다.

 

수치를 당했다(13-16)

그로인해 이스라엘은 수치를 당했다. 하나님으로 인해 자랑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시편 기자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을 9절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9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의 조상들이 땅을 차지했고 자신들도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질문은 왜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함께 하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혹시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하시는데 과거처럼 전능하지 않으신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이 변하지 않고 언약에 있어서도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다른 쉬운 대답은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도 욥에게 와서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욥도 그랬던 여기의 상황도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했다(17-22)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17절)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18절)

언약에 따라 성실하게 행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지 않았다.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의 삶도 하나님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셨다(19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20절과 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20절)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21절)

우리가 혹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다른 신이라도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시고 이미 드러내시지 않으셨겠냐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우리의 무고함도 확실하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왜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승리를 주지 않으실까?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그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으셨던것처럼 이들도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이 주를 위한 상황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결론이다. 시편 44편에서 “주께서”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보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하나님의 손 아래 있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을 수 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이 시편의 기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통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 23-26절

당연히 하나님이 주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도 안다. 잊지 않으셨고 관심을 끊지도 않으셨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난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고난은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힘들다. 견디기도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한다. 하나님의 헤세드로 구원하여주시기를 구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도전

어제의 하나님은 오늘의 나에게 의미가 있는가? 어제의 하나님이 그저 어제라는 전설 속에만 계신 분이라면 오늘의 나하고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시고 동일하시다면 우리는 이 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그 기대와 다른 상황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속에서 여러 고난이 있을 것을 말하며 시편 44편 22절의 말씀을 인용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어제의 하나님은 오늘의 나에게 이런 확신을 주신다. 말씀을 통해, 다른 성도의 간증을 통해,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감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결국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