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믿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본문 : 민수기 13장, 사무엘상 17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은 퀴즈 하나를 풀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보기의 책들은 어떤 점이 같을까요?
1 순교의 영웅들 2 허드슨 테일러의 유산 3 예수의 양, 주기철 4 산돌 손양원 5 닉부이치치의 허그 신앙전기로 분류되는 책인데,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는 책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전기를 읽거나 누군가의 삶의 간증을 들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잔잔한 울림이 되고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는데’, 하고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주님을 향한 열정, 끊임없는 도전과 헌신, 다양한 반대와 실패 속에도 굴하지 않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큰 감동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 굴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지 못한 삶의 태도나 인격적으로 부족한 부분의 책임을 환경으로 돌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자라온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환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수고를 떠넘길 수 없는 겁니다.
어떨 때는 환경에 따라 나의 신앙이 위아래로 요동치기도 합니다. 환경이 좀 좋으면 신앙이 좋았다가 나쁘면 신앙도 나빠집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주님과 멀어져 욕심대로 살다가 환경이 나빠지면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환경에 따라 우리 신앙이 오락가락 흔들릴 때가 많은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그런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굳건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러한 견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을까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내 신앙 하나 지키는 것도 힘들다고 말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믿음을 시험하는 수많은 공격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냥 근근이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가 너무 낮아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믿는 자로서 어떻게 주님을 높일 수 있는지 고민하기보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힘들지 않게 적당히 하면서 욕먹지 않을 정도로 사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삶에 자리 잡은 적당주의, 우리에게 있는 그런 안일한 생각들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위해 그런 생각들을 바꾸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구약에 나오는 두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일인데, 모세가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을 한 명씩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보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이 사십 일 동안 가나안 땅을 살펴보고 돌아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풍족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다녀온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그들은 말 그대로 악평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두 명 중에서 두 명은 다른 말을 합니다. 이 두 명은 누구일까요?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떤 말을 합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14:7-9)
열 명은 그 땅의 백성들은 장대한 자들이고 자신은 메뚜기 같았다고 합니다. 그 땅의 백성들은 이길 수 없으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먹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우리 밥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메뚜기라는 말입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누구 말이 맞습니까? 다수결로 할까요? 열 명이 맞을까요? 두 명이 맞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열 명이 정탐하는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곳을 다녀왔습니까? 그런데 왜 이 둘은 딴 세상에 있다가 온 사람처럼 말하고 있을까요? 왜 열 명과는 다른 말을 하는 걸까요? 무엇이 이 둘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무모함일까요?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걸까요? 그냥 오기를 부리는 겁니까? 아님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을 만큼 업 되어 있는 상태인가요?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열 명과 다른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 열 명과는 다른 말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겁니다. 불우한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어려운 환경을 만난다 하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합니다.
열두 명은 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같은 곳에 갔고, 같은 사람을 만났고, 같은 시간을 보냈고, 같은 음식을 먹었고,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다른 말을 합니다. 믿음이 있었던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온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주어진 환경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까? 살기가 점점 좋아진다고 이야기하나요? TV에 그렇게 나옵니까? 갈수록 살기 힘들다, 어렵다, 안 좋다, 심각하다, 계속 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노인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청년 실업이 문제다. 물가가 또 오른다. 하나같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안 좋은 평가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좋다, 너무 좋아, 완전히 마음에 들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때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그런 날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지금 왜 광야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려운 환경이 앞에 나타나면 하나님의 계획이 달라질까요?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어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겁니까?
‘아! 진짜 미안한데, 지금 상황이 좀 어려워서 약속을 못 지킬 거 같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약속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믿는 것은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환경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악평을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신뢰함으로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보이는 것은 같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니까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가족 챙기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돌보냐고?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바쁜데, 돈 안 되는 일을 왜 하냐고? 내 것을 먼저 챙겨야지, 왜 쓸데없이 남에게 좋은 일을 하냐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그냥 눈치껏 하면 된다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환경에 굴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환경을 극복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음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에서 골리앗이라는 이름의 장수가 기세등등하게 나와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싸움을 겁니다. 골리앗은 사람들이 압도될 만큼 거대한 자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워했고, 누구도 그와 맞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이곳에 왔다가 이 광경을 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 그러고 나서 다윗은 골리앗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용감히 그 앞에 나아갑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며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을 때, 골리앗 앞에 감히 서는 자가 아무도 없을 때, 소년 다윗은 그 거대한 자 앞에 당당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다윗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한 일일까요?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고 실수를 하고 있는 걸까요?
다윗이 상대를 잘 몰랐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모릅니다. 그가 잘 쓰는 공격방법이 무엇인지, 특별히 약점이 어디인지, 골리앗을 이기려면 어디를 공략해야 하는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골리앗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승리의 요인이 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갔을 때 상대가 누구인지, 그가 얼마나 강한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편입니다.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 중요합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 편에 있나?’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싸우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누구의 편에 있습니까? 누가 다윗의 편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 서서 용감히 제일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무기를 가졌는지, 상대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얼마나 키가 큰지, 얼마나 힘이 센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 어떤 적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최강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말하며 골리앗에게 나아갑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골리앗의 무기는 칼과 창이지만, 다윗의 무기는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다윗은 그분의 이름을 걸고 그분과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무기가 더 강할까요?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46)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말합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일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골리앗이라는 눈앞의 거대한 괴물을 두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은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가 겁을 먹고 있는 모습, 모두가 싸우기를 꺼려하고 도망가는 모습은 너무도 잘 보입니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에서 다윗은 무엇을 의지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의지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의 이름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에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보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다른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신 능력 앞에 세상 모든 것들은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주어진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무엇이 더 크게 보이십니까? 세상의 염려와 걱정들이 골리앗처럼 크게 보이십니까? 놀라운 것은 우리는 원하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내 생각 속에서 수많은 골리앗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지 궁금하시면 집에 가셔서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걱정을 할 수 있는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십시오. 정말 이런 저런 수많은 걱정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걱정들을 하고 있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걱정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마주하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환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구약에 나오고, 한 사람은 신약에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을 살펴보면, 환경이라는 것이 우리가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구약은 아담이고, 신약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아담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두 사람은 어떤 환경이었습니까? 아담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상태였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단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담은 에덴이라는 낙원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어려움, 아픔, 배고픔, 피곤함, 전혀 없는 완벽한 곳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광야에 계셨습니다. 메마른 땅,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아담과 예수님은 너무도 반대되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넘어간 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아담입니다.
예수님은 최악의 환경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반면에 아담은 최상의 환경에서 실패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유혹을 거절함으로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을 불신했고 유혹에 넘어가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환경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적인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불신, 그것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정신이 빼앗겨, 겉으로 보이는 크기에 속아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겁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말고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나의 능력이 되십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그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십시오.
저는 오늘 말씀을 아주 오래된 편지 하나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2세기 후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디오그네투스’라는 인물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당시 극심한 핍박가운데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아주 특별한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살지만 오직 나그네로 삽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자녀를 내다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을 개방하고 음식을 서로 나누지만 침실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신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부요케 합니다. 그들의 궁핍함을 다 말할 수 없지만 동시에 그들은 다 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립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여전히 그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은 경멸을 당하지만 경멸하는 자를 향해 복을 빌어 줍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고 악인으로 처벌을 받습니다. 그들은 억울하게 처벌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그 능력으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5:7새번역) 이 땅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