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 안에서 사는 것
본문 : 갈라디아서 2:20-21
설교자 :  조 정 의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지난 4개월 동안 함께 공부한 야고보서의 핵심은 한 마디로 ‘참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모든 환경에 대해서 기쁘게 여겨야 한다, 불평과 차별, 원망이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등을 배웠습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자연히 ‘내 행위는 과연 그러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날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면 스스로 구원을 확신하고, 또 다른 날 자신이 분노하거나 뭔가 잘못을 했을 때는 구원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행위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강조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행위로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이 율법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날마다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의로움을 얻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에서도 참선을 하고 선행해야 합니다. 이슬람교도 코란의 계율을 지켜야 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가 의로움을 얻는데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주의, 즉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강해질수록 교회 안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정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여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을 때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의 영향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야’라며 주변의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다보면, 결국 스스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노력해도 안 되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화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3절과 15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오직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오직 ‘은혜’로 의로움을 얻는 복음이었는데 그들은 현재 다른 복음을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찾아왔을 때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그의 외식적인 행동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나바도 유혹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할례, 행위에 의지하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냐’며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그들이 들은 복음은 ‘은혜로 온전히 얻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움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행위로 의로움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위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당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잘 살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의로워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려면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벽하신 거룩함만큼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하고 행동에 아무런 죄도 없어야 하며, 말과 행동의 동기까지도 잘못된 것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금의 악도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이것을 완벽하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하나님같이 거룩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로움의 기준에 오를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다시 ‘행위’ 중심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로 살고 있으니 거룩하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면서 의롭지 못하다고 정죄하게 됩니다. ‘은혜’로 의로움을 얻은 우리가 ‘행위’를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도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 이것은 십자가의 강도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연합한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 즉 율법의 요구조건을 완전하게 충족시키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다 이루었다”의 의미입니다. 율법은 완벽한 삶을 요구합니다. 말과 행동,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처럼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율법의 저주는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고 죄책감을 받으며 죄의 심판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와 같은 율법의 모든 요구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게 하거나 덜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고 낙심하며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모든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거나 분노케 할 수 없고, 반대로 내가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거나 나에게 어떤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정도면 거룩하니까 나를 사랑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여전히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역시 우리가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여러분을 의롭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행위를 가지고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 이 말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산다거나, 내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무조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때로 죄를 짓기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며 화를 참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믿는 자 안에는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성령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날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성화된 삶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삶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사도 바울도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 안에서 잘 산 것 같지만 어떤 날은 죄로 인해 실패하는 삶을 삽니다. 아브라함은 때로 믿음의 조상처럼 살지만 어떤 날은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이방신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을 선포했던 엘리야도 어떤 날은 두려움에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보면 연약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육체를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요 15:9),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오늘날에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가끔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도 그런 일은 힘든 일인데, 하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양 되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받으셔야 할 합당한 대우는 이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2,13). 그런 예수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나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2-4). 찬송과 영광 존귀를 세세토록 받기에 함당하신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멸시와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 더 되는 천사를 데리고 그들을 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죄가 있었을까요. 주님은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20절).

예수님은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의로움을 옷 입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의지한다면 넘어지고 좌절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육체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행위를 의지한다면 예수님이 헛되이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의로움을 얻었고 또한 은혜로 성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로 성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은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성령을 통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쁨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마음껏 살아도 된다’,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순종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자녀가 말을 잘 듣는다고 부모가 더 사랑하거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강령들을 종합하면 한 마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기뻐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성도들이 쌓아올린 것을 태울 때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으로 그의 상이 주어질 것인데, 태울 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고 평생을 헌신한 부모에게, 어떤 감사도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후회와 부끄러움이 어떠할까요?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늘에 속한 좋은 것들, 신령한 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비하신 복이 많이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과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은혜와 축복을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고 부부가 서로 닮아가듯이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순종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부모의 말에 사사건건 불순종하면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자녀가 있을까요? 순종하지 않고는 친밀한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사랑하십시오.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고,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품어주시고, 죄를 짓고 돌아와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우리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때때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처럼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움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온전히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