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목마른 사람(들) 1
본문: 요한복음 3장 1-21절
설교자: 최종혁
바로 전 장인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사실 대화라기 보다는 수업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부르며 자신을 배우는 자의 위치에 두었고 그에 맞게 예수님은 선생님으로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주셨다. 대화가 시작된 후로 니고데모는 두 차례 질문을 한 것 외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만 있었다.
이에 반해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서로 계속해서 말을 주고 받는다. 아마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과 개인의 대화 중 가장 긴 대화일 것이다.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여인과 수가의 사마리아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고, 요한은 이 대화를 중심으로 사건을 기록하여 읽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한다.
대화의 중간에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10절)이라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물 좀 달라고 하신 예수님 자신이 사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을 주실 분이심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증명하셨다(14절, 17-18절). 그리고 참된 예배를 알게 할 메시야를 여자가 언급하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고 답하셔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꽤나 직접적으로 밝히셨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한번도 “내가 바로 메시야다”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그에 가장 가까운 말씀이 바로 이 여자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신 이 말씀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끝에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했다(42절).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 사건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고 또한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으로 기록되었고, 그 중심에 예수님을 만났던 한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었던 예수님은 육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목말라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그녀에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고 그녀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그 마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에는 구원, 예배, 전도라는 중요한 주제들이 함께 나타난다. 이 주제들의 관계에 대해서 존 파이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그 목표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끝나고 구속 받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될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남는다. – 존 파이퍼, <열방을 향해 가라>, 19
선교(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예배가 목적으로서 가장 끝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자들은 회복된 자들로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배가 영원히 남고 전도는 일시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은 예배가 궁극적인 목적이란 의미이며 또한 지금이 아니면 전도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참된 예배자를 찾는 일은 지금만 할 수 있다.
바로 이 원리를 요한복음 4장 1-42절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 뿐 아니라, 헛된 것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구원자일 뿐 아니라 전도자시다. 오늘은 1-15절을 통해 한 사람을 찾아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보자. 구원, 예배, 전도 중에서 오늘은 구원에 초점이 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우물가이고 예수님께서 찾아온 사람은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왔던 한 여인이었다. 예수님은 능숙한 전도자답게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셨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고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알게 하셨다.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의 사건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여러 면에서 3장의 니고데모와 대조된다. 일단 이 사람은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7절)이라고만 소개되어 있다.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여자여서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도 그렇고 성경은 필요에 따라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니고데모의 경우 당시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인물이었다. 특히 예수님을 장사지낸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신뢰할만한 증인이었기에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필요했겠지만, 이 여자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이후에라도 교회사에서 알려졌다면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않기 때문에 굳이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자가 “사마리아 여자”였다는 것이다. 이 두 단어 모두가 주목할만하다.
먼저 이 여자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경기도민’과 같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표현이 아니라 ‘한국인’과 같이 혈통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물론 이 여인은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살고 있기는 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로 분열되었고, 남쪽의 유다는 부침을 겪으면서도 그래도 참된 신앙의 전통이 이어졌던 반면, 북쪽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 숭배에 더 빠져갔다. 북이스라엘도 나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기도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종교적 혼합주의였을 뿐이다. 북왕국의 왕들은 이런 상황을 바로 잡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더욱 이런 우상 숭배에 심취했다. 이런 우상 숭배, 특히 바알 숭배의 대표적인 왕이 아합 왕이고 그의 아버지인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건설하여 북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그 후로 예루살렘이 유다를 대표하듯,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처음에는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북쪽의 나머지 열 개의 지파로 나누어졌던 왕국은 점차 참된 신앙을 찾아온 남쪽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물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모두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튼 더 먼저 하나님을 떠난 북쪽의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 B.C. 722에 사마리아 성이 완전히 함락되면서 남유다보다 먼저 멸망하게 된다.
주목할 것은 앗수르의 피정복지에 대한 전략이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민족융합 전략을 사용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 나라로 사로잡아갔을 뿐 아니라 자국민들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살게 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도 그렇게 되었다. 이들이 ‘사마리아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남유다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서 성전 건축을 돕겠다고 했지만(스 4:2), 스룹바벨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그 도움을 거절했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에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건축을 방해했었다. 그리고 그후 헬라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마게도냐 주민들을 이주시키기도 했고, 이 쯤에 사마리아인들이 모세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면서 그리심 산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고 그곳에 성전을 세우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분열을 넘어서 공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구약의 외경인 집회서가 이런 적대적 관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서는 “민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자들”이 바로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 즉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적 관계는 요한복음 8:48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한 말을 봐도 알 수 있다.
요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이 말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비슷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데 유대인들이 일방적으로 그들을 ‘혼혈’이라면서 차별하고 멸시하고 했던 것도 아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가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 무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눅 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이 믿는 예배의 장소인 그리심 산이 아닌 예루살렘을 향해 가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도 예사롭지는 않다.
눅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인들의 존재 이유가 지옥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인데,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무렇지 않게 사마리아인들을 불로 멸망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걸었을 때,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여기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과하게 번역된 면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종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요한의 첨언은 문자적으로는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로 번역할 수 있고, 이 맥락에서는 물을 마실 컵 혹은 그릇에 대한 말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사용한 그릇을 사용하면 의식적으로 부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릇을 함께 사용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봐도 유대인인 사람이 사마리아 지역에 와서 물을 달라고 하니 여자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서 예수님은 남자였고 자신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 여자가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유대인 남자들은 여자들과는 공적인 자리에서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의 아내와도 대화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 딸을 가르치는 것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랍비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27절을 보면 나중에 온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자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말한다. 당시 문화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 사이에는 이중으로 된 벽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결코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밤에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었지만, 설령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해도 그럴 자격이 사회적으로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니고데모와 이 여인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봐도 극과 극에 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죄악된 삶을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자는 그렇지 않다. 16-19절을 보면 이 여자에게는 과거에 남편이 5명이나 있었고, 심지어 지금은 남편이 아닌 자와 함께 살고 있다. 어떤 이유로 남편이 5명이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기는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인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지금은 남편이 아닌 자와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니 현재 간음 죄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여인은 남들은 낮잠을 자면서 쉴만한 시간인 낮 12시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을 것이다(6-7절). 당시에 물을 긷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 여자들은 주로 해가 져서 서늘해지거나 혹은 아침 일찍 물을 길으러 우물로 갔다. 우물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마을의 여자들이 우물에 모이게 되고 여러 사건과 소문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 자리에서 오고 갔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자는 그런 자리가 부담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15절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목 마르지 않은 것 뿐 아니라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을 길으러 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좋은 평판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작은 사회 안에서도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람이 이 사마리아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둘 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움직였다. 니고데모는 밤에 사마리아 여인은 한 낮에 그렇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남의 이목을 피하게 된 이유는 달랐다. 두 사람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보면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너무나 합당한 사람이었다. 반대로 사마리아 여인, 그것도 도덕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 여인은 하나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먼저 찾아왔고, 이 여인은 그렇지도 않았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원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물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물로 갔는데, 그곳에서 낯선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는) 이상한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너무나 불편했을 만남이었겠지만,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께 이 만남은 우연찮게 찾아온 만남도 아니었고 원하지 않는 만남도 아니었다.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도덕한 삶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졌을 이 여인을 예수님은 찾아 오셨다. 매우 의도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찾아 오셨다. 바로 이 여인에게 메시야이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그녀를 찾아 오셨다. 예수님은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 가셔야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1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1-4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예수님은 남쪽의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는데,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셔야만 했다는 말이다. “하셔야만 했다”는 말은 필요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하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할 때 사용하셨던 그 표현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단순히 여행이라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할 필요는 없다. 남쪽의 유대에서 북쪽의 갈릴리로 가려면 크게 3가지 길을 따를 수 있었다. 서쪽의 해변을 따라 난 길, 동쪽의 요단 강을 건너 베레아 지역을 통과하고 다시 요단 강을 건너오는 길, 그리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다. 당연히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 가장 직선에 가깝기 때문에 가깝고 빠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이 길을 많이 이용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적 관계 때문에 엄격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부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주로 베레아로 가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쨌든 단순히 여행의 편이 때문이었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만 하셨던 이유는 거기에 있지는 않다.
그 이유를 찾는데 1-2절의 상황이 힌트가 될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이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빨리 도망하셔야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남쪽의 유대를 떠나 북쪽의 갈릴리로 이동하신 이유는 될 수 있지만,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던 이유는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아직은 십자가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예루살렘 근처가 아닌 먼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셨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최대한 빠른 길로 도망하셔야 했던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7:30은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계셨고,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음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다. 그들을 두려워해서 빠르게 도망해야만 했었던 것은 아니다.
유다에서 갈릴리로 가는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만 하셨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앞서 말한 이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셔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었고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 죄인을 예수님께서 찾아 가셔야만 했던 것이다.
8절과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을 혼자 만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 전부를 보내셨을 것이다. 음식을 사는 것만 생각하면 4-5명만 가도 충분하겠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 하시려고 제자들을 모두 보내셨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이 함께 있으면 대화에 방해가 될 수도 있고, 이미 그 전에 유대인 남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여자가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집을 나서면서 제발 아무도 만나지 말고 물만 빨리 길어서 오자는 생각을 했을텐데 우연히 혹은 운 나쁘게 어떤 유대인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면서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했고, 그렇게 하셨다. 이 사람이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다. “믿는 자마다” 누구든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을 좀 달라
그렇게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온 예수님은 우물 곁에서 그녀를 기다리셨다.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5-6절)
요한은 일이 발생했던 장소와 시간을 정확히 기록하여 이 일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밖에 없지만 당시에는 누구든 알 수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이 사마리아 지역이라는 것이었고 시간이 여섯 시, 즉 낮 12시 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대에서 이곳까지의 먼 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곤해서 우물 곁에 앉으셨다. 예수님이 진짜 사람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이런 예수님의 연약함을 더욱 괴롭게 했을 것이다. 마치 뜨거운 여름날에 마실 물이 있지만 마시지 않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애초에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인간으로서의 연약함과 고통은 우리가 경험하는 그것보다 오히려 더 컸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계셨다.
“7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7-8절)
앞서 말했던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건내신 말씀을 “물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말이 아니다. 11절에서 여인이 말하는 것처럼 우물은 깊고 예수님은 딱 봐도 우물을 길으러 온 사람이 아니니 물을 길을 도구도 없었을 것이다. 긴 여행으로 지친 여행자가 우물 가에서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다.
이상한 것은 부탁한 사람이 유대인 남자였고 부탁을 받은 사람이 사마리아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반응은 이랬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
물을 주고 싶지 않다거나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일반적이지 않은 이 상황때문에 어리둥절해서 “왜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반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어리둥절해 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인 너에게 유대인 남자인 내가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니? 나는 정말 목 마른 네가 생수를 가진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죄인인 네가 너를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인 나에게 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이 여인에게는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 좋은 남편을 만나면 그 삶이 조금은 괜찮아질지 모른다. 사마리아 여자가 아니라 유대인 남자로 태어났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니고데모다. 세상의 기준에서, 사람의 기준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환경에 처한다고 해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바로 영혼의 문제다. 그것을 니고데모도 알았기에 예수님을 찾아 왔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기에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해 주셨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무엇을 더 해야했던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야 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은혜로 얻는 구원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 믿음으로 구해야 하고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예수님은 여기서는 구원을 ‘생수’로 표현하셨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다. 아무리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그곳에 물을 담아두려고 해도 결국 그 웅덩이는 말라버린다. 잠시 괜찮아 보일 수 있지만 결국 물은 사라지고 우리는 다른 웅덩이를 파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삶과 같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기에 하나님 안에만 참된 삶이 있다. 하나님을 떠나면 참된 삶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구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영생을 선물로 받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구약의 맥락에서 말씀하셨지만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11-12절과 같이 반문한다.
“11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1-12절)
여자는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이신 것은 알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몰랐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도 그저 우물에서 나오는 생수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물은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야곱보다 크시다. 하지만 지금은 “생수”가 무엇인지부터 말씀해 주셔야 했다.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예수님은 지금 우물에서 나는 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갈증을 채우는 물은 아무리 마셔도 다시 마셔야 한다. 지금 예수님이 그런 상태였기에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물을 얘기하고 계시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계속해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바로 영생에 이르는 구원, 하나님께서 값 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
어투를 알 수 없기에 여자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물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달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약간은 빈정되는 말투로 “어디 그런게 있으면 좀 줘봐라”는 식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아직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이제 예수님은 그녀를 돕기 위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더 드러내신다. 16절부터의 말씀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
교훈
먼저, 아직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구하라”. 물을 얻을 방법이 없는 사람이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구하는 것 뿐이다. 예수님이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영원한 생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구하는 것 뿐이다. 니고데모에게도 예수님은 ‘거듭남’이라는 주제로 같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구하지 않아서 멸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해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너무나 우연 같이 벌어진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서 이루어진 필연이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마찬가지로 니고데모도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였다. 두 사람이 다른 과정을 통해 구원에 이르렀을 뿐이다. 출신, 성별, 성경에 대한 지식 등이 구원에 있어 결정적이지 않다. 심지어 원하고 원하지 않고도 결정적이지 않다. 니고데모는 영생에 이르기를 원했고,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 관심이 없는 상태였지만, 결국 두 사람이 다 영생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
그러니 아직 구원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구하기를 망설이지 말라. 나의 어떠함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구하지 않는 불신앙만이 문제가 된다.
이미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구원하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라. 내가 니고데모 같은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든, 사마리아 여인 같은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든, 하나님께서 나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나를 찾아 오셨고 나를 만나주셨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만 했던 예수님께서 내 삶에도 찾아 오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더 나은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니고데모에게는 터진 웅덩이가 많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적었다. 니고데모에게는 혈통, 학식, 종교, 도덕, 재물 등의 크고 작은 웅덩이가 많았던 반면 여인에게는 어쩌면 남편이라는 웅덩이 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웅덩이든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것은 터진 웅덩이여서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갈증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웅덩이가 정말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웅덩이가 터져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웅덩이가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 모든 것을 시험해 봤던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다”라고 고백했고, 그 고백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모두 목마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목마름이다. 우리에게 더 나은 이 땅이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교훈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 나에게 더 필요한 것처럼 살지 말라. 구원 받은 자라면 더욱이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