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든 일을 이루시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이사야 45~46장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창조와 주권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에 대해 물으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분으로서 주인된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다른 문제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오해한다. 이는 단지 잘못된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오해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오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삶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우리의 유한함에 기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하다보니 생기는 오해가 많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다룬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대표적일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하니, 하나님의 사랑을 율법적으로도 보고 반율법적으로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드러내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깊은 사랑에 감동하고 두려움 없이 현실의 고난을 이기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말할 때도 우리는 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해주실 수 있는 것만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은 가장 많이 오해되는 말씀이 되었다. 하나님은 전능하심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비천에 처하고 배고픔에 처하고 궁핍에 처하면,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온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 맞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사실 빌립보서 4:13 바로 위의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나님은 나를 비천에 처하게도 하시고 풍부에 처하게도 하신다. 내가 비천에 처한 것이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란 의미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 이 비천/배고픔/궁핍 혹은 어떤 고난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상황이고, 사랑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 상황에서 만족하겠다. 이것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삶이다.
오늘은 “모든 일을 이루시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제목으로 이사야 45-46장의 말씀을 살펴 볼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를 우리가 배우기 원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의미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이스라엘이 대상이다. 아직은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신 후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들이 다시 성벽을 짓고 성전을 짓게 될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라고 자신을 표현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빛과 어둠, 그리고 평안과 환난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짓다”와 “창조하다”는 다른 의미가 아닌 공통적인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행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고 말할 때, 그 ‘모든 일’에는 우리가 보이기 좋은 일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일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된 표현들(빛, 어둠, 창조) 때문에 창세기 1장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그런 창조의 능력을 강조하시기 보다 그 모든 것 원인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신다고 볼 수 있다. 빛과 어둠, 평안과 환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시기도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에 반하는 말이다. 지금 사람들도 비슷한데, 다신론이 기본이었던 이사야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에 선을 창조한 신과 악을 창조한 신은 같은 신이 아니어야 했다. 평안과 환난도 마찬가지다. 천사와 악마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이미지처럼 좋은 신이 있으면 나쁜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성경의 선과 악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선의 편, 사탄이 악의 편에 서서 싸움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이기시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사탄이 이기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어둠이나 환난이 하나님께로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마치 그런 일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나에게 일어난 것처럼 받아들인다. 아마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지키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가질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나쁜 일’을 하신다고 생각할 수 없으니, 어쨌든 그런 일을 하나님과 연관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어둠과 싸우시고 원하지 않는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나님도 어떤 환난이 우리에게 일어날 줄은 모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도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를 그런 환난에서 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신다고 말한다.
이런 하나님은 이해하기에 좋을 수 있다. 굳이 하나님을 어떤 나쁜 일과 연관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듣기도 좋다. 하나님이 훨씬 더 나와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도는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빛이든 어둠이든, 평안이든 환난이든, 모든 것을 행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런 식으로 우리 기준에서 우리가 지켜드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요셉에게 환난을 행하신 하나님은 선하심에 흠집이 났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다. 그런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요셉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계속해서 복을 주셨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마침내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될 때도 바로는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창 41:38–39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요셉의 삶에 하나님께서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셨던 것이다.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쩌다 일어난 나쁜 일을 어떻게든 좋은 일로 바꾸려고 노력하신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나쁜 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허락된 일이다. 어쩌다보니 요셉이 잘해서 애굽의 총리까지 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애초에 그런 ‘나쁜 일’이 있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 그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일들은 ‘나쁜 일’들이 아니었다.
이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예수님께 물었다(요 9:3). 제자들이 봤을 때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 나쁜 일이었고, 그것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죄 때문에 그를 심판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죄 때문에 그렇게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은 맹인이었기에 그의 눈을 뜨게하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평안과 환난을 맹인의 삶에서 행하셨고,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셨다. 우리가 볼 때는 나쁜 일이 그에게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빛인가 어둠인가? 평안인가 환난인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십자가의 의미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신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신 일,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일은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고 할 때, ‘이루신다’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 46:10–11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단순히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냥 이 일 저 일을 하기만 한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일도 했다가 지루하면 나쁜 일도 하고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지켜보고 계신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세운 계획들을 하나님이 대신 이루어 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시는데, 계획에 따라서 하신다.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그 뜻을 이루신다.
이 말은 두 가지 사실을 내포한다.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관련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A. W. 토저, <하나님>, 415. “하나님은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으신다.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행동하지 않으신다. 어떤 한 가지 생각에서 힌트를 얻어 다른 생각을 해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거닐기 전에, 해와 달과 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것에 따라서 일하신다. 우리의 미래를 이미 다 살아보신 하나님, 시간을 자신의 품에 안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계획을 이루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단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을 ‘이루신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의 의미는 어쨌든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목적은 이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이미 다 계획하셨고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극복해야할 장애물 같은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 그런 것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관계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도 없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고 계시는 일 같은 것도 없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수습하고 계시는 일도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권세가 있으시다. 의지가 있으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말의 의미다.
좋은 얘기다. 어쨌든 하나님을 믿는 입장에서는 좋은 얘기다. 그런데 어떻게 정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사야 45-46장의 말씀을 읽을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모든 능력과 권세와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룬다고 말씀하시는건데, 어떻게 이 말씀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의 어둠과 환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방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패배해서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나빠 보이는 이 상황에서 여전히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하고 계시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한 확신이 필요한 상황 중에 있을 수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멀게만 느껴지고 지금의 현실은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 모든 일을 이루고 계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말은 그저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의미 없는 위로일 뿐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ㅎ은 사실인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해 보면 지금 약속의 말씀들도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정말 자주 주어진 명령이 “기억하라”였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하셨는지 기억하라는 말씀이 정말로 많다.
그런데 이사야 45장에서 하나님은 훨씬 더 강력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통해서 확신을 주시는 것이다.
사 45:20–21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다. 지금 보고 있는 일을 예전부터 알게 한 자가 누구인지 알면, 그 일을 행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서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거짓 신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 벌어진 일을 가지고 “내가 뭐랬어. 이렇게 될거라고 했잖아”라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거는 다 그것 때문이야”, “내가 전에 그렇게 했던 것은 이렇게 하려고 했던거야”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벌어진 일을 가지고는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말씀하시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과 그의 성취를 통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그 예언은 ‘고레스’에 대한 예언이다.
증명
사 45:1–3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2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성경의 많은 예언 중에서도 이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은 매우 특별하다. 이 예언의 말씀은 페르시아(바사) 왕인 고레스가 세상에 태어나 왕이 되기 200년 전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마치 지금 살아있는 왕인 것처럼 그의 이름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지금 상황을 생각해 보라. 지금은 아직 남유다가 바벨론에게도 멸망하지 않은 때다. 여전히 바벨론보다는 앗수르가 더 강력했던 때다. 그런데 성경은 앗수르가 아닌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할 뿐 아니라, 그 후에 바사 왕인 고레스가 그 바벨론을 점령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을 다시 돌려 보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언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이 나중에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고레스가 태어난 이후든지, 아니면 아예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기록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확신을 주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 그래서 다른 예언의 말씀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예언이 구체적일수록 그 성취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절에서 고레스는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앞 장의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내 목자”라고 표현하셨다. 메시야에게 사용될 표현이 고레스에게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이 이방왕을 따로 세우셨던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사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고레스는 이방인이었고 특별히 하나님을 찾았거나 했던 사람도 아니었다.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사 45:4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고레스를 선택하여 사용하신 것 뿐이다. 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단지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회복하게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가 여러 열국을 정복할 수 있게 힘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2절을 보면 그의 정복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데, 특히 바벨론 정복이 그러했다. 이 부분은 다니엘 5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유명한 ‘메네 메네 데겔 우르바신’이란 글자가 벽에 새겨졌던 날에 있었던 사건이다. 그 글자의 의미를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렇게 드러내셨었다.
단 5:26–28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이 일이 이루어지는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그 밤에 바벨론 왕인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고레스와 동일인물이거나 외삼촌으로 고레스가 상징적인 왕으로 세워둔 사람)가 나라를 얻었다고 성경은 기록했다.
이 장면은 마치 내부에서 반역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전투에 대한 기록도 없이 벨사살의 죽음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했다.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날 밤에 바벨론의 수백개의 청동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고레스는 그렇게 바벨론에 거의 무혈입성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 고레스보다 먼저 가셔서 모든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이 내용은 고레스 실린더(원통)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고레스가 그 모든 공을 마르둑이라는 신에게 돌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둑은 고레스의 미덕과 통솔력과 힘으로 인해 그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레스가 결국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영접했느냐를 논쟁이 있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또 다른 신 중 하나였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여 사용하셨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자기 나라로 돌려 보냈다. 그것이 고레스의 정복지에 대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 역시 고레스 원통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고레스 원통은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 기록되었지만, 성경은 이미 그 일이 있기 200년 전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성취도 이렇게 기록했다.
스 1:1–4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실제로 고레스는 이런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을 자기 땅으로 돌려 보내 성전을 건축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고레스에 대해서 예언한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고레스가 이사야에 기록된 자신의 예언에 대한 말씀을 읽었다고 한다. 실제라면 아마 다니엘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고레스가 정말로 정직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신을 섬겼지만 그 어떤 신도 이런 예언의 말씀을 할 수는 없었다. 애매한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이 예언,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포함된 이 예언의 말씀이 200년 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사 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고레스 자신도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던 이런 일이 이미 성경의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참된 신이고 다른 이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고레스에게만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모두에게 같은 사실을 증명했다.
사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곳에 있는 누구든 하나님 외에는 다른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 평안과 환난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통해 올 수 없다는 의미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이 모든 일들이 정확히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고레스는 어둠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레스를 통해서 이 놀라운 역사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증명한다.
적용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 정말로 ‘모든’ 일을 이루신다. 단순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신다. 거기에는 빛과 어둠이 포함되어 있다. 평안과 환난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하다.
사 45:5–6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6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14 …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사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만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른 결론은 없다. 그러니, 아직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바란다.
사 45: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오히려 구원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구원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을 어려운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저 우리에게 ‘내게로 돌이키라’고 말씀하신다. “땅의 모든 끝”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누구든 하나님을 등지고 살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전에 돌이킨 자만이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 어리석음에서 돌이키라.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실 것이다.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다.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받았다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치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신 것처럼 내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찬가지다. 정말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고 내 삶 가운데서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사 46 … 3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7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8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9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12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우리는 주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사실 그것도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과정에서는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오늘 고레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정말로 오래 전에 주어졌다. 이 예언의 성취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과거를 보며 큰 확신을 주는 말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레스 이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예언의 말씀조차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수 있다. 그들의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 예언 이전에도 하나님 만이 유일한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수없이 증명하셨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고 계시지 않으신 것처럼, 그렇게 당황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고레스의 예언 뿐 아니라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자신있게 말했던 것이다.
롬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이루고 계신다. 정말 세상이 무너져도 평안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인 뿐이다. 그들만이 유일하신 하나님,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모든 일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맹인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정말로 이해되지 않고 이 나쁜 일이 어떻게 좋은 일이 될 수 있냐고 따지고 싶을 때,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