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든 의를 이루는 예수님의 세례

본문: 마태복음 3장 13-17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명령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신자가 된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다(마 28:19). 사도들은 이 명령에 따라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행 2:38),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절대로 세례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눅 23:43). 그렇다고 세례를 단순히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에 치르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보면 안 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으로 신자에게 일어난 실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교회의 공적인 예식이다. 마치 결혼과 같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으로 연합하는 것이 결혼의 실재라면, 결혼식은 그 실재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예식이다. 결혼 자체가 본질이지만, 우리는 결혼식 또한 본질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다(그래서 세례도 고귀하다). 

시대와 장소와 형식을 불문하고 신자가 받는 세례는 하나다(엡 4:5). 신자는 한 성령으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한 세례를 받는다(고전 12:13; 갈 3:27).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신자는 죄 사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묻히심으로 옛 사람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새 사람에게 걸맞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혔고, 부활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침례는 성경이 묘사하는 세례의 가장 합당한 방식이다(골 2:12; 마 3:16). 

본문은 (신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을 다룬다(막 1:9-11; 눅 3:21-22). 공관복음 가운데 오직 마태복음만 요한이 예수님께 던진 이 질문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4절). 앞서 신자가 왜 세례를 받는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연합의 실재를 나타내는지 살펴봤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단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황송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막아선 것이다. 

요한이 요단 강에서 어떤 세례를 주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신 것이 얼마나 합당하지 않은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유대 광야에서 요한이 외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마 3:1-2). 그리고 그가 베푼 세례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결단한 자들이 받는 세례였다(마 3:6). 그래서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라고 말했다(마 3:11).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책망하며 세례를 주지 않았다(마 3:7-11). 요한의 세례는 회개가 필요한 자들을 위한 세례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 것이다. 회개가 필요 없는 의인이지 않는가?

예수님은 일부러 갈릴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다(13절, 120km).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다는 말이다. 세례 받으려 하시는 것을 요한이 막아서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라고 요청하셨다(15절). 우리말 성경에서는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라고 번역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한 번쯤 체험해 보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 꼭 받으려고 하셨다. 그렇게 해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셨다. 그 이유에 관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먼저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금 세례를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확신하셨다. 회개가 필요 없는 의인인 예수님이 왜 회개가 필요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 그것이 어떻게 의를 이루는 일인가? 또한 그것이 왜 합당한 것일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구약 성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태는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께서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사건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통하여 참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먼저 이사야 5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의로운 종”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곧 회개가 필요한 자들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많은 사람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기로 결단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의로운 종,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이사야 42장 1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본문 16절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으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자기 영(성령)을 예수님께 주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이심을 확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는가? 정리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회개가 필요한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 그들처럼 되신 것이다. 이것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의를(복음에 나타난)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예수님은 이후에 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말씀으로 승리하셨고, 공생애를 통하여 많은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의의 길을 가르치셨다. 마침내 죄 없는 희생 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믿는 자를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 그들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시고(다 이루었다!), 부활하셔서 자기를 믿는 자로 하여금 영생의 삶을 은혜로 풍성히 누리게 하셨다. 

주님이 세례에 순종하지 않으셨다면, 신자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른 죄인이 물에 들어가 젖은 죄인으로 나오는 것뿐이다. 주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세례에 순종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구원을 이루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절대로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이 세례에 순종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께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녀라’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신자의 세례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결혼의 실재를 보여주는 결혼식이라면,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 사랑의 관계를 먼저 시작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러포즈와 같다.

프러포즈는 신랑신부의 로망이다. 요즘 말로 썸이나 그보다 더 진지하게 사귀는 단계를 훨씬 뛰어넘는 신성한 연합의 관계를 제안하는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다: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지금 당신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알고 있지만, 지금 당신의 모습 그대로를 영원히 사랑하기 원합니다. 쉽게 내린 결단이 아닙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의 겉모습이 변하고 티나 허물이나 주름 잡힌 것들이 보인다고 해도, 건강을 잃거나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변함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사랑할 것입니다. 이제 나의 것은 모두 당신의 것이고, 내가 이룬 것은 모두 당신이 이룬 것이며, 나의 미래는 항상 당신과 함께일 것입니다. 당신의 허물은 나의 허물이고, 당신의 실수는 나의 실수이고, 당신의 무거운 짐은 내가 함께 짊어질 짐이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 안에, 당신은 내 안에, 우리는 언제나 한 몸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혼/미혼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온 우주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프러포즈를 받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았던 그때, 아들은 우리 처지와 상황을 다 아시면서도 그 자리를 대신하시기로 결단하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의 짐을 대신 지셨다. 성부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뜻하신 바라고 말씀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그 일을 마칠 때까지 모든 지혜와 능력을 더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우리가 이룬 것으로 보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한 미래에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언제나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자는 이 놀라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러포즈에 ‘예’라고 기쁨으로 화답한 자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세례에 순종한다.

그런데 세례받기를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 구원받지 않은 것 같아서 고민되는 게 아니다. ‘모든 성도 앞에서 공적으로 세례를 받고 나면 정말 제대로 살아야 할 것 같아서’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신랑이나 신부가 입장하기를 주저하면서, ‘많은 하객 앞에서 결혼식까지 하고 나면 배우자를 진짜 제대로 사랑해야 하잖아요’라고 이유를 대는 셈이다. 당신은 뭐라고 그 신랑/신부에게 조언할 것인가? ‘그래 맞아. 이 길에 들어서면 더 많이 수고하고 인내하고 양보해야 해. 그러니 각오하라고!’ 아니다! ‘이 길에 들어서면 더 깊고 친밀하고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게 될 거야 그러니 기대하라고!’라고 조언해 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티나 허물이나 죄 많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게 될 결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은혜와 긍휼이 무궁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변함없는 사랑으로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연합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을 위한 희생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 앞에 있는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옛사람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부모와 자녀, 배우자와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 사실 우리가 침례탕에 들어갈 때, 그렇게 하겠다고 모두 다짐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게 참 쉽지 않다. 옛사람은 죽은 것 같다가도 계속 살아나서 원치 않는 죄를 낳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과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라이벌이 되어 그분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만일 당신이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신랑을 생각하라.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전능하신 그분이 무력한 아기가 되셨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그분이 시간과 장소에 매여 사셨다. 갓난아기 때부터 삼십 세정도 되는 청년의 나이까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죄 없이 사셨다. 우리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이 되시려고.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우리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대로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 나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어떤 마음을 품으셨을까?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싶은 열정과 우리 신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의 쓴잔을 마셨다.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뭐든지 기꺼이 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모든 의를 이루셨다. 세례에 순종하여 값없이 하나님의 모든 의를 선물로 받은 신자들이여, 이제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자.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 내 기뻐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자답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