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땅이여 주 앞에서 떨지어다
본문: 시편 114편
설교자: 최종혁
유월절에 불려졌던 애굽 할렐의 두번째 시편인 114편은 출애굽 사건의 의미를 짧은 언어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전달한다.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출애굽을 다룬 다른 시편도 있는데(78, 105, 106편), 그 시편들은 시라기 보다는 마치 역사를 읽는 느낌을 준다면 시편 114편은 확실히 시로서 읽히고 메시지도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질문을 주고 받는 방식을 사용해왔다(하브루타). 유월절에도 이들은 출애굽 사건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식사 전에 가족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아이가 정해진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해 아버지가 답을 해주는 방식인데, 그 질문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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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 밤에 우리는 무교병(마짜)을 먹습니까?
-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
-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두 번 소금물에 찍어 먹습니까?
- 왜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비스듬히 기대어 먹습니까?
무교병을 먹는 이유는 애굽을 급하게 떠나야했기 때문이고, 쓴 나물은 노예 생활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나물을 찍어 먹는 소금물은 그 고통의 눈물을 상징하고,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하는 것은 이제는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음을 표현한다. 이런 답을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출애굽 사건을 다시 회상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이 불렀던 찬양이 시편 113편과 114편이다.
시편 113편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누구도 없다’였다. 하나님처럼 높으신 분이 없으시고 하나님처럼 스스로 낮추신 분이 없으시다. 하나님처럼 위대하신 분이 없으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초점은 높으신 하나님의 낮추심에 있다.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신다.
시편 114편은 바로 그 구원의 일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셨음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을 일부러 시의 마지막(7절)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은 2절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원문에는 단순히 “그”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그”가 나오면 “그”가 지칭하는 대상이 앞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 대상이 없다. 그래서 개역 개정을 포함한 많은 번역에서 “여호와”나 “하나님”으로 “그”를 번역한 것인데, 좀 아쉬운 부분이다. 이는 마치 영화의 결론을 미리 말해버리는 스포일러와 같기 때문이다.
시편 114편의 저자는 마치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누가 했을까?”라고 묻고 마지막에 답을 말해주는 형식으로 시편 114편을 기록했다. 물론 사람들이 정말 이 답을 모를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출애굽 사건이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처음 듣는 얘기일 수 있지만, 그런 상황을 전제로 두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시편 114편은 훨씬 더 긴 시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특히 3-4절은 이미 기록된 출애굽 사건을 알지 못한다면 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즉 시편 114편을 기록한 사람은 이미 출애굽 사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 사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히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이 시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구원 받은 우리가 아니라 구원한 하나님이시고, 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출애굽 사건의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유대인들의 교육 방식에 따라 3개의 잠재적인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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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1-2절)
- 그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3-6절)
- 그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7-8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1-2절)
먼저 1절은 가장 기본적으로 유월절이 기념하는 출애굽 사건을 언급한다.
시 114: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시편 114편은 내용으로 볼 때 찬양시라고 볼 수 있는데, 형식적인 면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바로 앞 시편인 113편이 형식적인 면에서 일반적인 찬양시다. 처음에 찬양으로의 초대가 나오고 뒤에 그 이유가 나온 후에 마지막에 다시 찬양으로의 초대가 나온다. 하지만 114편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113편 끝의 “할렐루야”가 114편의 시작에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기에는 저자의 의도가 있다고 봐야한다. 저자는 일부러 중요한 내용을 뒤에 배치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했다.
1절의 표현 자체도 일반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출애굽을 언급할 때는 대부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첫 유월절에 대해서도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라고 말한다(출 12:51). 모세도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가르치면서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고 말했다(출 13:3). 십계명을 주시면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이스라엘이 스스로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다. 3-4절도 같은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다고 보고 도망하고 요단이 물러갔다고 말한다. 산들이 뛰놀고 작은 산들이 뛰었다고 말한다. 마치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출애굽 사건을 묘사한 의도는 5-6절에 가서 나온다. 이 부분은 잠시 뒤에 살펴보자.
여튼 지금 시편 기자는 이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근본적인 이유인 출애굽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미 질문과 답을 통해 출애굽과 관련된 사실들을 유대인 가족은 기억하고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찬양을 통해 그 의미를 상기하고 있다.
1절의 하반절은 상반절을 다른 표현으로 재진술한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집안”이 되었고 애굽은 “언어가 다른 민족”이 되었다. 처음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은 실제로 야곱의 집안(가족)이었다. 그들이 애굽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야곱의 집안이 이스라엘 민족이 될 때까지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을 지냈지만 애굽과 섞이지는 않았다. 물론 출애굽 이후 그들이 보였던 모습에서 애굽의 삶, 특히 우상 숭배가 그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계속 지켰다. 그래서 그들에게 애굽 사람들은 “언어가 다른 민족”,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언어는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관계에 있어 매우 큰 장애가 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애굽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 남의 땅에 이방인으로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인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애굽은 점점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두지 않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 강제로 건축 등의 노역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 야곱의 가족으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가족은 고통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 그 상황을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묘사했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이렇게 출애굽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단지 이주를 했던 것이 아니라 탈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그저 하나의 민족이었다면 그들을 종으로 삼은 애굽은 당대의 강력한 제국이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고, 혹 벗어난다고 해도 그들이 다른 땅에 가서 정착하여 살 수 있는 힘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 애굽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 애굽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야곱의 가족일 뿐이었지만,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의 성소”가 되었고 “그의 영토”가 되었다.
시 114: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여호와”는 번역자들이 추가한 것이다. 저자는 아직 “그”를 특정하여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들을 다스리시며 그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출애굽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잘 살아봐라라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서 그들에게 복주시고 또한 그들을 통해 세상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19:4–6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기 본문 2절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여기서 남왕국과 북왕국을 구분하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즉,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인데 영토는 아니며,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인데 성소는 아니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분열왕국 전에도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었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두시고 나타내시는 성소가 되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영토(왕국)가 되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신 7:6–8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것이 유월절 식사를 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와 상관없이 민족으로서 이 모든 사실이 이스라엘 사람들 각자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을 통해서 이 사실을 기억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성소로 삼으셨다.
그런데 이 사실을 시편 114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주어로 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주어로 두고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그의 성소가 되고 그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들이 한 일을 묘사하듯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편하게 느낄만한 묘사다. 저자는 일부러 이 불편함을 의도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3-6절)
어떻게 애굽으로 내려갔던 한 가족이 하나의 민족이 되어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영토가 되었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셨다고 답할만한 질문인데, 여기에 대해서도 시편 기자는 의외라고 느낄만한 표현을 사용한다.
시 114:3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출애굽을 배경으로 두면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표현들이다. 바다가 보고 도망한 것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의미한다.
출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여호와께서 동풍을 불게 하셔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물은 좌우에 벽이 되었고,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어지럽게 하셔서 추격을 막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건넌 후에는 다시 바다가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어 애굽의 군대는 그곳에서 모두 죽게 되었다. 이것에 출애굽이 기록한 역사다. 그리고 이 역사를 여기 시편기자는 “바다가 보고 도망했다”고 시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마치 바다가 사람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요단은 물러갔다는 표현도 그렇다. 이 사건은 두번째 홍해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단강 도하 사건을 말한다. 여호수아의 기록은 이렇다.
수 3:15–17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꼭 요단강을 이런 식으로 건너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시기와 장소만 맞으면 요단강은 개울을 건너듯이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곡식 거두는 시기”, 즉 요단에 물이 넘치는 때를 택하셨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홍해의 기적을 이스라엘이 경험하게 하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믿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도 시편 기자는 “요단은 물러갔으니”라고 표현했다. 마치 요단이 사람인 것처럼 알아서 피해준 듯 묘사한 것이다.
야곱의 집안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 과정에 있던 장애물이 제거됐기 때문인데, ‘바다는 보고 도망했고 요단은 물러갔다’는 것이다. 마치 장애물들이 스스로 자리를 피해준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다.
4절은 보다 본질에 더 직접적으로 가까운 사건을 언급한다.
시 114:4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3절에 비해서 이 말씀은 어떤 사건을 지칭하는지 바로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뛰놀다”는 기쁨에 겨워 깡총깡총 뛴다는 의미보다는 놀아움에 펄쩍 뛴다는 의미다. 사슴이 풀을 먹고 있다가 포식자가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여 놀라서 펄쩍 뛰어 달아나는 이미지인 것이다. 출애굽과 관련하여 산들이 그렇게 반응했던 적이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 임재를 나타내실 때였다.
출 19:18–19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시편 68편도 이렇게 말한다.
시 68:7–8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8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삿 5:4–5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유다가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가 된 것이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문제가 되진 않았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편 기자는 그동안 쌓아온 불편함을 질문을 통해 단번에 해소한다.
시 114:5–6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이 질문은 마치 바다와 강, 산들을 놀리는 것 같다. 이미 이유를 다 알고 있으면서 “너희를 왜 그랬어? 왜 그랬던거야?”라고 묻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것들에게 인격이 있지 않지만, 인격이 있는 것처럼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마치 역사의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런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했는지 묻는 것이다. 바다는 자기가 좋아서 도망한 것이 아니다. 요단 강도 자기가 좋아서 물러갔던 것이 아니다. 시내산도 자기가 원해서 진동했던 것이 아니다.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 때문이다.
바다는 애굽을 탈출해서 나오던 이스라엘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대로라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군대에게 사로잡혀서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아마 이전보다 더 혹독한 노예 생활을 해야했을 것이다. 바다가 이스라엘의 구원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셨다. 요단 강이 물러간 것도 마찬가지다. 요단 강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단 강을 물러가게 하셨다.
산들이 뛰놀던 것은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를 드러내실 때, 산은 떨 수 밖에 없었다. 산이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것이 아니라 산이 두려워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 독특한 질문을 통해 읽는 자들이 스스로 답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이루어낸 업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업적이고 그들은 은혜를 받았을 뿐이다. 모세의 말처럼 그들의 어떠함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그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은 지금 이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시편 기자는 마지막 질문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과거 우리 조상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7-8절)
시 114:7–8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백성들아,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찬송할지로다’와 같은 적용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찬송시에서는 자연스럽다. 사실 이어지는 115편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시편이 이런 순서로 배치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14편의 마무리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시편 114편의 저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출애굽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기억했고, 마찬가지로 의외의 방식으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7절은 시편 114편에 나오는 유일한 명령인데, 그 대상이 “땅”이다. 땅에게 “떨지어다”라고 명령한다. 여기 땅은 앞에서 언급했던 피조물들, 즉 바다, 요단, 산들을 모두 포함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의 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망하게 하시면 도망해야 했고 물러가게 하시면 물러나야 했다.반석이라도 하나님께서 연못이 되게 하시면 연못이 되어야 했고 차돌(바위)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샘물이 되라고 하시면 그렇게 되어야 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이 증명한 사실이다.
정리하면,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을 증명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증명했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 어떤 것도 막아설 수 없음을 증명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갈라서라도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흐르는 강을 멈춰서라도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바위를 연못으로 혹은 샘물로 바꿔서라도 백성의 갈증을 채우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이 유월절에 출애굽을 묵상하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여전히 이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계속해서 믿고 신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하나님을 이렇게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하나님 앞에 나도 두려워 떨며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도전
그럼 이 시편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출애굽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기에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 떨며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더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유월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마지막 유월절 식사였다. 이제는 더 이상 유월절을 기념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월절이 그림자로서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실체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날 것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유월절의 끝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기념할 다른 의식을 가르치셨다. 바로 주의 만찬이다.
고전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우리도 이 주의 만찬을 대하면서 시편 114편의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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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 그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 그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게 되었다. 흑암의 권세에 있던 우리가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거룩한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다 나열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그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문제는 죄의 문제였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래서 이 모든 일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능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 오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죄인의 몸을 입으셔서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의로운 삶을 사셔서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바다를 가르고 강물을 멈추는 것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반석을 못물이 되게 하고 차돌이 샘물이 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처럼 사는 것도 그렇다. 사람처럼 살면서 모든 죄의 유혹과 싸워 죄를 범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 사람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도 그렇다. 죄를 알지도 못한 존재로서 온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께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실행하시고, 성령님께서 나로 믿게 하셨을 때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내가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을 증명했다.
그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의 시편 114편의 결론이다.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선포할 뿐 아니라 같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 앞의 장애물을 무엇이든 제거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 더욱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떨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