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동감, 나도 그러합니다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설교자 : 이병권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랑 친분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때도 있고 내가 아는 누군가를 통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TV나 인터넷,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흥미진진합니다.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이야기인데도 재미있습니다. 또 내가 고민하는 문제나 나랑 비슷한 상황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마음이 가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저런 적이 있었는데, 나도 저런 고민을 했었는데, 나도 비슷한 문제로 힘들었을 때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나눌 때 우리의 이야기에는 주님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자로서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자가 경험한 주님을 통해 서로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일한 주님을 섬기고 있고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함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간증을 들으며 ‘아멘’ 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동감, 나도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앞에서 디모데에게 맡겨진 사명을 일깨우며 권면했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디모데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디모데에게 자신의 간증을 나누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울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에 대해서 동감, 나도 그러합니다. 고백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도 동감하고 나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울의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나”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를”, “내가”, “내게” 이런 말을 반복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이야기에서 어떤 부분을 동감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동감할 수 있는 것은 12절 끝에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는 봉사나 사역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주님께서 디모데를 부르셨고 직분을 주셨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다른 교훈을 바로 잡고 교회를 돌아봐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
바울은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충성되었기 때문에 직분을 맡기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충성되게 여기셨습니다. 충성된 자로 생각하시고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동안 해온 것을 보니 성실하고 능력이 우수하고 일을 잘하는구나!’ 그래서 주님께서 일을 맡겨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셔서 은혜로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직분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은 동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바울이나 디모데하고 나는 다르다고 직분을 받은 적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부르심은 각 사람마다 다 다르고 맡겨주시는 직분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직분이 다르다는 말이지 직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바울과 같은 직분을 맡은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디모데처럼 교회를 돌보는 일을 맡은 자입니다. 각자의 할 수 있는 분량과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는 다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분이 나에게 주님의 일을 맡겨주셨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실 때 세트로 주십니다. 구원은 ‘구원 플러스 직분’, 이렇게 함께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선물로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직분도, 주님의 일도 함께 받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감사함으로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만 받고 직분은 안 받을래!’ 이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쓸모없는 자를 구원하셔서 주님의 일에 쓸모 있는 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주님의 일을 맡겨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직분을 감당하면서 이 점을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맡겨진 일을 감당하기에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잘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움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12)
주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셔서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주님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주님은 일만 맡기고 끝나는, 다른 것들은 모른 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기다리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필요한 자원과 능력을 함께 공급하셔서 그 일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동감할 수 있는 것은 15절 끝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입니다.
괴수라고 하니까 영화에 나오는 괴물이나 거대한 짐승을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 괴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죄인들의 우두머리, 죄인들 중에 자신이 가장 큰 죄인이고 가장 악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이 고백에 대해서 동감하기가 어렵습니다. 13절에 나오는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한 세 가지 표현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는 이해가 됩니다. 실제로 바울은 비방자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욕했던 자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박해자였습니다. 교회를 심히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못살게 굴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결국 예수님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폭행자였습니다. 우리 성경에 폭행자로 되어 있어 박해자랑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좀 구분을 하면 오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로마서에는 능욕자로 번역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창피 주는 일을 하면서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 세 가지를 보면 죄를 표현할 수 있는 세 영역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에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범죄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죄인 중에 최고로 나쁜 죄인일까요? 당시 종교지도자들 보다 예수님을 판 유다보다 더 큰 죄인일까요? 바울보다 훨씬 악한 죄인들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고백은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처럼 이전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다’가 아닙니다. ‘내가 왕년에 주님 모를 때 죄인 중에서는 나를 따라 올 자가 없었지! 내가 최악이었어.‘ 옛날 일을 추억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전히 자신이 죄인 중에 가장 으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고백에 동감이 되십니까? 동감하는 것을 떠나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바울이 당시 사람들의 죄들을 다 분석하고 나서 ‘나보다 더 악한 죄인은 없네! 내가 이번에도 최고야!’ 이랬을까요?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알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단순히 과장해서 표현하는 걸까요? 실제로는 아닌데 겸손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걸까요?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로 죄를 깨달을 때 나는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죄를 깨닫고 그 죄의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연스러운 반응은 다른 사람의 죄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범한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잘못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순간 나의 죄가 너무도 크고 무겁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인보다 내가 더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에 대해서 처절하게 인정하게 되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가 나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되면 나는 세상의 어떤 죄인보다 악한, 가장 악한 죄인이 됩니다. ‘주님, 저는 정말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그토록 악한 자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바리새인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하지만 우리가 나의 죄를 깨닫게 되면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죄를 깨달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동감이 되십니까? 여러분도 ‘나도 그러합니다’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주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더러운지, 주님이 다 아십니다.‘성령님이 내 죄를 깨닫게 해주실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할 때 이 고백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15절 말씀이 죄인 중에 괴수로 끝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16절에 “그러나”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
죄인 중에 내가 괴수지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었습니다(16).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었습니다(13) 죄인이었던 내가 도리어, 죄인 중에 최고였던 내가 그러나 주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주님이 그런 나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셋째로 동감할 수 있는 것은 14절 끝에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입니다.
14절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에게는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적대심으로 가득했고 교회에 큰 해를 끼쳤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향한 주님의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하였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최근에 태풍 때문에 뉴스에서 그런 장면들을 보기도 했습니다. 물이 넘치면 강이 범람하고 모든 것이 물에 잠깁니다. 물이 넘치면 그 모든 것을 쓸어버립니다. 은혜도 그러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물이 넘치면 큰 재앙이 되지만 은혜가 넘치면 큰 축복이 됩니다.
은혜라는 강물이 넘치면 모든 죄와 모든 악한 것과 모든 거짓된 것을 쓸어버립니다. 넘치는 은혜가 모든 것을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믿음과 사랑이 피어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넘치는 은혜는 불신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믿음을 채워 주고 넘치는 은혜는 미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사랑을 채워 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인 나에게 죄인 중에 괴수인 나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가득 부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미치지 못할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 동감하십니까?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주님이 얼마나 자비하신지, 주님이 얼마나 긍휼이 많으신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나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내가 증인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나를 보면 주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셔서 주님의 일을 맡기신 것을 보면 그 은혜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은혜는 이렇게 증거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15)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은 성경에 다섯 번이 나오는데 다섯 번 모두 목회서신에서 나옵니다. 디모데전서에 3번, 디모데후서에 1번, 디도서에 1번 나옵니다. 그리고 관련된 문장은 간결한 격언에 가까운 말입니다. 초대교회에 찬송이나 믿음의 고백처럼 사용했던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이 말이 나오는데 복음을 요약하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죄인처럼 되셨고 죄인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위해 주님께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는 사람을 바꿉니다. 예수를 박해했던 바울이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를 핍박하며 옥에 가두었던 자가 예수를 따르는 자로 핍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바울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에 대해서 바울의 고백에 대해서 동감하는 것은 바울을 바꾼 은혜가 바울이 고백하는 넘치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울이 드리는 찬양이 우리의 찬양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찬양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7)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지요? 바울의 고백에 대해서 나도 그러합니다. 고백할 수 있습니까? 직분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동감하십니까? 주님이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합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주님이 바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이 나를 부르셔서 주님의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사함으로 충성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바울이 주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나도 주님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히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삽니다.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며 삶으로 주님을 높이며 살아갑니다.
동감이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우리의 감동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에 그 은혜가 우리를 감동케 하고 우리를 움직입니다. 우리를 바꿉니다. 동감하셨다면 그것으로 멈추지 말고 감동으로 나아가십시오. 순종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주님을 위해 살고 더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더 주님을 닮도록 노력하고 더 주님을 사랑하도록 수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