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도망가는 야곱과 하나님의 함께하심
본문: 창세기 31장
설교자: 이병권
계속해서 야곱의 삶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야곱이 대가족을 이루고, 큰 부자가 되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셨고, 그 축복의 결과로 야곱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되었던 야곱과 라반의 대결은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라반은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량이 많은데 간략하게 세 장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절에서 20절까지 야곱이 도망가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21절에서 35절까지 라반이 추격하는 장면입니다. 세 번째는 36절에서 55절까지 야곱이 언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그럼 “도망가는 야곱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은 지난 6년 동안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에 대해서 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1)
야곱의 처남인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부자가 된 것을 두고,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잘 되는 것을 보자, 시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과 대조적으로 늘어가는 야곱의 재산을 봅니다. 아버지 재산이 줄어드는 것은 결국 자신이 받을 상속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욕심 많은 그들에게 야곱이 좋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라반의 재산을 빼앗은 것은 야곱이 아닙니다. 라반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야곱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 일이 이렇게 되자,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도 달라집니다. 야곱을 보는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라반이 보기에 전에 야곱은 자신의 재산을 불어나게 했던 복덩이였는데, 지금 야곱은 계속해서 자신의 재산을 빼앗아 가는 눈엣가시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 하나님의 이 말씀은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와 완전한 대조를 이룹니다. 2절에 나오는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라반의 얼굴이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라반은 전과 다르게 야곱과 함께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6년 전에 이미 떠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때가 되었습니다. 먼저 야곱이 처한 환경이 떠나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곳에 더 있으면 처가 식구들과 어떤 일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야곱은 아주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분의 인도와 보호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야곱은 그 전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야곱의 환경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지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짐을 싸고 정리해서 고향으로 돌아야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야곱에게는 정말 중요한 절차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우리 형제님들 이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4)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지만, 라헬과 레아에게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떠나기에 앞서서 함께 떠나야 할 아내를 설득하는 일을 합니다. 라헬과 레아를 조용히 불러서 지금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동안 자신이 라반을 어떻게 섬겼는지, 그에 대해서 라반은 자신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6-7)
야곱은 열심히, 힘을 다해서 라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습니다. 라반이 품삯을 변경할 때, 야곱에게 좋은 조건으로 변경했겠습니까? 라반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품삯을 조정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라반이 어떻게 하든 야곱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반대편에 있던 라반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계략을 꾸며도, 아무리 잔머리를 굴리고, 잔꾀를 발휘한다 해도, 하나님 편에 있던 야곱을 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반을 막으셨고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과 레아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3)
하나님은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20년 전, 혼자서 알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을 때, 외롭고 두려웠던 그 때에 자신을 찾아오셔서 약속하신 하나님, 그 벧엘의 하나님이 지금까지 야곱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때의 약속,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그 약속을 지금 지키려고 하십니다.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라헬과 레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남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따릅니다. “…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6)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세요. 저희도 따르겠어요.’
아내의 동의까지 얻은 야곱은 길을 나섭니다. 자녀들과 아내들을 낙타에게 태우고 그 모든 가축과 소유물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부재중인 틈을 타서 떠납니다.
당시에 양털을 깎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는데, 보통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며칠에 걸쳐서 했던 일입니다. 양털 깎기가 끝나면 잔치를 열고 일의 마침을 기념했을 만큼 당시의 큰 행사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야곱은 좋은 때를 골라서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라헬은 라반이 없는 것을 노려서 드라빔을 도둑질합니다.
드라빔은 사람모양으로 만든 조각상으로 크기는 다양했습니다. 라반의 드라빔은 라헬이 나중에 안장에 넣고 앉았던 것을 생각해볼 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작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드라빔을 집안의 수호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드라빔이 집안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대대로 간직하며 자손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라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 드라빔을 라헬이 몰래 가져간 것입니다.
이어지는 둘째 장면은 라반이 도망간 야곱을 추격하는 장면입니다.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22-23)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지 삼 일 만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사람들을 거느리고 7일을 쫓아가 야곱이 있는 곳에 이릅니다. 23절에 ‘쫓다’는 말은 전쟁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적을 없애기 위해서 쫓아가는, 위협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많은 가족과 가축들을 데리고 이동했기 때문에 하루에 많은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란에서 길르앗까지는 대략 640킬로가 되는 거리인데, 10일 만에 이곳에 이르렀다는 것은 평균적으로 계산 했을 때 하루에 64킬로씩 여행했다는 것입니다. 어림잡아서 여기서 서울까지 거리를 매일 걸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전력을 다해 도망갔는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집안의 남자들을 모아, 기를 쓰고 뒤를 쫓아갔는데도 야곱의 일행을 따라 잡기까지 7일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라반은 추격에 성공했고, 야곱이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이제 도망간 일당을 혼내줄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24)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것은 라반에게 주어진 권한을 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라반에게는 야곱의 것을 빼앗을 권한도 없고, 야곱을 해할 수 있는 권한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야곱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라반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도록 두 손을 묶어버리셨습니다. 라반의 발톱과 송곳니를 뽑아버린 것입니다.
이제 라반은 야곱을 만나서 말없이 떠난 것에 대해 따질 뿐입니다. 말하고 떠났으면 자신이 후하게 잔치를 베풀고 환송했을 텐데, 몰래 떠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야곱은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라반이 하고 있는 말은 야곱의 것을 빼앗으려고 쫓아왔다가 하나님의 경고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변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일이 꼬여버린 라반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권한 밖이라 말할 수 없고, 다만 없어진 드라빔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신, 드라빔을 훔쳐갔다고 주장합니다.
야곱은 라헬이 한 일을 모르고 있었기에 오히려 라반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32)
라헬의 경솔함 때문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라반은 자신의 드라빔을 찾기 위해 장막마다 두루 다닙니다. 하지만 찾지 못합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낙타 안장 아래에 넣어 두고, 그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분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기세등등한 라반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약한 여인의 손에 납치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짓 신, 사람이 깎아 만든 무능한 가짜 신은 지금 여인의 엉덩이에 깔려있습니다.
이런 우상에게 자신의 안위와 복을 비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영적으로 눈을 뜨고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바보 같은지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그와 같았고, 어둠에 속했고, 거짓에 속아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알고 무엇이 진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며 사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라반은 자신이 찾고 있는 소중한 드라빔이 라헬의 엉덩이 밑에 깔려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3년 전에 라반이 야곱을 속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라헬이 라반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속일 때는 자신도 그렇게 속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서 자신도 그와 같은 상황을 맞이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어서 속이는 자는 결국 자신도 속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장면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이런 행동을 책망합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36-37)
라반의 고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야곱은 매서운 공격을 합니다. 20년 동안 마음에 쌓아 두었던 것들을 모두 쏟아낸 것입니다. 야곱의 이 대화는 36절에서 42절까지 계속되는데, 창세기에서 한 번의 대화로는 가장 긴 대화입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성실하게 봉사했습니다.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했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불성실하게 대하며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야곱은 빈손으로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런 라반을 하나님이 책망하셨고, 지금 야곱이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망에 대해서 라반은 더 이상 다른 말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저 서로를 위해 언약 맺는 것을 제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이제 서로 분리되어 살아가기를 약속합니다. 결혼식과 정반대입니다. 지난날이 어찌되었든 간에 이제는 좋은 추억만 가지고 헤어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야곱과 라반은 증거로 돌무더기를 세웠습니다. 돌을 쌓는 일은 땅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사건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라반은 이 돌무더기를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히브리어로 ‘갈르엣’이라고 불렀습니다. 두 이름 모두 “이 돌무더기가 증거다”라는 의미입니다. 길르앗 지역은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되었던 곳이라 라반은 아람어 이름을 지었고, 야곱은 히브리어 이름을 지었습니다. 또한 라반은 여기에 ‘미스바’라는 이름을 더했는데, 이는 ‘망루’ 혹은 ‘전망대’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서로를 지켜봐주시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덧붙인 이름입니다. 혹시라도 야곱이 그의 딸 외에 다른 아내를 맞이하거나 딸들을 박대하면 하나님이 그를 벌하신다는 취지에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언약 맺은 것을 확증하기 위해 같이 음식을 먹습니다. 함께 밤을 보내고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라반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을 축복하고 돌아갑니다. 이렇게 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라반과 하나님을 섬기는 야곱과의 대결은 야곱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31장은 하나님이 어떻게 야곱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는지, 그리고 라반의 위험에서 어떻게 야곱을 보호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몇 장에 걸쳐 기록된 야곱과 라반의 이야기에서 오늘 본문은 그 절정을 이루며 야곱이 라반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을 말해줍니다.
야곱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허락하셨고,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벧엘에 있던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그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그 약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 과정에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태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고, 야곱과 함께하심으로 야곱의 모든 소유를 번성케 하신 하나님,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경고하시며 야곱을 보호하신 하나님, 이 모든 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20년 동안 야곱의 삶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에게 순탄한 날만 계속 되었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동안 야곱은 힘들었고 고생했고 억울했고 피곤했고 쉴 틈 없이 일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12)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야곱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면, 나를 보호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충분히 원망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내가 예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때때로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을 만나면 당황합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신앙에서 뒤로 물러나든지, 혼자서 인생의 방학을 맞이하든지, 두 손을 놓아버리고, 생기를 잃어버리고, 메말라버린 신앙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대전제입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원리 안에서 다른 세부적인 것들, 다른 현상들을 이해해야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리가 내가 겪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원리 안에서 내가 겪는 현실을 해석하고,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그 원리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가 되는 진리 안에서, 나의 환경, 나의 인생,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예전에 제가 건강에 문제가 있었을 때, 제 아내는 저에게 흑마늘 엑기스를 주었습니다. 먹을 때마다 저는 인상을 쓰며 최대한 맛보지 않고 삼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한 번도 그 먹기 싫은 것을 주는 아내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그 사랑에 대해서 오해한 적은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내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 그 원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면, 제가 먹기 힘들어하는 것을 먹으라고 주는 그것만 생각하면,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되는 큰 원리 안에서 생각하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처음 보는 사람이 그와 같은걸 준다면 어떨까요?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우선되는 원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말씀하신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원리를 붙들고 다른 모든 상황과 현상과 경험들을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이해가 되는 않는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다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주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인내하며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서 이해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해되는 날이 이 땅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이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을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이 사실을 잊지 마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