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당신 입에서 나오는 열매 Part.6 “신중하게 말한다”
본문: 잠언
설교자: 조정의
데인 오틀런드는 청교도들이 책을 쓰는 방식에 관하여 “성경 한 구절을 철저하게 파헤쳐 마음에 영향을 주는 가르침을 찾아내 그것을 중심으로 2~3백 쪽의 원고를 쓴 다음 출판업자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온유하고 겸손하니, 개혁된실천사, 55p).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열매’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그런 것 같다. 잠언에 나온 한 구절, 말에 관한 말씀을 철저하게 파헤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내고 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지혜롭게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신중하게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나누기 원한다. 각각의 항목은 잠언에서 찾아낸 원리고, 그 본이 되는 분으로 예수님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1. 기본 원리: 신중하게 끝까지 진리를 말하라
잠언의 많은 조언이 부모가 자녀에게 한 말이다(솔로몬 왕이 그 아들에게, 1-29장,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훈계, 31장).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은 거의 대부분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하는 말로 살면서 단지 몇 차례가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는 훈계다. 잠언은 1장부터 의인화된 지혜가 부르고, 소리를 높이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발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잠 1:20-21)
모두 미완료로 계속 반복되는 활동을 가리킨다. 특별히 그 대상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그래서 ‘지식을 미워하고 듣기 싫어하는 자들’이다(1:22-24). 하지만 지혜는 경고하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두 번 듣지 않는다고 부모가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인기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그 말을 수용한 사람은 모여든 무리에 비해 아주 적었다. 심지어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 예수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어떤 말씀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주 책망하셨다(“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막 8:17).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진리를 이해할 때까지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듣는 이의 유익을 위하여 계속해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인내”가 요구된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 잘 듣지 않으려는 반항심 등을 참고, 추수 때를 위하여 울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 열매 맺을 때까지 진리의 씨를 뿌려야 한다.
다른 종류의 지식은 좀 몰라도 된다. 하지만 구원에 이르는 진리는 모든 이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수행하는 종들이 아닌가? 한두 번 거절 당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끝까지 진리를 말하자.
2.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않는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잠 26:4)
잠언에서 ‘미련한 자’는 ‘악인’과 동의어다. 악인은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인 온유, 겸손, 오래 참음, 사랑을 담은 말을 내지 않는다. 때론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기 위한 말을 낸다. 옛사람을 따라 말할 때 그리스도인도 그렇다. 상대방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 안에 있다. 과격한 말을 하는 사람과 논쟁하다 보면 나도 덩달아 과격해지고, 극단적인 논리로 주장하는 사람과 얘기하다 보면 나도 극단으로 치닫는다. 결국 잠언 말씀처럼 미련한 자와 “같”아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언어생활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지혜 중 하나는 그분의 ‘침묵’이다. 악한 자가 우둔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쏟아내는 말들에 주님은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셨다. 반응하지 않으셨다.
특히 공회 앞에 섰을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예수님께 쏟아진 온갖 어리석고 악한 말들과 너무나 대조되는 예수님의 ‘침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정말 필요한 말씀만, 그것도 듣는 이를 위한 말씀만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신 모든 말씀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 의탁하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셨다. 대신 예수님은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대응이다.
이것이 우리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다. 악한 자의 쏟아지는 어리석은 말을 듣고 있을 때, 우리가 느끼는 억울함, 분노, 불합리함, 수치심, 죄책감 등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주님이 모두 아신다. 공평하신 주님께서 의인의 오래 참음을 기뻐하신다. 모두 갚아주신다. 그러므로 순간적으로, 육신의 소욕에 따라 반응(REACT)하지 말고, 신중하게, 성령의 소욕에 따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라(ACT).
3. 미련한 자의 어리석을 것을 따라 대답한다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잠 26:5)
앞에 있는 말씀과 완전히 반대의 말씀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하는가? 대답해야 하는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 상황을 신중하게 살펴 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4절은 미련한 자가 그 어리석은 것을 따라 말할 때, 그의 말하는 어리석은 방식과 내용을 따라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5절은 미련한 자가 그 어리석은 것을 말할 때 그 어리석음을 꾸짖고 책망하여 그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못하도록, 그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 당시 가장 똑똑하고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실천한다고 자부한 이들과 자주 논쟁하셨다. 싸움은 거의 대부분 미련한 그들이 걸어왔다. 예로 부활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와서 칠 형제가 한 사람씩 자식 없이 죽어서 그들 모두와 순차적으로 결혼한 한 여자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물었다(마 22:23-33). 의도가 분명한 질문이었다. 부활이 정말 있다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의 결말이 어떻게 나겠냐고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부활 때에는 장가나 시집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아가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죽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천국에서 부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조상들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말을 내는 것은 정말 신중한 지혜가 요구되는 일이다. 상대방이 분노할 때, 유순한 말을 내고, 과격한 말로 극단적인 주장을 필 때, 온유한 말로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갖춰야 할 말의 지혜다. 어떻게 이런 지혜를 통해 신중하게 말할 수 있을까?
먼저는 논쟁의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리석은 자에게 ‘대답하라’는 명령은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목적을 지향한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백성을 불쌍히 보신 예수님은 항상 그들의 무지함을 깨우치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다(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우리는 ‘항상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잘못한 적이 전혀 없고, 자기주장은 항상 옳은 것처럼, 다른 사람은 항상 나에게 배워야 할 사람처럼, 교만하게 가르치는 것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피차 권면하는 사람, 골 3:16, 살전 5:11, 히 3:13).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완고하게 되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우리의 겸손과 진실한 말로 깨우쳐야 한다.
4. 조급하게 말하지 않는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9:20)
‘신중함’의 반대말은 ‘조급함’이다. 잠언은 말이 조급한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조급함은 지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낸다(잠 14:29). 우리는 “때에 맞게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적절한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말하는 것과 적절한 기회를 살려 말하는 것을 배웠다. 급히 말하기보다 합당한 때를 기다리는 지혜, 듣는 이를 위로하고 세워주는 기회를 만났을 때 적극적으로 말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오늘은 또 다른 “때”, “적절함”에 관하여 말하기 원한다. 바로 “대상”에게 맞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합당한 시간에 합당한 말을 하면서도 합당하지 않은 대상에게 말하여 큰 낭패를 본다.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는 환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 ‘표현이 적절하고, 온유한 태도가 담겨 있으며, 대상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행여나 오해가 생기더라도 결국엔 풀리게 된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이 아무리 순전하더라도 반드시 지혜로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할 소지가 다분한 경우, 그 대상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울 때가 있다.
가령 시부모님이나 장인어른, 장모님이 하신 말을 배우자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지혜롭지 못할 때가 있다. 교회의 중요한 의논 사항을 공개적으로 알려야 할 때가 이르기 전에는 말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다. 개인적인 조언을 진심을 담아 온유하게 전달했을 때, 대상에 따라 때로는 좋은 결과를 얻지만, 때로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걸’하는 후회가 남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셨지만, 무리 전체에게 하신 말씀과 특별히 선출한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제자들 중에서도 세 사람에게만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이 있었다(마 17:1). 특별히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은 때가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마 16:21). 예수님은 이렇게 대상에 따라 아주 신중하게 말을 골라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우리는 말을 낼 때, 상대방이 이 말을 잘 받아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덕이 되는지 아니면 해가 되는지 계산해 봐야 한다.
한편 듣는 사람은 먼저 상대방의 최선을 믿어줘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말을 주고 받을 때, 아주 드물게 ‘조급한’ 말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말은 많은 생각 끝에 나온다. 상대방이 많은 생각을 하고 나에게 해준 말속에 있는 진심을 믿어라. 우리는 단톡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때로 그 속에서 나눈 말속에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거나 받을 수도 있다(가령 취업, 합격 등의 소식을 알림, 다른 누군가는 실패, 혹은 어떤 공지의 표현 하나하나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두고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의 최선을 믿어라.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 13:7).
모든 말은 ‘생각’을 통해 열매 맺는다. 신중한 말은 조급한 ‘생각’이 아니라 지혜로운 ‘생각’의 열매다. 모든 지혜는 시간이 요구된다. 말하기 전에 시간을 잠시 가져라. 상대방이 내 말을 오해하지 않고 잘 소화할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어리석게 말하는 것에 나도 어리석게 대응하는 것은 아닌가? 상대방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신중한 생각 끝에 우리는 항상 진리를 말해야 한다. 이것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온유하고 겸손한 방식이었다. 우리도 그분의 본을 받아 지혜롭고 신중한 말로 듣는 이들에게 선을 끼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신중한 말을 아름다운 예배로 받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