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가?
본문: 로마서 2장 17~29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는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세요?’ 직업을 물어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디에서 오셨어요?’ 출신을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입은 옷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있으면 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교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복장을 보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혹시 하나님의 사람이 입는 특별한 옷이 있을까요? ‘저 입은 옷을 보니,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옷, 그런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유대인에게는 그런 특별한 옷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고 하나님의 언약과 그 택하심을 보여주는 옷, 유대인에게 있었던 그 특별한 옷은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율법이라는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실패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오해했고 율법으로 오만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전해야 했지만 그들은 구별이 아니라 차별했고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개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옷을 입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옷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옷을 입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놓쳤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병원에 갔는데 하얀 의사가운을 입은 사람을 봤습니다. 누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의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봤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식당으로 가더니 안에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의사가 아니라 요리사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입은 하얀 옷이 의사가운처럼 보였지만 아니었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인지 옷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옷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옷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복을 입은 경찰은 옷은 아니더라도 그가 하는 일로 인해 경찰입니다. 제가 정장을 입었기 때문에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설교를 하기 때문에 설교자 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어떠했습니까? 율법이라는 옷을 입는 것에서 멈춥니다. 율법을 행하기보다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율법이라는 옷을 입었지만 그 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유대인의 잘못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향해 그의 잘못된 생각, 거짓된 안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근본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합니다. 누가 진짜 유대인 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앞으로 더 설명해나갈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바울의 이 경고의 말씀이 누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은 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했습니다. 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차별 없이 공정하게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경고의 대상을 분명하게 유대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롬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롬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바울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말하면서 유대인의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을 알 때 자연스러운 반응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구별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바울이 말하는 요점이 율법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는 이러한 특권은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은 사명으로 연결되는데 율법이라는 옷을 입은 그들에게 따라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롬 2: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롬 2: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은 볼 수 없는 자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어둠에 갇혀있는 자를 보게 하는 빛이고 율법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이 이 모든 특권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 조금은 안 좋은 뉘앙스의 말을 덧붙입니다. “스스로 믿으니”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들이 율법에 맞지 않는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이라는 특권은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권과 어울리지 않는 유대인의 모순된 모습을 봅니다. 바울은 다섯 개의 수사적인 질문으로 유대인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롬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이 첫째 질문은 다섯 질문의 제목과도 같습니다. 율법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사례를 말하는 세 개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롬 2:21 …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도둑질과 간음과 우상을 미워하면서 그에 반하는 일을 하는 모순된 모습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무난한 견해는 유대인이 우상 숭배를 가증히 여기면서도 이방 신전에서 가져온 물건은 팔아서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종교인이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행하거나 성범죄를 저질렀을 때 더 많은 질책과 욕을 얻어먹게 됩니다. 그 행한 일이 너무도 맞지 않는 일,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다섯째 결론적인 질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롬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결국 그 일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율법을 가진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않을 때, 지식을 가진 자가 그 지식으로만 자신을 내세우고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결론의 근거로 구약을 인용합니다.
롬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이사야 52:5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이 오히려 신성 모독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모순적인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집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율법을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고 있을 때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유대인일까요? 진짜 유대인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지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유대인과 같은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을까? 나의 말과 나의 삶은 얼마나 일치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는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하는 내가 그만큼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는 내가 그만큼 죄를 미워하고 의를 행하고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가 얼마나 성도를 위해 수고하고 있을까? 그만큼 아내를 사랑한다고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겸손을 드러내고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할까? 질문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나를 보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별반 다를 거 없네!’ 혹은 ‘나보다 더하네!’ 이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가? 왜 성경을 읽는가? 단지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지 자랑하고 남들과 논쟁하기 위해서 성경을 배우는가,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보는가?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위험해 질 수 있다. 당신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많이 알면 알수록 더 해로울 것이다.”
유대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을 가진 것을 끝나지 않도록, 율법을 아는 것으로 멈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말로만 능한 자가 아니라 삶으로 능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율법을 가졌다는 사실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심판을 피하게 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소유가 아니라 율법의 행함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인은 이렇게 반론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는 할례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바울이 대답합니다. “율법” 다음으로 “할례”에 대해서 말합니다.
롬 2: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심판에 대한 마지막 피난처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에 이어서 그들의 할례를 향해 일침을 날립니다. 율법이라는 옷을 입었지만, 그 옷에 맞는 순종은 없었던 유대인, 그는 또한 할례라는 옷을 입고서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었다는 표시입니다. 유대인 남자가 언약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반드시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할례는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발전되었고 그릇된 안전과 교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습니다.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효력이 있지만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할례와 같습니다.
결혼관계를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을 할 때 부부는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서약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표로 반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면 그 결혼반지가 부부 사이의 관계를 지켜줄까요? 남자가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않고 엉망으로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반지를 보며 그 약속했던 반지가 있으니까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지가 우리 부부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혼반지보다 약속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처럼 할례를 받고 안 받고 그것보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이 율법을 어기면 그의 할례는 결과적으로 무할례가 됩니다. 몸에 새긴 할례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할례가 가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할례의 가치는 순종했을 때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과 할례, 둘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훨씬 더 충격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롬 2: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롬 2: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요약하면,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을 정죄합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개로 비유하면, 개가 율법을 잘 지키면 사람과 같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가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며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논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주어진 특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구원을 가져오지만 불순종은 정죄를 가져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심판은 차별 없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인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누가 진짜 유대인인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2: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진짜 유대인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할례는 육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진짜 유대인이 되는 것은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차별 없이 진짜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할례는 육체에 행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한 것이고 율법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는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 칭찬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마음이 변화된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유대인입니다.
사람은 외적이고 눈에 보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부터 역사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그 변화가 속으로부터 나와서 겉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할례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여러 가지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침례, 교회 출석, 직분, 열심 등등 다양한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잘못된 안전이나 확신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는 이면적 그리스도인, 내면이 그리스도인인 사람이 진짜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변화된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외적인 표시가 의미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할례가 의미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은 자로서 침례가 의미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칭찬을 하나님에게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셨고 그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생각해봅니다. 유대인인 네가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 열심히 율법에 순종해라. 네가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자랑하는 만큼 네 자신을 가르치고 율법에 순종해서 이방인에게 본이 되어라. 그렇게 순종함으로 할례가 네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초점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할례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유대인을 책망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우리 모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의 할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풍성한 은혜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그리니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노와 심판이 마땅한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흉내 내지 말고 진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변화된 사람으로서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