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가 왕인가?
본문: 다니엘 1-4장
설교자: 최종혁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전세계가 떠들썩하다. 정말 큰 일 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긴장감이 고조될 때 각국은 자기 나라 사람들을 우크라이나에서 빠져 나오게 하였고, 사람들은 당연히 최대한 빠르게 탈출하려고 하였다.
그런 뉴스들을 보다가, 어느 한 선교사가 “왜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남기로 결정하였나”라는 제목의 글을 보게 되었다. 대학생 이하의 어린 네 딸을 둔 선교사인데, 그는 그곳에 남아 있으면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겠지만 이 위기의 순간에 교회가 위기에 처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였는지가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다.
멋진 믿음이고 선택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떠난 선교사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과 선택은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역시 같은 이유로 떠나기를 선택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에 대한 교회들의 대처도 달랐다. 이 역시 우리가 옳고 너희는 틀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교회는 각자의 신앙의 양심에 따라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믿음 가운데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이 왕이시다”이다. 즉, 그저 내 판단, 내 선호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남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누가 왕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가장 좋은 책이 바로 다니엘서다.
다니엘서는 전체적으로 보면 예언서이지만, 크게 보면 앞부분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뒷부분에서 예언적인 내용을 다룬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앞부분이다. 왕의 음식, 금신상, 풀무불, 벽에 씌인 글씨, 사자굴 등 대충 핵심 단어만 말해도 어떤 사건인지 주일학교 좀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내용이다.
익숙하면서 흥미로운 다니엘서의 말씀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집중하게 된다.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 그들의 결단, 바벨론의 학자들을 가볍게 뛰어넘는 그들의 지혜, 풀부불을 앞에 두고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용기,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그냥 하던대로 기도했던 강단.
이 모든 것들이 믿음의 행동이자 결과였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 도전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다니엘서 전체가 강조하려고 하는 것, 따라서 우리도 다니엘서를 읽을 때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고, 특별히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했던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나라”와 왕의 “통치”에 관한 말씀이 계속 등장한다. 특히 7장 이후 예언의 말씀은 이 세상에 어떤 나라들이 일어나고 어떤 일들이 발생할 것인지 말하고, 최후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왕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단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역사상 왕들의 옆에 있었던 예언가라 불렸던 사람들은 다들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럼, 다니엘에 기록된 이 예언은 왜 다른가? 왜 믿을만하고 왜 믿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1-6장이다. 여기에는 세 왕이 등장한다. 바벨론의 전성기를 이끈 느부갓네살,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을 함께 한 벨사살, 그 멸망을 가져왔던 메대의 다리오가 그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누가 진짜 왕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누가 진짜 주권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계획을 이루는 왕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사람들에게 증명해주신다. 그러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 나라를 잃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오늘은 특히 1-4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대의 가장 위대했던 왕을 통해 참된 왕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는지 함께 살펴보고 교훈을 얻기 원한다.
1장 – 질문, “누가 왕인가?”
단 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느부갓네살은 대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왕이다. 바벨론을 새롭게 일으킨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지만, 그 바벨론을 대국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느부갓네살이다. 그가 죽고 나서 바벨론이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한 것을 고려하면 느부갓네살의 역사가 곧 바벨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은 주변의 나라들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특히 포로들을 사로 잡아 와서 건축 공사에 투입하였다. 사실 느부갓네살은 역사가들이 정복자보다는 건축가로 여길 정도로 대규모의 건축 공사를 벌였던 왕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바벨론과 관련던 유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느부갓네살이 벌인 건축 공사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대규모의 건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을 통해 바벨론이 번영을 누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 바벨론 성은 가장 크고 인구도 많았던 성이었다. 그 성 안에는 큰 건물과 신전, 궁전들이 있었는데 신전만 5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건축물 중 하나인 공중 정원이 있었다. 진짜 공중에 떠 있는 정원은 아니었지만, 낮은 곳이 아닌 높은 곳에 정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용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정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것을 개의치 않을만큼의 권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니 너희는 어떻게든 말들어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권력자였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은 애굽을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애굽 왕 바로 느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했다. 열왕기의 저자는 그로 인해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다고 기록했다(왕하 24:7). 바벨론과 애굽 중간에 있었던 유다 왕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호야김 시대에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는데, 여호야김이 친애굽 정책을 펼치자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를 치고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것이 느부갓네살의 1차 침공이었고 이후 3차까지 진행된 침공으로 남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여기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1차 침공이다. 그 상황을 역대기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대하 36:6–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7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
느부갓네살에게 이 일이 무슨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그랬듯 적국의 성을 무너뜨리고 포로를 사로잡아 왔고 그 나라의 귀중품을 노략해 왔다. 여전히 그의 군대는 강했고 그의 계획은 아무 문제 없이 성취되었다. 유다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고 유다 왕은 자기 앞에서는 그저 포로에 불과했다. “누가 왕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가 왕이지”라고 쉽게 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느부갓네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단 1: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느부갓네살이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말이다. 성경은 “주”라는 표현을 통해 이 모든 일의 주체,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한다.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주”,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심지어 주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승리를 주신 이유도 그에게 있지 않았다.
왕하 24: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느부갓네살의 뛰어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유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고 그 심판의 도구로 느부갓네살이 사용된 것 뿐이라는 말이다. 느부갓네살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자기 뜻대로 일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계산에 없었던 주 하나님의 존재가 조금씩 그의 계획에 차질을 만들기 시작한다.
느부갓네살은 유다에 대한 다음 계획은 적당한 자기 사람을 통해 그들을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포로로 잡아온 왕족과 귀족 중에서 외모도 괜찮고 머리도 좋은 사람을 뽑아서 바벨론 학교에서 훈련시킬 것을 명했다(3-5절). 늘어나는 영토만큼 자국의 인구는 늘지 않기 때문에 아마 이런 식으로 식민지를 관리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말만 잘 들었어도 이렇게 정복 전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전략은 중앙 집권적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두되 자치권을 주어서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실리만 취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말을 듣지 않으니 유다의 괜찮은 젊은 사람들을 바벨론 사람으로 만들어서 식민지를 관리하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선택 받은 사람들 중에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는 4명의 소년이 있었던 것이다(6절). 이들은 왕족이나 귀족이었다. 랍비들의 전통은 이들이 히스기야 왕의 후손이었다고 말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확실한 것은 이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리더로서 잘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10대 초중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에게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고(4절), 왕의 음식을 먹게 하였다(5절). 또한 그들의 이름도 바벨론 식으로 모두 바꾸었다(7절). 완전히 세뇌하여 그들을 바벨론의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과 친구들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을 거절했다. 이것은 단지 음식을 거절한 문제가 아니라 왕의 명령을 거절한 것의 문제다. 왜 이들은 목숨을 걸고 왕의 명령을 거절했을까?
사실 거절하려면 이름을 바꾸는 것이나 바벨론의 사상 교육을 거절했어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그것들은 다 수용하면서 음식만 거절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는 것이나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들을 더럽게 하지 못했다.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학문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름을 바꾸는 것도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 뿐이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음식은 달랐다.
그 음식에는 율법에서 금지한 것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더 높은 확률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어서 그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우상 숭배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였든, 다니엘과 친구들은 이 음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우리를 침략하고 노략한 이방 원수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어’와 같은 것도 아니었고 ‘아, 여기 음식 입에 안맞는데’와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왕의 음식을 거절한 이유는 더 높은 왕의 명령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혀서 이방 왕의 포로가 되었고, 성전도 노략 당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별되었던 성전의 기물들이 이방 신의 성전에 있고, 심지어 그들의 이름에도 이방신의 이름이 들어갔지만, 다니엘과 친구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고, 따라서 느부갓네살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들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건강했고(15절) 또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지니게 되었다(17절). 그들의 믿음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났어도, 성전이 노략을 당했어도, 하나님의 통치는 견고했다. 전혀 위협받지 않았다.
1장에서 “왕이”라는 표현은 항상 느부갓네살 왕을 지칭한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왕으로 불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벌어지는 일을 보면 느부갓네살을 지칭하는 “왕”이라는 표현이 참 무색하고, 약간은 비꼬는 듯한 뉘앙스마처 풍긴다. 자신이 하는 일의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면서, 느부갓네살은 그저 자신을 위대한 왕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느부갓네살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유다를 점령하고 그 성전을 노략한 왕이 진짜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다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하나님이 정말 왕이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 나라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약탈을 당했을 때, 특히 성전이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도 여러 어려움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진짜 왕이신지, 아니면 누가 왕인지 혼란스러워한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성도들 같은 일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가 오래 인내하며 기도하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혼란스럽다. 누가 왕인가. 하나님 생각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립서비스처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만”이라고 말은 하지만, 좌절하고 불평한다. 원망하기도 한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말한다. 그러면서 의지할만한 다른 무엇을 찾는다. 사람을 찾고, 시간을 찾고, 돈을 찾고, 세상의 지식을 찾는다. 다른 왕을 찾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다니엘 1장이 묻는 것이다. “누가 왕인가?” 그리고 2장에서 답한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2장 – 답변, “하나님이 왕이시다.”
2장은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시작한다.
단 2:1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꾼 꿈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기 나라의 모든 지식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지금 심히 마음이 번민하다고 했다. 이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바벨론도 꿈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꿈을 해석하는 일은 바로 지금 불려온 사람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슨 꿈을 꾸었는지, 꿈의 내용을 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단 2:5 왕이 갈대아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현자들은 반복해서 꿈의 내용을 알려주면 해석해 드리겠다고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 일은 이렇게 결론이 났다.
단 2:11–12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12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령하니라
현자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못박았다. 불가능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은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사실이기는 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과 기만을 인정한 꼴이 되었다. 그들은 그동안 신의 이름으로 꿈을 해석하고 예언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의 시험 무대 앞에서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것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왕은 분노하여 그 현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 여기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누가 진짜 왕인지 알고 있었다.
단 2:20–22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22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다니엘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도우심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왕 앞에 나아간 다니엘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 2:27–29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29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느부갓네살은 앞으로 될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앞으로 될 일을 그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큰 신상의 꿈을 통해 느부갓네살 이후에 일어날 제국들에 대해서 알려주셨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을 알리셨다. 이 꿈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결국 역사를 끝내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의미다.
그래서 다니엘은 해석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단 2:37–38 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느부갓네살은 당대 왕들 중의 왕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지만, 결국 그에게 그런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주신 하나님은 더 높은 왕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몰랐던 꿈의 내용을 다니엘이 알고 이렇게 해석까지 했다는 것이 바로 그 중거였다. 그래서 느부갓네살도 이렇게 고백했다.
단 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누가 왕인가? 하나님이 왕이시다. 이것이 다니엘 2장의 답변이다.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다. 아무리 그가 크고 무서운 왕 같아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보다 더 크고 무서운 왕이시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이 그런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다니엘에게 말하면서 “너희 하나님”, “네 하나님”이라고만 말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 하나님에게 도전한다.
3장 – 도전,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1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다. 2장에 나온 신상과 관계 없을 수 없다. 그가 꿈에서 봤던 신상은 머리가 금이고 나머지 몸은 은, 놋, 쇠, 진흙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만든 신상은 모두 금으로 된 신상이었다. 이유는 분명하다. 다니엘의 해석에 따르면 느부갓네살 자신이 바로 금으로 된 머리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왕국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금 신상을 만들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 신상에게 절하게하여 자신을 신처럼 높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명렬하게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다.
느부갓네살을 왕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왕의 말에 따라 금 신상에게 절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왕은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어떤 우상에도 절하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이 절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느부갓네살은 노하고 분노하여 그들을 바로 끌고 오라고 명했다. 금방이라도 풀무불에 그들을 던져 넣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아까운 인재들이라고 생각했는지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며 이렇게 말한다.
단 3: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이 말에서 느부갓네살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현재 자신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막을 수 없고 저 풀무불에서 구해낼 수 없다고 자신한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는 느부갓네살의 말이 세 사람의 마음에 꽂혔던 것 같다. 이 말은 그들의 믿음과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느부갓네살은 그들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서 “건져낼 신이 누가 있을까?”라고 물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질문에 내포된 대답은 “당연히 없다”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뜨거운 불구덩이에 너희가 들어가게 될텐데, 무슨 수로 너희가 살아나올 수 있겠냐고 경고한 것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대답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당연히 가장 높은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단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왕의 풀무불에서 능히 건져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 세 사람의 대답이었다.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할 수 있으신지, 없으신지는 고민할 거리가 아니였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인지, 하지 않으실 것인지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세 사람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결과에 관계없이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자신들이 해야할 일임을 세 사람은 잘 알고 있었고, 지금 그렇게 하겠다고 눈 앞의 왕에게 말한 것이다.
이에 느부갓네살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꼬박꼬박 “왕이여”라고 부르면서 왕의 말은 듣지도 않는 그 세 사람을 최대한 뜨겁게 달군 풀무불에 던져넣었다. 이제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라고 외쳤던 느부갓네살의 도전이 실행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그의 도전은 실패하였다.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느부갓네살과는 비할 수 없는 능력과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에 다시 한번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는 4장으로 이어진다.
4장 – 예배, “하늘의 왕을 찬양하라!”
4장은 느부갓네살의 조서로서 이렇게 시작된다.
단 4:1–3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3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그는 자기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고 자기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가 대대에 이른다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을 참된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게 행하신” 것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제 3자로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다루신 일이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또 다른 꿈을 꾸었고, 바벨론의 현자들은 알려주지 못한 꿈의 해석을 다니엘이 알려주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고 짐승처럼 7년을 살게 될 것이며 그것을 통해 느부갓네살이 왕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은 느부갓네살의 후년에 있었던 일로 그가 많은 건축 사업을 마무리한 때였다. 바벨론 성을 거닐며 그는 자신의 능력과 권세에 취해있었다.
단 4: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바로 이 때, 그의 꿈이 실현되었다. 느부갓네살은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7년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지만, 더 높으신 왕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셨을 때 그는 낮아질대로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셨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단 4:34–35 …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그것이 정말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그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누가 왕인지 깨달은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단 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여기까지가 참된 왕을 만난 왕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다. 이제 누가 왕이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하늘의 왕이 참된 왕이다. 그러니 너도 그 왕을 찬양하라.”
우리의 반응
당신은 느부갓네살의 대답에 동의하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동의하는가? 내 기대가 무너져도 동의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동의하는가.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어도 동의하는가. 눈 앞에 풀무불이 있어도 동의하는가. 다른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아도 동의하는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정말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왕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시 33:8–12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왕을 두려워하며 경외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그 경외의 모습을 3가지만 생각해보자.
무릎꿇라. 먼저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느부갓네살은 복 받은 사람이다. 그는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무릎 꿇게 하셨다. 모두가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다. 그런데 그 때는 늦는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를 바란다.
인정하라.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두 그러해야 한다. 내가 왕이 되거나 다른 무엇을 왕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거절할 것을 거절했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왕이신 하나님의 기준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 결과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안심하라. 다니엘과 친구들의 용기, 결단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확신에서 오는 평안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우리 상황이 어떻든, 그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확신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가끔씩 아이와 다닐 때 아이가 불필요하게 불안해 하고 무서워하면 속이 상하고 한편으로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 내가 이렇게 옆에 있고 손을 잡아 주고 있는데, 나를 그렇게 믿지 못하는건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믿는 사람이 다른 무엇 때문에 불안해 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 말은 우리에게 절대로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포로로 잡혀가기 전 그들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는 원하지 않던 일이 일어났다. 어떤 면에서 나쁜 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여전히 왕이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로 왕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광풍이 일어나 배가 가라앉게 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 때 제자들이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며 예수님을 깨웠을 때, 예수님은 먼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명하셨다. 왕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피조물은 그 순간 복종했다. 바람과 바다가 즉시 잠잠해졌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믿음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은 다스리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그러니 안심하라. 그리고 누가 왕인지만 기억하라.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참 복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