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네 아이를 죽음에서 구하라

본문: 잠언 23장 13-14절

설교자: 최종혁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사람들은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을 좋아하지만, 진정한 사랑 혹은 최고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다. 사랑은 변하지만, 모든 사랑이 변해도 최후에 남을 사랑이 바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부모이기에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하셨다.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

죄로 타락한 부모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느냐는 의미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고, 예수님도 그것이 일반적인 사실임에 동의하신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자녀가 어떤 위험에 빠지거나 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보호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서 부모는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가장 이타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부모가 되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아이를 부모는 사랑으로 돌본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씻기고 모든 것을 해준다. 그것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재정을 소비하고 감정도 소비한다. 아무리 외모를 가꾸기 좋아하는 부모라도 어린 아이가 아프면 떡진 머리를 하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간다. 이 아이를 잘 키워야 나중에 내가 힘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계산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아이가 뜨거운 불에 가까이 가면 부모들은 당장에 막아 선다. 전기 콘센트에 손을 넣으려고 하면 큰 소리를 지른다. 그것 때문에 아이들은 속상해 하고 놀라서 울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둘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는 것이지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떤 위대한 부모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부모는 모두 이렇게 한다. 사실 그래서 잔소리가 많아지기도 한다. 자녀가 보지 못하는 필요나 위험을 부모는 보고 있기 때문에 할 말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꼭 물리적인 것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관계에 있어서, 진로에 있어서, 삶에 있어, 부모들은 자녀의 필요나 위험을 볼 수 있고, 자녀가 최선의 것을 선택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부모라고 항상 옳은 결정을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부모가 일부러 자녀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그들의 필요를 돌보지 않지는 않는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럼 이제 그런 부모들에게 묻겠다. 지금 당신의 자녀의 가장 큰 필요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들이 처한 실제적 그리고 잠재적인 위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 생각이 나겠지만 크리스찬 부모라면 한 가지 공통적인 답을 할 것이다. 바로 자녀의 구원이다. 그들이 처한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위험이 영원한 멸망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보자.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이 말씀은 아마 오늘날의 자녀양육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미개한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애를 채찍으로 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이 “채찍”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노예를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그럴 수도 있지만, 채찍을 ‘매’로 바꿔도 오늘날 기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도 몇 해 전 민법상의 자녀 징계권에 대한 법률을 삭제했다. 매가 아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유심히 보라. 이 말씀은 무조건 아이를 채찍(매)으로 때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목적도 아이를 말 잘듣는 고분고분한 아이로 만드는데 있지 않다. 애들은 2-3일에 한번씩 패줘야 말을 듣는다는 류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은 부모의 훈계를 말하고 있다.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고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그런 일을 해야할 것을 말한다.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는 이중부정의 명령은 부모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물론 반대로 아이를 죽일 듯이 훈계하는 부모에 대해서는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라”는 또 다른 분명한 지혜의 명령을 주기도 한다(잠 19:18).

하지만 많은 경우에 부모는 자녀를 훈계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잘못을 해도 그냥 이해하고 용납하고 넘어가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자녀의 훈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훈계하는 부모를 이기적이고 자기 편하려고 아이를 체벌하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세상 어떤 부모가 그러겠는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정상적인) 부모는 없다.

이 말씀은 잘못된 길로 가려는 아이를 바로 잡아 주어야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체벌이 사용될 수 있음을 말씀한다. 내가 편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녀를 미워하는 행위다(잠 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앞서 말했듯, 사랑은 상대의 필요를 돌보고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잠언에서 정말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훈계의 목적이다. 채찍으로 아이를 때릴지라도 그는 육체적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렇게 할 때 그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구약에서 스올은 쉽게 말해 ‘죽은 자의 세계(내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13절의 ‘죽음’과 같의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14절에서는 특별히 ‘영혼’이 사용되었고 또한 ‘구원’이 필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풍성한 삶(영생)과 반대되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말씀은 우리의 아이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그들을 훈계하여 그 죽음에서 아이들을 구해야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과는 비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심판, 멸망)을 향해 나의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더한 일을 하더라도 아이를 막아설 것이다. 그것이 아이를 정말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그럼, 이 잠언이 말하고 있는 전제는 사실인가? 사실이 아니라 그냥 자녀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잠언의 말씀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진리로 확인할 수 있는 명제다.

그런데, 여기서도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봐야 한다. 하나는 아이들 스스로가 이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이 그들이 그 길을 흐트러짐없이 잘 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우리의 아이들은 스스로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 말하는 ‘모든 사람’에서 순진무구하고 티 없이 밝은 내 아이만 제외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 그랬던 시절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보였던’ 시절이 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는 드러난 것 뿐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죄인이었다.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리고 이런 죄의 결과가 사망이다.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성경은 계속해서 ‘모든’을 강조한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의 하나님에게서의 영원한 분리인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영원한 심판,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고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배는 침몰해 가고 있지만, 그 안에 있으면서 괜찮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운명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다. 그 중에 정말로 착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부모 눈에 어떤 아이가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멸망을 향하는 이 넓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스스로 그 영원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주관자에 의해서 그 죽음으로 인도되고 있다.

예수님은 사탄을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표현하셨다(요 12:31). 에베소서 2:2은 사탄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그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한일서 5:19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놓여있다고도 말한다. 사탄은 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런 사탄이 하는 일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자와 같이 사탄은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사자를 비롯한 맹수가 무리 중에 어떤 개체를 노리는지 아는가? 무리 중에서 가장 약한 개체를 노린다. 쉬운 사냥감을 노리는 것이다. 사탄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사냥감을 잡으려고 힘 뺄 필요가 없다. 쉬운 사냥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이들이다.

사탄은 아이들을 공격하면서 “지금부터 내가 공격할테니까 잘 막아봐”라고 하지 않는다. 공격 당하는 쪽은 공격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공격한다.

진화론이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왔는지를 보라. 처음부터 성경을 공격하고 부정하지 않았다. 마치 성경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처럼 시작되었다. 그저 ‘과학적 연구’로면 여겨졌었다. 단지 지금 세상의 모습을 보니 공통 조상 아래서 여러 다양한 모습이 나오고 그 중 어떤 개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남는 과정을 거친 것 같다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론이 확장되면서, 결국 성경 자체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공격하고 있다. 유신진화론이라는 이론을 통해 어떻게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지켜내려고 하고 있지만, 애초에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유신진화론은 논리적으로 그냥 진화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성경은 그저 좋은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는 고대 서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사탄은 사람들에게서 창조주만 제거한 것이 아니라 심판주도 제거했다. 해로워 보이지 않았던 하나의 과학 이론에서 시작된 결과다. 하나님이 없이 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삶의 목적이나 방향에 대해서도 하나님 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아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서 사탄이 하는 일을 성경은 “간계”라고 표현한다. “계책”이라고도 하고, 디모데전서 3:7에서는 “올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좋아 보이는 무언가를 표면에 내세워서 대상을 사로잡는 것이 사탄이 취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렇게 하기위해 먼저 사람들의 마음(생각)을 미혹한다.

사탄의 이런 전략은 첫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도 볼 수 있다. 사탄은 여자에게 먼저 접근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는데, 왜 저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와의 생각의 방향성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 그리고 사탄은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에 여자가 좋아할만한 생각을 더했다.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말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던 여자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나자 먹지 말아야할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 했다. 이제는 이 열매를 먹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와의 입장에서 뱀이 자신을 미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탄은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했다(고후 11:3). 그 생각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를 죽음으로 인도했고, 지금도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사탄은 우리 자녀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준다. 하나님하고 상관 없이 네가 원하는대로 살아도 되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는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하와에게 했던 말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란 생각을 계속해서 주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이 생각에 따라 살기 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면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악과를 먹기 위해 하와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가시덤불을 지나야 했다면, 사탄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했을 것이다. 하와에게 훨씬 더 강한 신념을 심어주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탄은 인류에게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다는 생각을 주입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고, 이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사탄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미혹했다. 그 모든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좋은 단어와 개념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인권’을 생각해 보라. 성경적인 ‘인권’의 개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사탄은 거기서 하나님을 제거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만 강조했다. 당연히 그런 권리를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런 얘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들렸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성경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의 차별은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그 자체는 성경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거된 채 강조된 인권은 결국 그 도를 지나치게 된다. 성경적인 자존감은 필요하지만, 하나님 없는 자존감은 결국 모든 권위를 무시하고 내가 중요하고, 나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생각에 든든한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옳고 그른 것은 애초에 없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낙태가 합법화 되고 동성애(동성결혼)이 합법화 되어가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죄책감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원하는대로,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으로 쾌락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사탄은 낙태라는 살인을 살인이 아닌 것으로 바꿨다. 그냥 무조건 낙태는 살인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여성의 인권(자기 결정권)을 얘기했다. 행복 추구권을 얘기했다. 그리고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세포 덩어리라고 얘기했다. 죄책감을 가지고 하던 낙태에서 죄책감을 덜어준 것이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항상 ‘성폭력’ 등에 의한 ‘원하지 않는 임신’을 강력한 이유로 제시해 왔었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그런 낙태보다 합의 안에서 이루어진 성관계로 생긴 아이를 낙태하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낙태를 하는 모든 사람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걸린 경우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예외를 통해 기준을 바꾸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사탄은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을 미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있다.

동성애는 어떤가. 동성애는 항상 아름답고 참된 사랑으로 표현되어 있다. 동성애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성애자도 정말 저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데 주변의 꽉 막힌 사람들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게 만든다. 이제는 동성이 법적으로 결혼도 가능하고 아이도 가질 수 있는 나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과거 법으로도 처벌을 받았던 동성애가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결혼 전에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거니 속도위반이니 하는 얘기들은 이미 지난 얘기다. 오히려 전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하고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결혼했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혼해도 괜찮다. 최근에는 ‘졸혼’이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어쨌든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지금은 만들어져 있다. 점차 ‘결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미 전통적 결혼제도의 ‘재정의’가 아니라 결혼 자체의 ‘폐지’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외에도 말하자면 끝이 없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그야말로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로마서 1장이 묘사하는 죄악된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연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산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신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대로 살면 그것이 진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 삶이 나를 결국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미 사탄이 그런건 없다고 그 마음을 미혹했기 때문이다.

사탄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데, 특히 아이들의 마음을 미혹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교육이고 하나는 미디어다.

학교에서 무엇이 가르쳐지고 있는지 보라. 미디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라. 모든 사탄의 미혹하는 것들을 아이들 앞으로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해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학교 교육에 하나님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럼 최소한 가치 중립적인 사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절대 진리로 배운다. 진화론은 당연한 과학적 사실이고,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와 사상 중 하나가 되어 있다. 성교육은 결혼과 무관하게 ‘안전한 성생활’을 가르치는 쪽으로 바뀌어 간다.

미디어는 사실과 정보를 전달한다는 순진한 생각도 버려야 한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뉴스도 그렇지 않다. 어린이들이 보는 책에도 사상이 들어 있고,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제작자들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보는 우리는 “괜찮을거”라고 “애들이 뭐를 알겠냐”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은 대놓고 처음부터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덕을 말하면서 그 안에 동성애도 그런 사랑이라는 사상을 넣는다. 인권을 말하면서 낙태를 말한다. 미디어는 그렇게 아이들을 미혹한다.

특히나 스마트폰이라는 휴대가 가능한 개인용 컴퓨팅 장치는 이런 미디어의 영향력을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전에는 그나마 TV를 봤다. 그러니 가족이 함께 보는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부적절한 것들은 부모가 걸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아니다. 인터넷 필터 같은 것을 사용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아이가 폰으로 무엇을 하는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너무 순진한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서 찾아 듣는 음악, 찾아 보는 영상, 웹툰, 인스타그램 등이 지금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스마트폰이 근본적으로 사탄의 도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탄이 정말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해 사탄이 하고 있는 일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하고 함께 지옥갈 사람?”하면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사탄은 아이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게 괜찮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앞에 차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좋은 것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나쁜 존재로 만든다.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마음을 빼앗기고 영원한 죽음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눈 앞의 모이를 쪼아 먹다가 결국 덫에 걸리는 새처럼, 그렇게 한걸음씩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 세상의 도덕적 타락은 단순히 더 죄악된 세상이 되었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이 더 죽음을 향해 가기 쉬워졌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 길을 따라가라는 압력을 더 많이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물결이 더욱 거세졌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갈수록 종교(내세,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 통계만 봐도 2000년 초에 57%에 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37% 정도만 그렇고(20% 감소) 무종교인의 비율이 60%를 넘었다. 그 중 기독교 인구는 겨우 16%를 넘긴 수준이고 계속 줄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저출산과 (초)고령화를 말하고 있는데, 교회 만을 놓고 보면 그 속도는 더 빠르다. 이미 사탄은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죽음으로 그들을 인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유평교회는 다를까? 다르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도 이런 사탄의 공격 아래 있음은 동일하다. 우리 아이들도 이미 학교 교육과 미디어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연령이 점점 늦어진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잘 모르겠고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진다.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경향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구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내 아이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히 내 눈에 보인다면, 구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만약 지금 내 눈 앞에 지옥 문이 열려있고 내 아이가 그 문으로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가려 한다고 생각해 보라. 채찍이 아니라 돌이라도 던지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그 아이에게 “니가 잘 선택해 봐”나 혹은 “니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겠는가.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아이를 찾고 있는데,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정녕 아이를 위한 일이 될 수 없다.

아이에게 정말로 돌을 던지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사랑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양육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회 보내는거잖아. 그런 일은 교회가 해야지 부모한테 다 떠맡기려고 하면 안되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주신 선물이자 책임이다.

자녀 양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지 다른 무엇에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무엇’은 당연히 정부나 학교가 포함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교회도 포함된다. 모두가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지 주된 역할은 부모가 해야 한다. 혼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의 모든 주된 역할을 부모가 해야한다는 것이다. 엄마만 하는 것도 아니고 아빠만 하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함께 해야하는 일이다.

내 아이를 나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내가 해야한다. 부모가 아이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는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모를 가장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두셨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부모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하나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아이들이 자신이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알게 해야 하고, 아이들을 그런 길로 인도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 영향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 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교육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가정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아이들은 보지 못하는 그 위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그런 상황을 다시 그려보라. 눈 앞에 지옥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면, 누구도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와가 처음 선악과를 먹을 때 진짜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면 (사실 알긴 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믿었을 뿐.)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길로 가지 말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소망하는 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체임을 알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지만 믿음은 노아에게 그 일을 보게 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들었던 것이다. 마치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그리고 노아가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들에게도 보여졌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모세를 생각해 보라. 다니엘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라고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그들이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었다.

부모가 해야할 일도 이런 일이다. 믿음이 없어서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내가 믿음으로 보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부모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 순위에 있는 일은 아이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학원비를 대주는 것이 아니다. 남부럽지 않게 해외 여행을 데리고 나가고 어학 연수를 보내주는 것이 아니다. 재밌고 멋진 엄마 아빠가 되어 주는 것,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게 부모로서 최우선의 일은 아니다. 나는 믿음으로 보고 있지만 아이는 보지 못하고 있는 ‘영원의 실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일은 앞서 예를 든 믿음의 선진들처럼 내가 그 믿음에 따라 살 때 가능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믿는다. 또한 그것이 나의 가장 큰 행복임도 믿는다. 그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만족이 지금의 순간적인 행복(쾌락)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밭에 감추인 천국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자들이다. 그것이 정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도 살 수 없을정도로 귀하고 가치있는 것임을 내 삶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에 한두번 빠지는 것이 큰 일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학원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낸다면 그것이 무엇을 자녀에게 보여주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회사는 아침 이른 시간이어도 아무 말 없이 잘 나가면서, 예배 시간은 항상 늦고 주일 아침 외의 모든 모임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무엇을 자녀에게 보여주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세상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면서 성도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얘기들은 잘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기 보다 불평하는 말이 더 많고, 좋은 옷, 좋은 가방, 좋은 차, 좋은 집을 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것처럼 말한다면 아이는 무엇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될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성경이 말하는 결혼의 가치를 볼 수 있을까? 직장에서 주를 섬기듯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시간 떼우다가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부모에게서 아이는 무엇을 보겠는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만, 내 삶의 선택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아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얘기가 될 수 밖에 없다.

죄만 아니면 뭐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태도로 참된 믿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나의 행동, 나의 습관, 나의 말, 나의 선택은 계속해서 내가 정말로 무엇을 믿고 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의 자녀들은 그것을 보고 있다. 나의 아이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그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하기 전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도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자녀의 최선을 구한다. 그런 자녀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들의 가장 큰 필요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대신 죽어줄 수 없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그 예수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자녀들이 믿을 수 있게 보여줄 사람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먼저 믿고 사랑하는 부모들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사랑하는 예수님을 보여 주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우리가 모두 그렇게 한다면 우리 중에 예수님이 더욱 선명하게 보여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우리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