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 설교의 제목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결론과 핵심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과연 어떤 믿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일까요? 어떤 종류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올까요?
예수님은 바로 전에도(5~10절)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믿음의 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이라면 위대한 일을 이루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어내는 진실된 믿음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그 진실된 믿음을 굳게 지키고 그 믿음을 따라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히 10:39).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장 11~19절)
1. 믿음이 있는 열 명(11~13절)
오늘의 사건은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날이 가까이 옴을 보시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를 떠나셨을 때(눅 9:51)부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19:28) 거의 10장에 가까운 내용을 이 과정을 기록하는데 할애하였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어떻게 예루살렘에 오게 되셨는지 그 경로를 자세히 따져가며 순차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여러 가지 일을 핵심 교훈에 따라 체계적으로 조합하기 원했습니다(1:3-“차례대로”). 그래서 이 과정 중에 지리적인 정보를 자세히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 정보를 어느 정도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이 일을 행하신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11절).
갈릴리는 사마리아 북쪽에 위치하고 예수님이 가시려는 예루살렘은 사마리아 남쪽에 위치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직접 통과하지 않으시고 갈릴리 남쪽까지 내려와서 동쪽에 있는 요단강 근처로 우회하여 이동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이 경로는 보통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택한 경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가 만나는 지역을 통과하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12절)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가고 있을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날엔 나병을 한센병이라고 부릅니다. 이 병은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피부 및 점막, 안구에 발진과 각종 염증을 일으키고 피딱지와 출혈 징후를 보이며 해당 부위에서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감각을 느끼게 되는 전염병”입니다.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병인데 쉽게 말하면 산채로 부패하는 병입니다. 몸이 썩고 문드러지고 상처 나고 부러지고 발에 못이 박혀도 감각이 없습니다.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병, 그리고 심각하게 부패되는 몸 상태를 스스로 감지하지 못하는 병, 그 병을 한센병, 한자로 나병, 순우리말로 문둥병이라고 부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의 계명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부정하니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아야 합니다(레 13:46). 그러나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른 환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돕고 보살펴야 했기 때문에 열 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상인들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밖으로 쫓겨났습니다(민 5:2-3). 이들은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클레이에 따르면 문둥병자 쪽에서 건강한 사람 쪽으로 바람이 불면 적어도 50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299p).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때 소리로 그들의 존재를 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분의 가르침과 병 고치는 능력에 대한 소문이 근처 사방에 퍼졌기 때문입니다(눅 4:37). 특히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한 동네에서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 후로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져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듭니다(5:15). 열 명의 나병환자들도 그 예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master)이라는 뜻을 가진 이 호칭은 성경에서 오직 누가만 사용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여”라고 부를 때 사용되었습니다(눅 5:5; 8:24, 45; 9:33, 49).
이 호칭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지만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높은 분으로 인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하신다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자신들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곡히 요청한 것입니다.
예전에 온 몸에 나병이 든 환자가 예수님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5:12-13). 그리고 그의 나병이 곧 떠났습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고쳐주실까요?
2. 믿음이 고친 질병(14절)
예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곧 이어 그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마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율법에 따르면 환자가 정결하게 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진영 밖에서 진찰하게 하였습니다(레 14). 나았다는 것이 확인 되면 정결한 새 두 마리를 잡고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로 새의 피를 찍어 정결함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고 마지막으로는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등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필수조건은 몸이 나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전에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치시고 나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열 명에게는 그냥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나병환자라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잠깐만요, 아직 저희 몸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요? 손과 몸이 뭉개진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 상태로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요? 여기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나서 제사장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제사장에게 몸을 확인하러 가는 그 길에서 내가 너희를 고쳐 줄 테니 나를 믿고 지금 가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모두가 예수님이 자기들 병을 고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제사장을 향해 출발했고 그들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14절) “출발하자 그들이 깨끗함을 받았다”
누가의 이 표현을 주목해보십시오. 그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서 이런 놀라운 긍휼을 받은 것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입니다. 그들의 온 몸을 둘러싸고 있던 흉측한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힘입어 믿음으로 내딛은 한 발자국의 걸음에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모두가 예수를 “주”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합당한 순종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것일까요?
누가가 특별히 이 병 고침의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의 본문이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3. 믿음이 참된 한 명(15~19절)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나병의 상태가 워낙 심각했고 그 병에서 치유된 것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에 육안으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을 때 그의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된 것같이(왕하 5:14) 이 사람의 살이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을 보시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나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깨끗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오면서 계속해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아직 자신이 깨끗하게 된 것을 몰랐을까요? 이 한 명의 나병 환자가 자기의 깨끗해진 피부를 보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예수님께 돌아온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내내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아마 처음 그의 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부터 터져 나오는 눈물과 기쁨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왜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동안 그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받았던 설움, 가족과 떨어져 볼 수 없었던 그리움, 육체의 고통, 냄새, 썩어짐, 죽음에 대한 공포…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격리되었던 사회에서 다시 받아줍니다. 심각한 부패를 알지 못했던 고장 난 몸에서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몸을 입은 것입니다.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 모두가 그런 기쁨으로 서로 얼싸안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단 한 사람이 취한 반응이 바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만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8절). 이 한 사람만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신 능력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감사를 돌리러 돌아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가 자신을 고칠 것이라 믿었고 그 믿음대로 고침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 머리를 숙이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누가는 그냥 지나가며 한 마디 툭 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에게 참 불편한 이름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동쪽 요단강쪽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은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지배했을 때 여러 민족을 억지로 혼합하게 한 혼혈민족입니다. 그 전으로 올라가도 남유다왕국과 분리되어 그리심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만들고 정통에서 벗어난 제사장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웠던 불쾌한 민족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성전을,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알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지나가셨을 때 거기 있던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4:9).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범죄자, 세리, 창녀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할 “죄인”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교사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예수가 정말 의인이라면 왜 이런 죄인들을 상종하는가? 우리같이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정통 유대인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라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유대인 중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며 율법에 열심을 냈던 그래서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여긴 자들 중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고 그분을 영접한 이가 참으로 적었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면서도 말입니다.
죄인, 세리, 몸을 파는 여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사마리아인, 이방인…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손가락질 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판단거리를 삼았던 이들 중에는 이렇게 예수께 돌아와 감사하며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은 유익에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나병환자에게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모두 똑같이 긍휼함을 맛보지 않았느냐? 모두가 다 썩어가는 몸에서 아기 피부같이 새로운 몸으로 완전한 고침을 얻지 않았느냐?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그 표적이 부활과 생명인 나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 그 아홉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지금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천국 복음에 대한 선포,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이신 놀라운 병 고침과 기적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외치고 있는 사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온 그 메시야이시며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 나라 백성은 왜 모르냐는 것입니다. 왜 영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처음부터 예수님은 이 현실에 직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동네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이것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거절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 한 과부에게 엘리야가 보내심을 받았고, 엘리사때 수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4:26-27). 그 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으로 몰아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고 놀라십니다. 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완벽하게 인정하고 그것에 바로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 예수님께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하였다”고 칭찬을 듣습니다(눅 7:9).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셨지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고 육신의 정에 이끌려 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이 뜻을 품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된 믿음을 가진 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요 1:12-13).
그것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나병 환자였던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
나머지 아홉 명은 썩어진 몸에서 완전히 깨끗함을 얻었지만 썩어진 영혼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깨끗해진 육체는 언젠가 썩을 것이고 썩어진 영혼은 영원한 심판을 당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단지 육체의 질병만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썩어진 영혼이 주님의 이 말씀으로 완전히 깨끗해졌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혈통, 사회적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으로, 자기의 계획과 뜻으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을 통해 거듭 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 그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간단명료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아들을 영접한 자는 생명이 있고, 그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은 그 아들을 관계 속에서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요 17:3). 우리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입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나병 환자와 같습니다. 우리 영혼은 살아있지만 썩어 문드러지는 죄로 부패해가는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치명적이어서 살아있을 때도 부패한 삶을 살게 하고 죽고 나서도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병입니다. 이 병은 비극적이게도 우리 스스로는 그 썩는 냄새와 증상을 알아차리기 힘든 병입니다. 그런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진실되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홉 명이 가진 것과 같은 믿음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뭔가 좋은 것을 주실 것 같고, 위로와 격려를 주실 것이라 믿고, 좋은 사람과 좋은 만남과 공동체 안에서 여러 유익을 통해 삶에 활력을 주실 것이라 믿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그 모든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은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믿음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로 돌아와 그분을 영접하고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받은 큰 기쁨,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 속에서 솟아나는 한없는 감사…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썩어짐을 면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길어야 70-80년 사는 육신의 삶에서도 질병에서 놓이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큰 소리로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삶에서 죄의 저주에서 놓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는 것은 얼마나 큰 소리로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시편기자는 136편에서 각 행마다 “감사하라”고 독려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죄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지만 우리가 날마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믿음이 바라보는 대상, 우리가 영접하여 영원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충분히 잊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고 무궁한 축복과 긍휼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과 피로써 거듭났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감사하며 기쁨으로 구주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 기쁨을 앗아가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