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본문: 누가복음 22장 63절~71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는 오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목요일 밤에 시작하여 금요일 새벽까지 이어진 재판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리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로 퇴위 됐지만 실세였던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요 18:12~14; 19~23), 두 번째로 안나스의 사위이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마 26:59~66; 막 14:55~64; 눅 22:63~65), 마지막으로 새벽에 71명의 유대인 대표로 이뤄진 산헤드린 앞에서였습니다(눅 22:66~71; 마 27:1; 막 15:1).
누가는 63~65절까지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핍박을 기록했고, 66절부터 71절까지는 새벽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심문한 자들이 죄 없는 예수님께 어떤 악을 행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동시에 악한 자에게 고난받으실 때,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선을 행함으로 참으셨는지, 그 아름다운 본을 배우기 원합니다.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먼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왜 대제사장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하룻밤에 두 번이나 먼저 심문하고, 새벽에 또 다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재판을 벌였을까요?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상식적이고 심지어 불법적이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죄인에 대한 심리는 공개된 장소인 성전에서 해야 했는데, 예수님은 대제사장 집 안에서 비밀리에 심리를 받으셨습니다. 물론 마지막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했지만, 그 앞에 두 번은 몰래 이루어진 사전 심리였습니다. 왜 두 번의 비밀 재판이 필요했을까요? 조금 후에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자기변호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지만, 예수님은 답이 이미 정해진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야 하는데, 형이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심리였습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마 26:66).
셋째, 중대한 재판 특히 사형에 관련된 재판은 판결을 내리기 전 최소 이틀의 시간을 두어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했는데, 예수님은 단번에 결정이 났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안식일이라 산헤드린 회의를 열 수 없고 그러면 예상보다 예수님을 오래 가둬야 하는데, 민심을 생각하면 이는 그리 안전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날치기 통과를 시킨 것입니다.
넷째, 절기 중에 심문이나 재판을 받지 않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심문당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이 세운 재판에 관한 규칙을 다 어겨 가면서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예수님의 심리를 해치우려 한 것일까요?
유대 종교 지도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눈엣가시 같은 예수를 운 좋게 그 측근 제자의 배신을 통해 잡아들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예수를 빨리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마 26:4).
그냥 죽인다? 안 됩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요 18:31). 로마에서 세운 총독이 허락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예수가 로마를 위협하는 인물이라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은 흥미롭게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백성을 미혹하니 반란자가 아닙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막으니 반역자가 아닙니까? 황제를 대항하여 일어난 자칭 왕, 죽이는 것이 로마 제국을 위해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총독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은 이런 식으로 속인다 쳐도, 같은 산헤드린 71명의 유대인 대표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먼저,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으니, 이스라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몰래 찾아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아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요 3:2). 또한 관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요 12:42).
그래서 비밀 사전 모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뜻을 함께하는 유대인 대표들을 모아서 미리 모의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새벽에 급히 호출한 산헤드린 구성원이 다 모였을 때,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재판을 이끌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지만, 마태와 마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59~68; 막 14:55~65).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비밀리에 모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마 26:59).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죄,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 신성 모독의 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이 확실하면 산헤드린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모인 무리는 많은 증인을 세워 열심히 신성 모독의 증거를 찾습니다. 하지만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난항을 겪습니다(막 14:56). 가장 그럴듯한 증언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마 26:61).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모독한 것이 곧 신성 모독이라고 몰아세울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두명이 말한 이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아 불발되었습니다(막 14:59).
보다 못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이 증거들에 대해 할 말이 있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셨고, 답답한 대제사장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신성 모독과 직결된 질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마 26:63).
아주 의미 심장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이 주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밝히 말씀해주십시오,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시렵니까?”(요 10:24). 그때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모르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거기서 그쳤으면 됐는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6). 그러자 사람들이 돌로 치려 했고 그 이유를 “신성 모독”이라 했습니다(요 10:33). 사람이면서 자칭 하나님이라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도 분명 단번에 돌아설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대답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마 26:63). 예수님을 계속 압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을 평정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인간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심각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사람이 영웅일 리 없습니다. 죽여 마땅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그렇다”는 의미가 담긴 대답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대제사장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됐다! 예수님이 드디어 그들이 듣기에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앉을 수 없습니다. 그 권능의 우편에 자기가 앉아 있을 거라는 말은 신성 모독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분노의 표현으로 옷을 찢으며 말합니다(아마도 속으로 웃으며)
“이 자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했으니 더 이상의 증인은 필요 없다,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마 26:65)
대제사장 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며 비밀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막 14:64).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분노에 찬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뿐 아니라 심한 욕설과 조롱 심지어 폭력까지 퍼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인들(막 14:65), 곧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63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절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절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직위나 직급에 상관없이 그들은 예수님을 치고 때리고 희롱하는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때린 후에, “네가 선지자라며? 어디 한 번 너를 친 사람이 누군지 맞춰보시지”라고 조롱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욕설을 예수님께 퍼부었습니다.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께 그날 밤 내내 더럽고 추악한 말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마음껏 예수님을 조롱하고 때리고 욕한 후에 대제사장 집 지하에 있는 감옥에 예수님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심하게 맞아 붓고 상처 난 얼굴에 더러운 침이 묻은 채로 결박된 예수님은 그렇게 차가운 감옥 돌바닥에서 고통을 참아내며 새벽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뭘 잘못한 걸까요?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런 처벌을 당한단 말입니까? 왜 이렇게 예수님을 미워하는 걸까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날이 샜습니다. 이제 준비된 쇼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그 공회로 끌어들였습니다(66절). 몇 시간 전에 모의 법정에서처럼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고, 대중이 실제로 등을 돌려야 합니다. 어젯밤에 했던 것처럼만 예수님이 잘 따라준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공회는 예루살렘 성전 뜰 절단석에 있는 공회당에서만 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회의 의장이고, 배심원이 서로를 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앉았습니다. 배심원은 70인으로 구성된 서기관, 랍비,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 장로들의 대표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죄수는 법정을 정면으로 하고 상복을 입고 서 있도록 하였고, 죄수 뒤에는 보통 그를 변호할 랍비나 그 제자들이 앉았지만, 아마 예수님께는 전혀 제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과반수가 지지하면 무죄판결을, 2/3이 표결하면 유죄 판결을 낼 수 있었습니다. 2/3이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공회에서는 더 많은 말이 오갔을 것이지만, 누가는 핵심적인 질문 두 개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하여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67절에 나옵니다.
67절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에 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영웅 아닙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그렇게 환호하며 춤을 춘 것 아닙니까? 로마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제국을 위협할 반란군 두목입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빌라도 앞에서 사형당할 죄인으로 판결받을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백성의 기대가 하나님의 계획과 다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이 기뻐하신 종 그리스도가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67절…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절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다, 아니다’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너희 생각은 정해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 아니냐. 내가 묻는다고 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견고하고 딱딱한 불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든 증거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릴 정도로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구약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69절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계시하신 말씀으로 네 짐승의 환상을 통해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왕국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중 마지막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곧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단 7:13-14).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대로 로마 정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정부를 세우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요 18:36).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맞다. 지금은 너희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소멸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를 주실 것이요, 나는 멸망하지 않을 영광스러운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이제부터 영원히(단 7:14). 그때 내 앞에 설 준비가 되었느냐?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 앞에 앉아있는 대제사장 가야바나 주위를 둘러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수 취급하고, 자신들이 재판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을 높여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지금 완강하게 거부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으로 순종하든지,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 속에 굴복하든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권능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셨습니까? 언젠가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로마에 반역할 그리스도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빌미를 남기지 않으면서도, 구약의 예언을 통해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권능의 우편에 선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서게 될 날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말입니다.
큰 소득 없는 대답을 들은 무리는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약속된 회심의 질문을 던집니다. 70절입니다.
70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신성 모독 판결로 가는 다이렉트 질문입니다. 공회를 보고 있는 여러 유대인들이 듣고 예수님에게서 단번에 등을 돌리게 만들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70절…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네가 의도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나는 네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신성 모독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으로 공회의 결정은 쉽게 원하는 대로, 짜여진 각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최후 판결을 내렸습니다. 71절입니다.
71절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사실 아무런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친히 그 입에서 들은 이야기,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으로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대답, 이는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답이 사형에 합당한 증거라고 판결했습니다. 선고는 내려졌고, 민심도 어느 정도 돌아섰습니다. 이제 로마 총독만 잘 설득하면 예수는 죽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그리스도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합니다(23:1).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안달했을까요? 예수님의 답변을 기반으로 세 단계로 접근하여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냥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을 죽어야 할 만큼 죄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도대체 왜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대답은 단순합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속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마 23:25). 종교 시스템을 이용하여 돈을 불렸습니다. 권력과 손을 잡고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로의 유전과 전통을 지켜 남보다 더 의로운 척, 외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칭찬을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자 그들은 회개하기 보다는 그분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들이 사랑하는 탐욕과 방탕과 온갖 더러운 죄를 즐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그리스도였다. 선지자였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수님을 죽여야 할이유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영접해야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요?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자기 백성이 어떻게 영접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맹인처럼 눈앞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드러내는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입술과 손과 발을 통해, 삶을 통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계시는데 그걸 못 볼 수 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진리에 눈 감게 만듭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수를 죽이려고 할까요?
예수님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9). 그들은 죄 때문에 성령이 밝히 드러내 보이신 진리를 강팍한 마음으로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경향과 행위를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며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한 그날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만물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마음에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열심을 냅니다. 그 죄의 끝은 어디까지 미칠까요?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제거하기까지 죄는 끝없이 나아갑니다. 이렇게 죄는 크든 작든 파괴적입니다.
결국 죄 때문입니다. 그 악독한 죄에 노예가 된 이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고, 침 뱉고 조롱한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앉히고 재판한 것입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에게 가장 죄 많은 사람에게 내리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이고 싶어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귀를 막으며 죄가 드러날 때 회개하기보다 끝까지 추구하려는 강렬한 죄의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권세있는 말씀으로 윽박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도 않으셨고, 이성을 잃고 분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실 때도 있었지만 묵언으로 골을 낸 것도 아니고, 뺨을 맞으셨지만 반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었지만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선지자라면 한 번 맞춰보라”며 눈을 가리고 때리고 조롱했지만, 억한 심정으로 권능을 남용하여 맞추거나 저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빗발치는 악에 대하여 조금도 악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선하게 참아 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침묵하지 않으셨을까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을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답 아닙니까? 그 대답으로 인해 사형이 확정될 것을 아셨을텐데 말입니다.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그 악독한 죄의 노예가 된 이들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여러분, 우리는 처음 죄에서 놓임 받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계속해서 죄와 싸우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우리가 악과 싸울 때 힘이 되시고 본이 되시며 승리가 되십니다. 악한 사람과 맞설 때, 악한 세상과 싸울 때, 악한 내 자아와 씨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보여주신 싸움의 정석, 씨름의 기술을 배우십시오. 그가 승리하셨기에 우리의 승리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그것이 담대하게 십자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진정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라 사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