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라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1절-14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누구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실수들을 합니다. 왜 일까요?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에게 실수는 당연한 것입니다. 혹시 내가 했었던 실수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으십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웃을 수 있는 실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실수도 있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창피했던 경험,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에게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과거를 요즘 말로 ‘흑역사’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를 ‘흑역사’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흑역사라 할 수 있는 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흑역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나름의 흑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 성경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실수와 실패로 가득한 흑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실패로 가득한 성경의 흑역사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실수투성이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계획을 성취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을 생각할 때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주권대로 그 일을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도 그러합니다. 베드로의 흑역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신의 간증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과 사도직분을 변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마무리하면서 베드로의 잘못을 언급합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지우고 싶은 과거일 수 있는 사건인데, 바울은 이 사건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기록했고 그리고 이러한 베드로의 흑역사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기록했을까요? 베드로보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우리가 보는 갈라디아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려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교훈이 무엇인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1절을 보면 오늘 본문을 왜 베드로의 흑역사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11)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만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합니다. 정확히 언제 어떤 목적으로 안디옥을 방문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베드로가 이방 선교의 중심지였던 안디옥에 온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요, 유대인의 사도요, 기둥 같이 여기는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교회라 할 수 있는 안디옥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방문 중에 베드로는 바울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물론 사도들도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합니다. 책망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런 장면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믿음 없고 연약한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에 대해서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가 어떤 인물인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것이 그럴 수 있는 일로 생각됩니다. 바울은 여러 성경을 기록했고 복음을 위해 삶을 헌신하며 복음의 진리를 강력하게 전했던 사람입니다. 철저하고 강직한 성품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실수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보면 ‘베드로가 책망 받을만한 일을 했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 쉽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게다가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일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교회가 복음집회를 위해 외부에서 강사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보다는 더 연배가 높은 분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강사님을 성도님들 앞에서 책망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 그럴 수 있겠다, 우리 목사님 힘내세요!’ 이런 생각이들까요? 책망하는 제가 오히려 더 책망을 받을 수 있는 일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상황을 지금 교회의 모습으로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책망하는 일이 서로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책망을 받는 쪽도 그렇겠지만 책망을 하는 쪽도 마음편한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책망 받을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1). 이것은 베드로가 했던 일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을까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2)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는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합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자유롭게 교제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음을 압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믿고 있었던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며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신 후에 성령님이 친히 말씀하셔서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10:28)

여전히 베드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믿었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는 모습을 베드로가 직접 보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고, 직접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임하시는 모습을 본 후에야 그렇게 한 후에야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한다는 것,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며 교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진리를 알게 된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서 자유롭게 이방인들과 함께 하며 식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 사람들은 이방인도 할례를 받으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들이 오기 전까지 베드로는 자유롭게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여기 말씀에서 함께 먹었다는 말은 한 번 같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교제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던 때에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고 그 때부터 베드로는 달라집니다.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했던 일은 이방인들과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까다로운 사람들이 오니까 잠깐 자리를 피한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나눌 수 있는 일이고 복음에 율법을 추가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복음의 진리가 도전받는 일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분리되어 이방인을 향한 사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책망 받을 만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베드로가 책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향력 때문입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 베드로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영향력이 엄청난 사도입니다. 그가 말씀을 전했을 때 수천 명이 구원을 받으며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씀으로 성도들을 돌보며 인도했고 교회에서 책임 있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이방인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거리를 두었으니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행동으로 인해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행동합니다. 심지어 바나바까지 베드로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을 가리켜 ‘외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외식이라는 말은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을 말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람들을 의식해서 잘못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외식에 빠지게 했습니다.

복음을 통해 식탁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는데 베드로의 행동으로 인해 이제 다시 이전처럼 분리되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이 두 개의 교회로,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려면, 우리와 교제하고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우리처럼 유대인이 되어야 해!‘

바울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4)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를 얻어 유대인답지 않게 살면서 이방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조용히 다룰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공개적인 일이었기에 공개적으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했던 일에 대해서 바울의 책망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습니다(14)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 있게 하려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던 베드로의 흑역사를 기록합니다.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실을 말하면서 이 책망이 갈라디아 교회와도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베드로를 향한 책망이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경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 서신을 읽으면서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 베드로가 받았던 책망을 마치 자신들을 향한 책망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복음과 사역을 인정했습니다. 친교의 악수를 나누며 복음의 하나 됨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외식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어떠합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리를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뒤 거짓 형제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듣고 진리를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릅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베드로처럼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올바르게, 똑바로 걷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은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걸어가는 것, 진리에 그 걸음을 맞춰서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때와 장소에 따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말하는 대로 그 진리에 맞추어서 똑바로 걸어가는 것, 나의 삶을 그 진리에 따라 바르게 정돈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지식으로 시작하지만 지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가 내가 가야 할 방향이 되고 내가 따라야 할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 가운데 거하며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을까요? 왜 외식하며 이방인과의 교제를 피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까? 무엇이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까?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12) 무엇 때문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려고 할 때, 우리가 똑바로 걸어가려고 할 때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진리를 따라 살기를 주저하게 만들고 타협하게 만들고 머뭇거리며 다른 것을 따르게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행하도록 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겁니다. 두려움이 그렇게 합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까? 두려워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자리를 떠났습니까? 두려워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가 말씀에 따라 순종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할까요? 두려운 것입니다. 손해가 있을까봐 두렵고, 문제를 만날까봐 두렵고,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고, 뭔가 어려움이 생길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실패가 두렵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두려움이 들어오면 우리는 정상적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상황을 실제보다 더 어렵게 보고 실제보다 더 크게 봅니다. 그래서 실수하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따르려고 할 때 무엇이 두려움이 되십니까? 소중한 것을 잃을까봐 두렵습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길까봐 두렵습니까?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생길까봐 두렵습니까? 괜히 몸이 피곤해지고 힘들어질까봐 두렵습니까?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여러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이 찾아올 때 이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 두려운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병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프면 병원 가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아픈 것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것은 더 두려운 것이 있을 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더 두려운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무능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 어려움과 고난을 겪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더 두려운 것입니까? 무엇을 더 두려워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두려워 할 만한 것인지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에 실제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얼마나 많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라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하고 또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외함으로 그분만을 두려워하고 그분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