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네가 어떻게 읽느냐
본문 : 누가복음 10장 25~37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법률적인 용어가 있기도 하고, 교회 밖에서도 사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구제 사역이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할 때 인용이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귀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비유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라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비유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 비유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라는 내용만 생각하는 것은 이 비유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30절부터 시작됩니다. 그럼 30절부터 읽으면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30절에서 37절까지만 읽으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구나!’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입니다. 이 배경을 잘 파악하는 것이 비유를 목적에 맞게 이해하는 포인트가 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비유의 시작을 25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알아야 비유의 목적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여기 어떤 율법교사가 나옵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님이 어느 정도 되는 랍비인지, 그 인기가 과장된 것은 아닌지 알아보며,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 율법교사의 질문의 의도는 잘못되었지만, 질문 자체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 꼭 가져야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세상 사람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요? ‘영생, 그런 게 어딨어!’ ‘영생은 종교에서 만들어낸 거야!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영생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원한 존재로 태어나서 영원히 삽니다.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나지만 그 후에 정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어디서 보내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영원한 천국이냐 아니면 영원한 지옥이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은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말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시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교사가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이 율법교사는 신명기 6:5절 말씀과 레위기 19:18절 말씀을 함께 말합니다. 율법에 대한 완벽한 요약, 그 핵심을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그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는데(마22:37~40) 이 율법교사도 같은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이 대답 자체는 아주 훌륭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 맞다! 그 율법을 지켜 행하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떠십니까?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십니까? ‘그래~ 맞아!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 맞습니까? 아니죠! 어? 이건 좀 이상한데 이런 생각이 드시죠?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마치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안 좋은 마음으로, ‘그래 너 고생 좀 해봐라’ 하는 마음으로,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의 거울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어서 그가 율법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율법교사가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봤다면, 자신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음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음을 알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못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 율법의 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못합니다.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합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음을, 그래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신다면 바로 자신이 그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율법에서 명하는 하나님 사랑,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유대인이 생각했던 이웃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이웃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켜야 할 사랑의 한계, 최소한의 경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을 넘어간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읽은 겁니까?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편한 대로 읽은 겁니다. 원래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는 다르게 읽은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은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울타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은 울타리 안에 둡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이웃입니다. 하지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적이고 원수로 생각합니다. 결국, 사랑할 만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그럼 누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일까요? 기본적으로 유대인들,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은 울타리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도 세리와 죄인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기준은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고,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교사는 자신이 좀 더 넓은 울타리를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려고 예수님께 이 기준에 대해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웃 사랑하기가 참 쉬워지죠?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사랑하기에 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울타리 밖으로 보내면 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맞춤식으로 율법을 읽은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웃’이라는 말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대해 율법의 원래 의미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 그가 도달할 수 없는 그 율법의 기준을 일깨워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준을 낮추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 그 원래 기준을 분명히 알려주시고, 사람들이 낮추어놓은 기준을 다시 원래대로 높이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깨닫도록, 그리고 그 기준을 자신이 온전히 순종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실제로 당시에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한 산지를 따라 길이 이어졌고, 지형적인 특징으로 큰 바위와 동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들이 많이 활동했었는데, 바위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렸던 것입니다. 아마 이 비유를 들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쉽게 공감하며 그 지역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위험한 지역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냥 가진 것만 빼앗기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을 정도까지 때린 후에 버리고 갔습니다. 여기 옷을 벗겼다는 것은 이 사람의 소유를 모두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옷도 돈이 되는 물품이기에 강도들이 뺏은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까지,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죽을 만큼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19에 신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려달라고 소리칠 힘도 없고, 소리친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고통 속에서 외로이 죽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극적으로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이라면 여기에 죽어가는 자를 충분히 도와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어떻게 합니까?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여기 ‘피하여 지나갔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맞은편으로 발길을 옮겼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분명히 그를 보았지만 그냥 피해갔습니다. 일부러 가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어서 곤경에 처한 그를 외면한 것입니다.
다음에 등장한 사람은 레위인 입니다. 이 레위인도 종교적인 일에 헌신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일반적인 업무에 종사했고, 제사장을 돕고, 성전을 관리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제사장과 똑같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의도적으로 피하여 모르척하고 지나갑니다. 두 번에 걸쳐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지만,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에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 서로 경멸하며, 원수로 지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기준에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이라는 울타리에서 저 멀리 끝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으로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고 별 감흥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그냥 봐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서운 사람이 지금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상황을 모르고 보면, 누가 봐도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지목할 사람입니다. 아니 더 빼앗아 갈 것이 남았나? 아니면 완전히 끝을 내려고 온 건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를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그에게 가까이 갑니다. 그를 보고 피해 갔던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상처를 위해 응급처치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냥 맡기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하룻밤을 함께 머무르며 그를 간호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이 모두 제공합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돌보아 주기를 부탁합니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수고와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물질을 희생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내 이웃이 누구인지, ‘너는 내 이웃이 아니야! 너는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고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잘못된 질문을 바꾸십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 질문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의 이웃인가?’ 하는 겁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내 이웃이 누구인지 구분하며 내가 사랑할 만한 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사람들을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으로 구분하며 율법을 제한시켜왔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이웃임을 율법의 원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율법의 높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도 율법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은혜 아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끝이 납니다. 율법교사가 그 후에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이제야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켰는지, 아니면 계속 자신의 고집대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영생과는 반대의 길로 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요? 그것은 이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는 율법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읽은 대로, 그가 이해한 대로, 그가 믿는 대로 산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이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의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우리가 삶에서 어떠한 태도로 이웃을 대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도와 준적이 있습니까? 나의 손해를 감수하고서, 나의 시간, 나의 수고, 나의 물질, 그 모든 것을 아주 관대하게 누군가를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뭔가를 바라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비를 베푼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이웃 사랑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그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만큼 이웃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그러한 이웃 사랑의 범위는 조금 더 넓힐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조금 더 넓혀 나의 가족,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 범위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 원수를 위해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교사가 했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율법의 기준이 불가능할 정도로 높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식으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비유에서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일은 놀랍게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못 하는 것을 이 사람이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항상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나 자신을 알잖아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힘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물론, 정말 그렇게 할 때도 있죠! 하지만 항상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아니, 이웃에게까지 가기 전에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잘 안 됩니다. 내 배우자를 항상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합니까? 때로 배우자를 통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아니라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하나님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약 영생이 나의 노력으로 행함으로 얻어야 한다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셨습니다. 자비로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치 강도를 만나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자와 같았던 우리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행한 것과 관계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이제는 우리를 바꿉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을 때 율법을 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저주입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 말씀을 보십시오. 생명을 가진 자로서 보면 어떻습니까? 생명이 있을 때 율법을 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율법의 참 목적과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허락하신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이웃이 되겠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본을 따라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을 비추어서 우리가 어떤 자인지 제대로 보시고, 그런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넘치는 은혜를 찾으시고 그 은혜를 제대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위주로, 내 편한 대로, 내 기준대로 읽으며, 나 정도면 괜찮다고, 나는 자격 있는 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와 같이 되는 겁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착각 속에서 사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 있는 그런 교만함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는 질문 앞에 스스로를 점검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며 그 은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은혜를 나누며,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