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네가 어디 있느냐
본문: 창세기 3장 1-10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우리가 살펴볼 질문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에게 하셨던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면서 했던 질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아무리 찾아도 아담이 보이지 않으니까,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그만 나와라‘ 이런 의도로 말씀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아담이 있는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시려고 하신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아주 의미 있는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네? 저는 지금 유평교회에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일을 맞이해서 이렇게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집에서 쉴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수고해서 여기까지 와서 이곳에 앉아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몸이 여기 있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당신의 신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헌신과 열정은 어디쯤에 있습니까?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됩니까? 당신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습니까? 혹시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다른 것들이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이 질문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시는 말씀이 되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머물러 있는지, 내가 지금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계신 곳,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괜찮습니까? 그곳에서 한 걸음 더 주님 가까이 나아가야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있는 보안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위잉위잉’ 경보음이 울리면서 본능적으로 나를 방어하기 위한 생각들과 변명들이 나옵니다. 아담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질문하셨을 때, 아내에게 책임을 넘기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놀라운 능력, 초능력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에요. 제 나름의 어려운 상황이 있고, 그럴 만한 일이 있어요, 남들 모르는 상처가 있어요!’ ‘누가 모르나요? 다 알아요. 그냥 시간이 필요해요. 언젠가 나아지겠죠.’
네!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나름의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더디지만 그렇게 해서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 멀어진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식어버린 주님을 향한 열정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잠자고 있는 나의 신앙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하나님을 피하고 있다면, 거리를 두고 있다면, 그리고 그런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면,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것도 바른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핑계일 뿐입니다. 내 욕심대로 하겠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더 나아갈 수 있는데 왜 자꾸 뒤로 물러나는 걸까요? 왜 여기서 그냥 주저앉으려고 하는 걸까요? 왜 더 갈망하지 않는 걸까요? 왜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미루고 포기하는 걸까요?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을 우리 쪽에서 생각하면 이런 말과 같습니다. ‘너는 지금 나와 좋은 관계 속에 거하고 있느냐?’
우리가 경험하는 사람 사이의 문제들, 내 삶에 나타나는 좋지 않는 모습들, 그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멀리하셨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피하셨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하고, 두려워하고, 숨어버립니다.
본문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넘어가면, 지금 내가 있는 곳과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서로 맞지 않게 됩니다. 다른 곳에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어겼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본문의 사건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사건 번호 제1호, 이 사건은 인류 최초의 범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완벽한 환경에서, 부족함이 전혀 없는 곳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사건 일시, 아주 옛날입니다.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건 장소, 에덴동산 중앙 어딘가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사건 내용,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사건 경위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 질문했고, 여자는 그 질문에 답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온전하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뱀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거짓말을 했고, 여자는 거짓말에 넘어가 열매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열매를 먹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남편에게 주어서 공범으로 만듭니다.
어찌되었든 아담은 스스로 죄를 선택했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죄의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를 범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끄러움입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옵니다. 수치심을 줍니다. 열매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의 처음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얻은 것은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의상’이 개발되었습니다. 뱀이 말한 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밝아졌습니다. 가장 먼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벌거벗음이었습니다. 3장이 시작되기 전,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2:25). 하지만 죄는 사람에게 몰라도 되는 것을 알게 했고 부끄러움을 주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둘째는 두려움입니다. 죄는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숨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
모든 것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두시고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사람은 그 사랑의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몸을 숨기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을 가장 자상한 분에서 가장 두려운 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셔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자처한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셋째는 분리입니다. 죄는 분리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온 핵심적인 결과입니다. 죄는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죄로 인해 분리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자가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분리를 가져왔습니다. 죄의 결과로 나타난 분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관계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가장 친밀했던 부부 관계가 깨어질 뿐만 아니라 4장에서는 죄가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처럼 죄의 근본적인 모습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죄의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유혹에서 멈추지 않고, 유혹이 죄로 넘어가면 문제가 됩니다. 그 죄에 대한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이 다가왔을 때, 그 유혹을 잘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혹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유혹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뱀은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에게 다가와 교묘하게 자극적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니?’
뱀의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 세상의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금지하신 단 하나 그 하나를 주목하게 만듭니다. 유혹은 이렇게 다가옵니다. 이미 가지고 누리고 있는 좋은 것, 백 가지보다 지금 나에게 없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자극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하와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하와는 뱀의 질문에 답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각종’이란 말을 빼고, 대신 ‘만지지도 말라’라는 말을 추가합니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하고 바꿉니다. 하와는 불순종에 따른 죽음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하와의 마음을 확인한 뱀은 이제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바꾸어버립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본문에서 하나님 말씀이 세 번이나 인용되고 있지만, 한 번도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잘못된 의도로 사용되었고, 다시 그 말씀은 변형되어서 언급되었고, 마지막에는 노골적으로 완전히 부인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뱀은 하나님을 매우 이기적인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열매를 금하신거라고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유혹은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교묘하게 바꾸거나 의심의 씨앗을 심어두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심의 씨앗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말씀과 반대되는 일을 하기까지 자랍니다.
그래서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오해하게 만들고 합당치 않은 것을 주목하게 합니다. 허락하신 많은 것보다 금지된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망각하고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유혹은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겁니다.
유혹을 잘 대처하기 위해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혹은 악한 세력, 마귀가 전 인류를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겁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사기를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혹이라는 이름의 사기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피해자가 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왜 사기를 당할까요? 뭔가 솔깃한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나쁜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큰 이득이 되고 남는 것이 있다고 꼬드기기 때문에 속는 겁니다. 하지만 남는 것은 후회와 손해뿐입니다. 결코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기꾼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들, 우리에게 허락된 가치 있는 것들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흠집을 내고, 문제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럼 마귀로부터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와처럼 대충 알고 정작 중요할 때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억하고 제대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어떠한 유혹이 온다하더라도, 어떠한 사기 공세가 내 앞에 펼쳐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어떤 관계이든지 신뢰가 없으면 그 관계가 건강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거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합니다.
때로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일 때 우리는 유혹에 더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 조심하며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유혹이 올 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사기 치지마라!’ 여러 가지 유혹이 찾아올 때, 그 유혹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사기 치지마라! 난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사건이 종료되었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절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타락 속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원시 복음’이라고 하는데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수치를 가릴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당시 아담에게 가죽옷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의 생명을 취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은 지금까지 희생이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죄를 범한 나를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받으셨고, 죄의 결과를 바꾸셨습니다. 그 모든 결과를 뒤집으셨습니다.
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부끄러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셨습니다. 나의 수치를 대신 짊어지시고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나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고, 그 보혈로 나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둘째 두려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의 두려움을 없애주셨습니다. 이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으로 피하거나 숨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분리,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케 하셨습니다. 죽음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야 했던 나에게 생명 주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유혹을 거절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반응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냥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가장 가치 있는 삶입니다. 유혹 앞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 말씀에 따라 거절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숨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은 분들은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합당한 위치인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옮겨야 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을 통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그 자리가 아니다, 조금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너라!”
여러 가지 일들로 너무 바쁘고 분주하게 지내고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네가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수고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누구를 위한 것이냐?”
지금 유혹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왜 합당치 않은 곳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그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어서 그곳에서 나오너라.“
지금 방황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에서 망설이고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그만 방황하고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왜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지고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느냐, 나에게 와서 그 짐을 내려놓아라, 내가 너에게 안식을 허락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