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본문: 시편 82편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궁금해 했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했다. 예수님을 엘리야, 선지자,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은 일부러 속이려 하거나 오해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그대로, 듣는 그대로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다. 어느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물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미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요 10:25–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행한 여러 선한 일들 중에 어떤 일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하는지 물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답했다.
요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셨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신의 아들’, 즉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방 민족들이야 왕들이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칭하면서 신의 자리에 오르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이 놀랍다.
요 1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게 무슨 말일까? 우리말 번역에서는 신과 하나님으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모두 같은 단어다. 예수님은 사람이 신, 즉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일단 예수님의 논리를 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은 구약 성경이고 인용하신 말씀은 시편 82:6이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부분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들이 신(하나님)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시편의 맥락을 보면 이 사람들은 선지자들은 아니다. 이들은 재판을 하는 사람들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불의한 재판관들이다.
‘재판관’은 당시 사회에서는 왕과 제사장을 비롯해서 신분이 높은 권력자들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로서 ‘신’이라고 성경이 지칭한 것에 주목하셨다. 그리고 절대 폐할 수 없는 성경에서 그런 방식으로 ‘신’(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예수님 자신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문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즉 진짜 하나님의 아들과 그렇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구분하셨다. 즉, 왕이나 제사장 같은 권세자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수는 있지만,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사람에게 신이라는 단어가 어떤 면에서는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셨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권력자들은 자신을 “신”,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들의 의도는 그들의 본질(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틀린 말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어떤 면에 있어서 그들은 ‘신’이라 불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면에서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인이라는 면에서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받아서 하나님의 대변인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펼쳐 보여야할 책임과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런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행하시고 말하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서 13장 1-7절도 정확하게 이런 원리에 기초해 했다. 바울은 먼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절)고 선포한 후에 그렇기 때문에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2절)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4절)라고 표현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역할을 권세자들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그 역할에 충성하느냐는 다음 문제이고, 본질적인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에게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어색하긴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성경의 다른 용례를 보면 당시에는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출애굽기 22장 8-9절을 보면 “재판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엘로힘으로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단어다. 하지만 맥락 상 거기서의 엘로힘은 재판장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어색하지만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일하는 자들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거부감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편 82편은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고, 예수님도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던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즉 그런 면에서 권세를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 합당한 존중과 순종의 태도를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은 가져야 한다. 그리고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의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결정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확히 반대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결정하고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 권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 17:18-20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왕들은 왕이 되면 율법서를 필사하여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지 않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르게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처럼 통치하는 것이 바로 권세자의 책임인 것이다. 무거운 책임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권을 주신만큼 더 큰 책임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런 배경이 되는 원리 위에서 시편 82편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그에 따른 책임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하는 내용을 기록했다. 일차적으로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적용되지만,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먼저 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살펴 보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배경(1절)
시편 82편은 1절과 8절(혹은 6-8절)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으로 볼 수도 있고, 전체를 아삽의 기도로 볼 수도 있다. 어느쪽으로 보든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 의미있는 차이는 없다.
먼저 1절은 어떻게 본론인 2-7절과 같은 책망과 경고가 가능한지에 대한 배경이 제시된다. 바로 하나님이 재판관들의 재판관이시라는 사실이다.
시 82: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세상의 모든 재판관(권세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서 계시다. 그들에게서 무슨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을 재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권세를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권세를 주신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8절에서 분명히 밝힌다. 바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나라, 크든지 작든지 모든 나라를 하나님이 소유하신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나라, 모든 권세의 주권자이시고 재판장인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사건이 다니엘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섬기던 신은 완전히 패배한 것이다. 더 이상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은 이방 왕들에게 보여 주셨다.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왕을 폐하고 세우는 일이 하나님께 속한 일임을 다니엘은 선포했고, 느부갓네살 왕은 말하지도 않은 꿈을 드러내고 해석까지 한 다니엘의 지혜를 보며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라고 고백했다(단 2:47).
이 말 뿐이었던 고백을 온 맘을 다해 진심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일을 느부갓네살은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바벨론 성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그의 힘으로 이룬 영광이라고 교만하게 자랑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성 없는 짐승처럼 만드셔서 산과 들에서 살게하셨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셨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단 4:34–35 …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절대 왕정의 군주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된 것은 그들이 믿던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권세를 주셨던 것이고, 다른 통치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궁극적인 통치자로서 그가 세운 통치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재판관들의 재판관, 통치자들의 통치자, 왕들의 왕이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서셔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안타깝지만 좋은 말씀은 아니다.
책망(2-4절)
시 82: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언제까지”라는 표현은 고난 중에서 탄식하는 시편에서 우리가 많이 봤던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탄식하신다.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이 그 권세를 하나님이 원하신 바와는 다르게 잘못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낯을 봤다. 즉 편애했다는 말(편파)이다. 악한 자들을 편애하는 이유는 한가지 뿐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들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재판관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대로 불공평한 판단을 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모습은 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시 82:3–4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3절의 말씀은 가난한 자와 고아에게 유리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출애굽기 23:3, 6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두둔하거나 정의를 굽게 해서는 안될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편애가 아니라 공의로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이고 하나님은 재판관들이 그렇게 해야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난한 자, 고아, 곤란한 자, 빈궁한 자로 표현된 사회적 약자들은 고대 사회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그런 공의를 누릴 수 없었다. 약자들이 공의를 누리지 못하는 것 자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사는 획일적인 평등의 사회는 아니었다. 다만 약자들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차별 받지 않고 억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였다.
타락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되든 상관없이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 절대적으로 많이 가진 자들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을 착취했다. 남자는 여자를 힘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기 아래 굴복시키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 부자는 가난한 자로 배를 불렸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한 자의 등골을 빨아 먹었다. 절대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타락 이후의 세상에 권세를 세우신 이유는 바로 이런 악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 좋은 예를 볼 수 있는 것이 욥이다. 욥은 족장 시대의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욥기의 설명을 보면 ‘권세자’(가진 자)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이나 부로 공의를 실천하기 위해 애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욥 29:12–17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욥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시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서 살았던 것이다. 로마서 13:4도 동일한 원리를 찾을 수 있다.
롬 13: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권세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사회의 악을 억제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권세을 주신(권세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신 10:17–18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이런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는 하나님과 같이 그 권세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은 타락했던 유다를 바로 세우기 위해 중요한 성읍에 재판관을 두면서 이렇게 명령했다.
대하 19:6–7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7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세우시며 하나님과 같은 공의와 긍휼로 세상을 다스리길 원하신다. 권세를 가진 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탄식하시고 그들을 책망하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강력하게 경고하신다.
경고(5-7절)
시 82:5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부인하며 흑암 중에 왕래하면, 즉 계속해서 죄악 가운데 행한다면 그들로 인해 땅의 모든 터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가 요동치게 된다는 말이다. 받은 힘이 큰만큼 그 영향력도 큰 것이다.
시편 82편이 기록된 정확한 때는 알기 어렵지만, 유다와 이스라엘 왕국이 정확히 이렇게 멸망했다. 구약 예언서들을 보면 우상 숭배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죄 중 하나가 바로 ‘불의’다.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은 목자가 아니라 늑대가 되어 자기 배만 불리고 있었다(겔 34:1-3).
미 3:1–3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2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 3:9–12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10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결국 공의와 긍휼을 행하지 않는 통치자들로 인해서 유다 사회의 터가 흔들렸고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이다. 사회만 그렇게 될 것이 아니다. 권세자들 자신도 그런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시 82:6–7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이들은 신들이라고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지 못했다.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그들의 불의와 무자비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권세자의 자리에서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죽음으로 그들이 쌓은 권세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저 사람일 뿐임을 알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두로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 28:6–9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7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9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공의와 긍휼을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죄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그들도 단지 연약한 사람일 뿐임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권세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다.
호소(8절)
지금까지 말씀은 원리이지 시편 기자가 보고 있던 현실은 아니다. 그가 보고 있던 현실은 여전히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자들이 불공평한 판단을 하고 악인의 낯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약자들에게 공의가 베풀어지지 않는 사회였다. 그래서 그는 기도로 시편을 마무리한다.
시 82:8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셨다(요 5:22). 그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계시록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모든 악을 소멸하시고 완전한 공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는 자들의 기도가 이것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이 기도를 신약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도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크게 두 가지 교훈을 나누길 원한다.
기도하자.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뜻을 시행해야 하는 자들이 온전하지 않아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그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권세자들을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가 있고 책임이 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여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의 마땅한 태도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마땅하지만 특별히 권세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딤전 2:1-2).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음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나타내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살아가자. 오늘 말씀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적용되지만,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고, 사실 우리 모두는 크게 작게 어느 정도의 권위(힘)를 부여 받았다. 즉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우리 삶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과 같이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과 같은 공의와 긍휼을 나타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의 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권세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의 통치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언젠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이라면 나의 아내를, 나의 자녀를, 나의 후배를, 나의 학생들을, 혹은 가난한 자를, 억울한 자를, 도움이 필요한 자를 어떻게 대하셨을지 고민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 끝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것을 더욱 거절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었다. 즉 예수님의 삶을 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권리는 모두 내려놓으시고 온전히 남을 위해 사셨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자로 사셨다. 가지신 능력으로는 병자를 고치셨고 그분의 지혜로는 약자를 대변하셨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의 삶도 하나님을 어떤 왜곡됨도 없이 드러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살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에 있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재판관들이 신이라 불렸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같은 공의와 긍휼의 삶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는 자녀들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