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본문: 누가복음 14장 25~35절
설교자: 최종혁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어떤 공로를 세워야 하거나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음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행한 일의 당연한 대가로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이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너졌을 때 신앙인들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부르짖으며 그들의 남은 삶을 이 진리를 지키는데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올해 우리가 500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 단순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해서, 이 귀한 진리를 오용하고 남용했습니다.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 간다던데?”라고 하며 ‘값싼 구원’을 만들어 냈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맘대로 살아도 하늘나라에 간다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포함해서) 있는 모습 그대로” 가기만 하면 우리를 받아주고, 또 우리가 영접해 주기만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쉬운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필요’ 때문에 내 삶에 들어오신 분이시고, 내가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내 삶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된 것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은 잘 살면 좋지만, 상을 주신다고 하니 격려하면 좋지만 그것이 구원과 직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약간은 오해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물에 빠져서 죽어갈 때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면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에게 큰 감사를 표할 것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감사하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거나 명절 때마다 선물을 들고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에게 “이제 저는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구해준 사람도 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아 진정한 삶,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강조합니다. 구원받은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새생명 가운데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입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구원’에 함께 있습니다. 이 중 어느 것은 받고 어느 것은 받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거듭나지는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새생명을 얻었지만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변화를 가져오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제자됨’도 사실 같은 말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도 구원, 거듭남, 영생을 얻음, 예수님을 영접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만 읽어 봐도 누가는 구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영생을 얻는 것을 제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강조하는 부분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1. 제자됨의 의미를 생각하라
2. 제자됨의 비용을 계산하라
3. 제자됨의 특징을 기억하라
1. 제자됨의 의미를 생각하라(25~27절)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25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중입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누가는 수많은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무리(들)이라고 표현해서 정말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혹은 바리새인들 같은 특정 그룹을 향해서 말씀하신 경우도 많았지만, 여기서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 무리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하실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예수님은 돌이키셔서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을 보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그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그동안 고생했던 것이 기쁘고 뿌듯하게 여겨지셨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들의 인기를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기를 위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말씀을 하시거나 하고자 하는 말씀을 하지 않은 적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기를 원하셨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은 예수님은 하십니다.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 참된 제자는 어떤 자들인지를 말씀하시며 듣는 자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 제자는 배우는 자입니다. 오늘날의 ‘학생’의 의미이지만 당시의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오늘날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다니며 스승에게 지혜와 지식을 배울 뿐 아니라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 삶을 본으로 삼는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는 스승을 닮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말씀하신 바 있었습니다(9:23~27; 9:57~62; 18:24~30)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26, 27절에서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을 반복하십니다. 특별히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지불해야할 대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제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일까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절) “내게 오는 자”, “나를 따르는 자”는 제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참된 제자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마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나는 예수님의 제자야’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혹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오지 않는 사람이 제자가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온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일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미워하지” 이 말이 마음에 걸리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미워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에서의 증오나 분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30] 그리하여 야곱은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으며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고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다. [31]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으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였다.(창 29:30-31, 바른성경)”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레아가 미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슷한 말씀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즉, 무엇을 더 사랑하느냐에 따라 덜 사랑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실제로 우리도 무언가를 정말 사랑하면 그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다른 무언가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배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아기는 엄마한테 가려고 하는데 제가 막고 있으면 저를 밀치고 갑니다. 아빠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가정이 파탄 나더라도 반드시 교회는 나와야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집에 돌봄이 필요한 자녀가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교회에 오거나 교회 일 해야 하니까 믿지 않는 남편은 밥을 굶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지금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을 더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쟁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2:51). 그런 분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가족에게서 소외당하고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보다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듣는 자들에게 충격적인 도전을 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심지어 네 부모, 처자, 형제, 자매보다 먼저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악감정이 있어서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 이들이기 때문에 언급하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정말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까지 거명하십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먼저, 그리고 나머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뭐가 그리 빡빡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가족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다 사랑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사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첫째로, 이 제자도의 우선순위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처음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는 이런 분명한 우선순위가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둘 혹은 그 이상을 다 동일하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시 1세기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에 대해 다른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럴 때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내가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정직하기를 원하시는데, 가족 중 누구는 내가 거짓말을 해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예수님보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그런 우선순위는 필연적으로 고난을 동반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 무엇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평안, 안정, 행복, 안전보다 예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에 감수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네 십자가를 어디 있느냐고 했을 때 없다고 말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자를 제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최소한 이런 자세 없이 제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우선순위, 그런 마음의 자세, 태도, 그런 동기, 열정, 용기를 가지고 있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는 가겠지만, 저는 사랑하던 것을 계속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해 주셔서 감사는 드리겠지만,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당황스럽습니다. 값없이 오라고 하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맞을까요?
네,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맞습니다. 여기서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복해서 같은 말씀을 하셨고, 사람들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예수님을 따랐고, 누군가는 포기했을 뿐입니다. 각자의 계산에 따라서 그들은 결정했습니다. 예수님도 계산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2. 제자됨의 비용을 계산하라(28~33절)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28절) “망대”는 집이나 포도원(과수원)을 지키기 위한 건물, 혹은 곡물을 두기 위한 창고를 말합니다. 건물을 짓기 전에 계산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진 돈을 가지고 마치려면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어느 정도의 크기로 망대를 지어야 하는지 등을 계산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건물을 다 짓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9~30절)” 이것은 단지 내가 계획했던 것을 못 끝내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명예와 평판을 중요시하는 문화에 있어서 정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결과를 생각한다면 망대를 세우기 전에 신중하게 하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연한 상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망대 하나를 지어도 사람은 이렇게 충분히 계산해보고 계획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결과를 예상해 봅니다. 하물며 영원의 일을 결정하는 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아무런 계산 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31절)” 좋은 왕이라면 전쟁을 하기 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계산해 볼 것입니다. 나의 병력이 얼마이고 적군의 병력이 얼마인지 계산해 볼 것입니다. 병력이 부족하다면, 우리가 가진 무기는 어떤지, 군량은 어떤지, 상황에서의 이점은 없는지 등을 면밀히 계산해 볼 것입니다. 그래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항복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2절)” 이 선택은 늦기 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화친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화친해야 합니다.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치밀하게 계산하고 지혜롭게 선택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첫 번째 비유가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말했다면, 두 번째 비유는 비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제자됨의 양면을 보여줍니다. 우리 편에서 생각해 보면 제자됨은 나의 결정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잘 계산해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비유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제자됨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계산해 보십시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절대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대등하게 싸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단 하나의 선택은 항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산하라고 하시지만,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답을 많은 사람들은 정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도 “먼저 앉아” 생각하고, 임금도 “먼저 앉아” 계산합니다. 결정을 하기에 앞서 앉아서 차분하게 계산해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간의 감정에 따라서 결정하거나 그냥 분위기가 그러니까, 대세가 그러니까 나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했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는 어디에도 쉴 곳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하나님을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부자 관리에게 예수님은 있는 것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관리는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먼저 앉아서 생각해보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에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착각하게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내 삶에 무엇 하나를 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 무엇 하나를 더 얹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버리지” 다른 곳에서는 ‘작별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작별하면 사람이나 물건은 거기 두고 나는 떠납니다. 무엇이든지 나에게 속한 것, 나에게 속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자리를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사실 본래 예수님의 자리였던 곳에 들어와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밀어내고 넣어놓았던 모든 것, 부, 명예, 나의 가족, 행복, 꿈,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다시 그 자리에 앉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원래 왕이시고 원래 주인이십니다. 단지 내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제자됨입니다. 이것이 제자됨의 핵심이고 구원받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죄인인 인간이 끝까지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좋아합니다. 부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고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편하기를 원하고 즐겁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더해서 죽어서 천국에도 가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얻든지 저것을 가지고 이것을 가지지 못하든지 입니다.
종교인은 많은데 진정한 신앙인은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인은 버리지 않고 더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불편은 생기고 제약은 생기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일요일에 교회 좀 나가고 헌금 좀 하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하고 만나서 노는 것 대신에 교회 사람들하고 만나서 노는 것도 괜찮습니다. 내 삶에 죄가 있지만 누구나 완전한 사람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 굳이 죄책감을 가지거나 죄와 싸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생각해 보면 나름 교회에서 봉사도 잘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종교인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 예수님의 제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과 작별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나도 싫어하게 됩니다. 내 삶에 죄가 있는 것을 그냥 당연하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죄와 싸우고 싶고 이기기를 원하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합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싫습니다. 나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밉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단순히 교회 분위기가 좋아서, 교회 사람들이 좋아서, 교회 나오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단순히 예수님은 사랑이셔서 다 받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들어주시니까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앉아서 ‘계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애매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애매하게 생각하지 말고 모호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내가 따르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에 분명히 응답해야 합니다.
3. 제자됨의 특징을 기억하라(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4절) ”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 모로 유용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으면, 다른 말로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특징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그것을 짜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35절)” 짜지 않은 소금, 소금으로서의 특징이 없는 소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음식이 아닌 땅에다가 섞으면 도움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름에 섞으면 도움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그냥 버려질 뿐, 다른 어떤 용도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일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진짜 소금일 수 없는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비유입니다. 소금으로서의 특징이 없는 소금은 겉보기에는 소금과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버려집니다. 제자로서의 특징이 없는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에는 제자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의 특징이 있어야 소금인 것처럼 제자의 특징이 있어야 제자입니다.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보다 다른 무엇보다 스승 되신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 때문에 다른 것을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새겨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냥 듣고 흘리지 말고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정말 내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인지 생각해 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자라면 지금 내가 온전히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도전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말을 3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에 무언가를 얹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님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반만 예수님을 향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담가두고, 다른 발은 그리스도에게 담그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할까요?
우리의 계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지나친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계산해 보니 망대는 세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다른 임금과의 싸움은 아직 멀리 있으니까 현실감이 없고, 진짜 2만이 오는지 2천이 오는지 내가 보기 전까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언가를 바꾸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은 손해가 많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돈만 계산의 대상은 아닙니다. 무엇이든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예수님을 믿으면 잃을게 많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으로 손해를 보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찾으셨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법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손해라고 하십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나 자신까지 예수님 다음으로 할 때 더 나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이들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 말고도 영적으로 수많은 사랑의 관계를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눅 8:21). 나를 따르기 위해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큰 영광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하셨고, 이 땅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것, 영원한 것, 썩지 않을 것, 다하지 않을 것, 진정한 기쁨과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앉아 계산해보십시오. 우리의 계산이 맞는지, 예수님의 계산이 맞는지 말입니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우리는 보이는 것이 가치 있어 보여서 보이는 것만 계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깎아 내립니다. 하지만 진짜 가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에게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이 그 초대를 거절했던 이유는 ,그들이 지금 누리는 것을 포기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제자의 삶을 살고자 고백한 분들은, 참된 제자의 모습이 어떤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는 ‘하늘나라’이지 ‘지상 천국’이 아닙니다. 혹시 지상 천국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십시오. 어쩌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내가 지상 천국에서 살 것처럼 살고 있어서 일지 모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진정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그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