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눈을 밝혀 알게 하소서
본문: 에베소서 1장 15-23절
설교자: 최종혁
에베소서 1장은 인사말을 제외하면 두 문장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바울은 3-14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했고, 15-23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든 자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또한 그에 근거하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3-14절의 찬양을 통해 우리는 믿는 자가 받은 모든 신령한 복과 그 목적을 배웠다.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자 하나님의 속량,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전과는 다른 삶, 차이가 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한다(“이로 말미암아”).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그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렇기 하기 위해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를 이 기도에서 알 수 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 구원의 기쁨은 과거의 일로서 기억만 할 수 있고 천국의 기쁨은 미래의 일이어서 소망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실제로 현재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도 교회는 잘 나가고 헌금도 빠지지 않고 하려고 노력한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사역에도 참여하면서 나름 보람도 느낀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하니 조금씩이라고 그렇게 하려고 하고 기도도 필요하다고 하니 노력은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맞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순종은 책임과 의무로만 느껴진다. 그런 순종이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면 죄책감이 든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로 인해 기쁨도 누렸는데, 그 이후의 삶은 뭔가 내가 알아서 잘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내 삶을 솔직히 말하자면 과거의 기쁨을 어떻게든 기억하면서 다가올 천국을 어떻게든 바라는 가운데 현재를 어떻게든 견디고 있는 삶인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싶다가도 또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게 된다.
근데, 이게 정말 맞는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평안이 정말 이런 것일까? 구원은 은혜로 받고 내가 할 것이 전혀 없지만, 그 후의 삶은 나에게 달려 있어서 내가 어떻게든 잘 살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예수님께서 속량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이제 다 하신거고 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실제적인 이 땅에서의 삶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일까?
오늘 본문의 바울의 기도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이 어떻게든 힘을 짜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구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기를 구했다. 그것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먼저 15-16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바울의 확신과 감사를 볼 수 있다.
15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바울은 자신의 기도 시간에 계속해서 에베소 교회를 기억하며 기도했다고 말한다. 그 기도는 먼저는 “감사”였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했던 이유는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참된 성도로서의 증거를 분명히 드러냈다는 말이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 – 먼저 이들의 믿음은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표현은 세가지 측면에서 이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증언한다.
첫째로 믿음의 대상이 올발랐다. 그들은 참되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었다. 아무리 진실한 믿음이라도 그 대상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다(요 14:6)/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둘째로 믿음의 내용이 올발랐다. 때로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내용이 잘못된 경우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믿지만 주인으로는 믿지 않는 경우가 있다. 믿음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면서 믿을 수는 없다.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서는 괜찮지만, 내 삶에 관여하시는 분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을 구원자이시며 주인으로 믿었다.
셋째로 믿음의 결과가 올발랐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믿음에 대해서 들었다는 말은 이들이 지금 믿고 구원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이 참된 믿음을 계속해서 지켜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렇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은 참된 믿음의 증거다. 특히나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했었던 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에베소는 그 속한 지역 자체만 생각해 봐도 많은 유혹과 시험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 안과 밖에서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그들을 무너뜨리려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 속에서 에베소 교회가 계속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분명한 참된 믿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에 대해서도 들었다. 형제 사랑은 요한 사도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참된 신자의 열매다. 야고보가 강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믿음은 행위로서 입증되는데, 그 행위가 바로 사랑의 행위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모든 성도” – 특히 바울은 이 사랑이 “모든 성도”를 향했다는 것도 들었다. 에베소 교회가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고 또한 다른 교회에 사랑을 베풀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베소는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 서쪽 교회들의 모교회와 같은 역할을 했었는데, 그런 교회들을 사랑으로 잘 돌아보았을 것이다. 이들은 차별없는 사랑을 모두에게 베풀었다.
여기서 차별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성도를 동일하게 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예수님도 주변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12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특별하게 대하셨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을 차별적으로 대하신다고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모두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겨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셨다.
에베소 성도들의 사랑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 안에서 차별없이 서로를 돌보고 하나되기 위해 애쓰는 사랑이 그들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에베소의 믿음과 사랑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삶이었고, 그것은 강력하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예수님의 속량하심으로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임을 증명했다.
이것으로 인해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그칠 수가 없었다. 전도의 열매를 보게 될 때 성도라면 누구나 이렇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그 과정에 얼마나 관여 했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 계속되는 전도 여행을 통해 많은 교회를 시작하였지만, 에베소는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에베소의 장로들을 특별히 불러 그들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 경고하며 그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겸손과 눈물로 가르치고 섬긴 것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었다. 그리고 지금 감옥에서 그들의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그 입에서 먼저 나왔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진다. 왜냐면 지금까지 그들이 잘 해 왔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신앙의 어려움을 지금 겪는 성도가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뜨거웠다고 말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살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면서 그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았던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처럼 말이다. 뜨거운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을 수 있다. 지금 그렇게 열매를 맺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그렇게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이 기도는 그렇게 살기 원하는 우리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앞선 바울의 찬양에서 삼위의 하나님이 모두 드러났던 것처럼, 바울의 이 기도에도 삼위의 하나님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영광의 아버지께로 향하지만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진다. 그래서 마치 구약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불렀던 것처럼, 여기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궁극적으로는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인데,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표현하였다.
“지혜와 계시의 영” – “성령”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과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바울은 이미 믿는 자에 대한 성령의 인치심을 강조했기 때문에 성령을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야 11:2에서 성령을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표현하고, 예수님도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표현하시면서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었다(요 14:17, 26). 즉,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여 알게 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이렇게 바울의 기도는 삼위의 하나님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데 삼위의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셨던 것처럼 그들이 구원 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기도의 내용이다. 바울은 다른 무엇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 알기’를 구했다. 물론, 에베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더욱 알아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광의 아버지” – 영광은 피조물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따라서 믿는 자가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내 생각, 말, 행동, 결정 등 모든 것을 통하여 나타내고 높이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삶의 근본적인 동력이 된다. 어떤 물건을 판다고 생각해 보자. 정말 좋은 약이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약이라고 해보자. 사기를 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약에 대해서 잘 알면 알수록 어떻게 이 약을 설명하고 광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더 잘 팔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약에 대한 확신이 생겨서 더 사명감을 가지고 팔게 될 것이다. 약을 사는 사람을 보면 기쁠 것이다. 사지 않는 사람을 보면 답답할 것이다. 약을 먹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본다면 어떨까? 더 사명감에 불타오를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삶의 관계가 그렇다.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가 이 삶을 확신 가운데,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의 시작과 19절의 끝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바꿔서 말했다. 즉, 구원 받은 자로서 우리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워진 우리 마음의 눈(영안)을 밝혀서 보고 알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보고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볼 수 있어야 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더 큰 확신과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바울은 18-19절에서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기업, 그리고 하나님의 힘이다.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의 눈을 밝혀 꼭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한 하나님의 부르심, 기업, 힘은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적인 측면이 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 여기서 소망은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의 소망을 의미한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부르실 때 계획하신 것, 즉 목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기도에는 과거적인 측면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빛으로 부르셨다. 세상 가운데서 교회로 부르셨다. 내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 이유없이 목적없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일단 불러놓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신 것도 아니다. ‘일단 부르기는 했는데 부르고 보니 별로 쓸모가 없네’ 이러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먼저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릴 부르신 것을 하나님은 절대 후회하지 않으신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내가 하나님께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온 우주에서 가장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구체적인 부르심의 목적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의 고민이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정리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거룩함으로, 자유와 평강으로, 고난과 영광으로 부르셨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서로서로 교제를 나누고, 현재 당하는 고난을 넘어 언젠가 나타나게 될 영광을 바라보는 그런 삶으로의 부르심이다(존 스토트, BST, 69).
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이다. 구원은 그저 과거에 있었던 좋았던 추억이 아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고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 목적은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럽다. 감히 우리가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목적으로 부르셨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런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그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고, 우리도 그렇게 구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지금의 나를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 이 표현은 분명 미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이 있다. 이 기업은 영광스럽고 풍성하다. 부끄러운 기업이 아니다. 부족해서 서로 싸워야할 일도 없다.
이 기업은 너무나 확실해서 14절에서는 성령님께서 이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고 표현했다(벧전 1:4). 절대로 잃지 않을 영원한 기업이 믿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상급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기업이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으로 인해 받게 되는 기업이다. 성도는 어떤 신분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자녀다. 입양된 자녀로서 본래 자녀와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상속하는지 아는가?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래서 믿는 자는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딤후 2:12). 이것이 어떤 모습일지 솔직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다 알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표현도 못하겠다. 정말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믿는 자에게 약속된 확실한 그 기업은 영광스럽고 풍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없는 자처럼 살 필요가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고백이며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의 확실한 미래는 현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 앞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동력을 얻었다면,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현재에 대해서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힘을 에베소 성도들이 밝히 알기를 기도한다.
바울은 과거와 미래에 해당되는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현재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힘’에 대해서는 한 구절을 사용해서 설명했고, 사실 20절부터 이어지는 말씀도 이 힘이 어떤 힘인지에 대한 긴 추가 설명이다. 그만큼 바울은 이 힘을 에베소의 성도들이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부담만 가지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비록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되는 경우들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것이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기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기를 구하고 있지 않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이미 가진 힘을 깨닫기를 구하고 있다. 그 힘이 ‘지극히 큼’을 알게 되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힘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바울은 반복되는 유사한 표현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지극히 크다.
우리말의 ‘지극히’는 끝에 다다랐다는 의미로서 ‘더할 나위 없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무언가를 ‘뛰어 넘는’, ‘초월하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듯하지만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가 말씀에 따라 순종과 예배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힘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좌절하고 무력해진다. 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그렇게 연약하게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산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서 더할 나위 없이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바울은 그 능력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해 준다.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하나씩 설명하자면 또 다른 한 시간 설교를 해야하는 중요한 말씀이지만, 오늘은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에만 집중해 보자.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능력이 어느 정도의 능력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한 능력으로서 그분을 무덤에서 부활하게 한 능력이다. 죽음을 무력화 하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 능력은 예수님을 영광 가운데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능력이다. 이 만물에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이 포함되어 있다. 이 표현은 영적인 존재들, 특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들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력한 존재들, 지금 세상이든 영원한 세상이든 그 모든 이름 위에 예수님을 두신 그 능력이 믿는 자와 함께 하는 능력이다. 만물을 예수님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신 것이 그 능력이다. 즉, 모든 능력을 무력화 하는 능력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능력이다.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하신 일을 통해 설명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머리와 몸으로서 설명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어찌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처럼도 보일 수 있지만, 비유의 연속성 상에서 이해한다면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뜻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교회와 그리스도는 한 몸이고 한 몸으로서 움직일 때 온전하여 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능력은 그 몸인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졌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면 내 삶에 나타나야 하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에베소는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아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 힘이 다 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게 된다. 더 이상은 이렇게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게 된다. 참된 믿음과 사랑으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계시록이 기록될 때 에베소의 상황이 그러했다. 첫 사랑을 버린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영광의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그들에게 풍성한 기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그들에게 모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잊으면 남는 것은 책임감과 의무감, 죄책감으로 삐끄덕 거리는 삶 뿐이다. 겨우 살아가는 그런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풍성한 삶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언제나 첫번째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나의 눈을 밝혀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소서.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천국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한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빌 3:8-9). 바울만 그런가.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참된 보화, 참된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쩌면 그러고 나서 다시 그 보화를 땅에 묻어두고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린 사람들 같다. 팔았던 것들을 다시 하나 하나 집으로 들여놓고는 그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사람들 같다. 혹은 그렇게 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사람들 같다.
보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보화를 보지 못해서다. 우리의 보화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받고 천국에 가기까지 우리는 우리 눈으로 주님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밝은 마음의 눈으로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주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떤 기업을 약속 받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더 분명히 보면 볼수록 주님을 알고 우리는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바울의 기도가 우리 교회,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 매일의 기도가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