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본문 : 에베소서 3장 1-13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본문에서 가져왔습니다. 2절과 7절에 똑같은 표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두 번 반복되어 있습니다. “내게 주신”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말하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바울에게만 한정된 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관련된 은혜이고 교회를 위한 은혜이며 교회가 누리고 누려야 하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은 1장이나 2장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들이 간단하게 반복되기에 1장과 2장보다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이유,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의외로 흥미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엡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우리 성경은 “말하거니와”라는 동사가 있지만, 원문에 없는 추가된 말입니다. 원래대로 하면 “나 바울은”하고 문장이 끝납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문장은 14절에서 이어집니다. 2절부터 13절은 괄호로 묶을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14절부터 시작되는 다음 단락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잠시 멈칫 하면서 기도하기 전에 2절부터 13절의 내용, 오늘 본문을 먼저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기도를 멈추고 먼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고난이라는 배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갇힌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바울의 고난이 언급됩니다.
엡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그러므로” 라고 말씀이 시작되는데 오늘 본문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 때문에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개인의 이야기, 그가 받은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바울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을까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걱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 낙심하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일을 겪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도 그런 비슷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고 때로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고난이 누군가의 고난이 아니라 나의 고난이 되었을 때, 어느 날 나에게 배달된 인생의 무거운 짐이 내 어깨를 짓누를 때, 나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고난이 내가 치열하게 부딪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때 우리는 많이 힘들어집니다. 많이 지치게 되고 낙심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어땠을까요? 누구보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성도들이 볼 때 불편한 마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열심히 한 결과가 감옥이라니!’
바울을 보는 사람은 낙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고난을 맞서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고난 중에서도 훗날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는 성도들을 도전하길 원합니다. 지금 자신은 갇힌 자가 되어 고난 받고 있지만,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과 상관없이 바울에게 있는 것은 그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을 만큼 힘 있고 가치 있는 것임을 알려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이 당한 현실, 지금의 상황과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낙심하지 않도록 그 마음을 지켜줍니다. 바울은 그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은혜를 알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눈을 열어 분명히 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엡 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경륜으로 말합니다. 이 단어는 청지기가 하는 일, 직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집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일과 그 일을 하는 책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보통 ‘직분’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직분이라고 하기가 어색하기에 ‘경륜’으로 번역합니다. 경륜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경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륜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엡 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엡 3: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은혜는 경륜으로, 경륜은 계시로, 계시는 비밀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비밀을 알게 하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비밀을 알 수 있는 계시를 주셨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첫째는 비밀을 알게 하신 은혜입니다.
여기 말씀의 비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비밀과는 구분이 됩니다. 이 비밀은 수수께끼처럼 알기 어렵고 알 수 없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밝힐 수 없어서 숨겨야 하는 비밀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비밀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엡 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 비밀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어서 지금까지는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밝히 드러난 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은 비밀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무런 차별 없이 한 지체가 되어 교회로 하나 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진리를 은혜로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것을 온전히 알지 못했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일부를 보았을 뿐, 그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없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은 그 웅장한 구원의 완전한 그림을 바울에게 계시하셨고 그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반복해서 이 위대한 진리를 말하고 거듭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복해서 듣고 다시 생각해야 할 만큼 깊고도 풍성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리를 반복해서 말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은혜로 알게 된 비밀, 이전 단락에서 언급했었던 진리를 다시 말합니다.
엡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함께”라는 표현으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대인들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고 기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인해, 서로서로 연합되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약속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진리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것인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존 맥아더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이런 비유를 사용합니다. ‘나병환자들이 더 이상 격리되지 않고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모든 사람과 완전히 자유롭게 섞이고 어울릴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유대인 입장에서 이방인은 나병환자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없고 격리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이 치유되어서 깨끗하게 되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었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에 그 모습 그대로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막힌 담을 허무셨기에 어떤 것도 막을 수 없고 방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결과이며 우리에게 복음이며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 아닌 밝히 드러난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비밀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밝히 드러내신 이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비밀을 알게 하신 것,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시 아직 아닌 분이 있다면, 이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이렇게 말합니다.
엡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비밀을 알게 하신 은혜는 단순히 아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뭔가를 하게 만듭니다.
정리하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둘째는 사명을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비밀과 사명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첫 번째 은혜가 계시로 알게 된 비밀, 그 자체라면 두 번째 은혜는 허락하신 사명, 그 비밀을 전하는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바울이 얼마나 큰 은혜로 여기는지 이어지는 바울의 자기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바울은 여기서 아주 특별한 형용사를 사용합니다. 최상급 형용사의 비교급을 사용한 것인데,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이라는 의미로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만 사용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는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는 말은 거짓된 위선도 아니고 근거 없는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 자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전에 그리스도를 훼방하고 모욕했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심지어 진멸하려고까지 했습니다. 바울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바울에게 심판이 아니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로 그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고 사명을 주셔서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로 바울은 부르심을 받았고 그에게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은혜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 알고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은혜가 바울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더 가치 있는 인생으로 이끌어갑니다.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명에 대한 충성으로 주님을 향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르게 하고 다르게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 은혜를 알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은혜를 알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허락하신 사명을 따라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엡 3:8 …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과 비밀의 경륜을 드러내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되기보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명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우리는 사명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바울이 은혜로 허락하신 사명에 충성할 때, 복음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감추어졌던 비밀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누구인지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로 ‘세상의 권세자들과 정치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기에 이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존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늘에 속한 영적인 존재에 대한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선한 천사들로 보느냐 아니면 악한 영들로 보느냐 아니면 둘 모두로 보느냐에 대한 견해 차이입니다. 조금 더 다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선한 천사로 보는 견해이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악한 영들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라고 할 때는 악한 영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고 선한 천사들을 가리킬 때는 이 표현은 사용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편지에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벧전1:12)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인데 차이가 있다면 선한 천사가 대상이 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분명하게 “천사들”이라고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도 같은 단어인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나오는데 우리가 상대하는 싸움의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6장에서는 다른 견해 없이 악한 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악한 영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지혜를 알게 하는 수단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느냐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가 그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그분의 각종 지혜를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비밀이 밝히 드러나 복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깨달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함으로 전해진 복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생명의 열매는 또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고 교회가 또 다른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그 지혜가 온 세상 가운데 드러납니다. 바울의 고백을 따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11:33)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과도 다른 새로운 공동체 교회,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인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자에게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인 존재에게, 악한 영들에게도 하나님의 지혜의 풍성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의도가 없고 계속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아시고 그 계획들을 좌절시키시고 그들의 모든 악한 계획들을 모두 헛된 것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렇게 바울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받은 은혜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밀을 알게 하신 은혜, 사명을 허락하신 은혜, 모두 혼자만 누리는 은혜가 아닙니다. 개인의 차원으로 끝나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인 교회로 연결되며 함께 누리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나”라고 말했던 바울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말합니다. 각 사람이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가 함께 은혜를 누립니다.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언제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하늘의 모든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대제사장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이 은혜를 누리며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중심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생명으로 교회를 세우셨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거하시고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를 어느 정도의 위치에 두고 있는지요? 중심에 있습니까? 아니면 저 변두리 끝, 한 쪽 구석에 있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책임 있는 교회의 지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가족이며 교회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며 교회로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는 고난에 대해서도 다르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유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능하신 손아래에 모든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내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은혜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계시로 깨달아 알고 그가 전했던 그 비밀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 비밀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그 비밀이 우리의 이야기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맞는 말입니다. 완벽한 교회는 없기에 교회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보지 말라는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로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그분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성취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나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