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본문: 시편 116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6편은 113편부터 시작된 “애굽 할렐”의 넷째 시편이다. 애굽 할렐은 유월절 식사 시간에 불러졌던 노래들인데, 출애굽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이 시편들을 읽어 보면 출애굽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114:1 정도를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다. 즉, 이 시편들은 출애굽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 보게 하고, 그것을 현재와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13편은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셔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114편은 출애굽 사건이 증명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115편은 바로 그 참이신 하나님 만이 영광을 받으셔야함을 강조한다.

116편은 이런 흐름에 있는 시편이다. 전체를 읽어 보면 다른 애굽 할렐과 크게 차이를 느끼는 부분은 이 시편이 굉장히 개인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거의 모든 구절에서 “나”를 지칭하는 표현이 1번 이상 나온다. 출애굽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고 유월절은 그것을 민족적으로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 때 불려지는 노래에 이렇게 개인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애굽 할렐은 출애굽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 보게 하고 그것을 현재와 이어준다. 즉,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나에게 베푸신 구원을 생각해 보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편은 개인의 감사의 시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구원,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배울 수 있는 시편이다.

12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묻는다. 여기서 “보답”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원론적 의미인 “돌려준다”로 이해한다면 이 질문은 수사적 질문이 된다. 즉 진짜로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질문이라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께 받은 은혜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은혜를 받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돌려준다면, 그것은 은혜를 은혜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 가격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해당 가격만큼 돈을 보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는 순간 선물은 선물이 아닌 것이 된다. 은혜는 원래 보답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릴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자체가 너무 크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께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지도 않다. 무언가 하나님께 드리려고 한들 드릴 것이 없는 것이다.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 수는 없다. 가장 먼저는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말씀 전체를 오해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오해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보답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편 116편에서 우리는 시편기자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보답하고 보답하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크게 5가지 반응을 보게 될 것인데, 그에 앞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살펴보자.

은혜(3-8절)

1절과 2절에 평행하여 나타나는 표현이 지금 시편 기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1절),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2절). 즉,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다. 그럼 어떤 기도를 했을까?

116:3–4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아주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사용된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마치 사망이라는 사냥꾼에게 포획된 사냥감처럼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다. 줄이 그를 둘렀고 죽음의 고통이 그를 찾아왔다. 그가 만나고 평안과 기쁨이었겠지만, 그가 실제로 만난 것은 환난과 슬픔이었다.

8절에서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116: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즉 그는 사망과 눈물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함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10절에서 그는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하고, 15절에서는 “경건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시편 기자는 정말로 죽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히스기야처럼 병들어 죽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윗의 경우처럼 그를 죽이려고 하는 대적이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욥의 경우처럼 엄청난 삶의 상실을 겪으면서 스스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든 삶보다 죽음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 속에 시편 기자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다(4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인 우리의 기도처럼 기도 끝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를 덧붙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그 이름에 담긴 그분의 어떠하심과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정말로 단순했다.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4절). 기도가 대단히 논리적이어서 하나님을 꼼짝 못하시게 하거나 혹은 대단히 감성적이어서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했던 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 뿐이다. 기도 응답은 여러 모습으로 올 수 있는데,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기도의 내용을 그대로 들어주신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왜 시편 기자의 기도를 들으셨을까?

116:5–6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가장 근본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에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런데 6절에서 시편 기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순진한 자는 말 그대로 순진한 자다. 부정적으로 보면 무지하고 쉽게 속는 사람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고 배울 준비가 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지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우리가 얼마 전에 배웠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가 어려울 때 구원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겸손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교만이기 때문이다. 7절 후반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경우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은 “후대하신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잘 대해주셨다는 말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았고 따라서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후대하셨고, 그렇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보답할 수 있다”고 답하면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내가 실제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힘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 보탬이 될만한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지신, 모든 것을 풍성하게 소유하시는 자존하시고 자족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

혹은 같은 질문에 “보답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면 반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지금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런 상관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은 (굳이 필요도 없는) 작은 은혜를 베풀고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에서 건짐 받은 구원의 은혜로만 끝난 것도 아니다. 여기 시편 기자가 경험하고 또 우리도 항상 경험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혹은 마치 그런 은혜가 필요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은혜 받은 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올바른 답은 “보답할 수 없다. 하지만 보답하고 싶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반응을 시편 116편에서 5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사랑(1절)

116: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그에 합당한 첫째 반응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를 경험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어쩌면 이 표현이 조금은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조건적인 사랑이고 이기적인 사랑인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사랑하지 않을거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 “고마워, 사랑해”라고 반응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큰 선물을 받고 크게 기뻐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기적’이라고 하려면 그 사람이 ‘그때만’ 그래야 한다. 즉, 선물을 받을 때만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이기적이다. 그런 경우에는 사실 “사랑해”의 목적어가 다를 것이다. 선물을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준 선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은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든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선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굳게 서약한 후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였다.

구원 받은 이후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어려움과 유혹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정말로 당당하게 구할 수가 없다. 항상 “주님 제가 이렇지만, 그래도…”라고 구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그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내가 잘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잘해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은혜의 하나님이 나에게 후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이기에, 은혜에 대한 나의 첫째 반응은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의지(2, 10-11절)

다음으로 2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은혜에 대한 반응은 의지다.

116: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4절에서 시편 기자는 가장 최근 자신의 기도 내용을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셨다. 응답해 주셨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다짐한다. 이는 단순히 ‘기도하니까 되더라. 그러니까 계속 기도하겠다’는 생각을 뛰어 넘는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116:10–11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고통 중에 있을 때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한다”고 말했고 또한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놀라서 말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의지할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죄성에 대한 표현이라기 보다는 사람에 대한 시편 기자의 실망감의 표현일 것이다. 평소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어려울 때 돕겠다고 했던 친구들, 언제든 함께 하겠다고 말했던 지인들은 정작 시편 기자가 크게 고통을 당할 때 의지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를 떠났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도울 생각이 없거나, 혹은 도우려고 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움이 되어 주셨다. 의지가 되어 주셨다.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다. 그래서 은혜를 경험한 지금 굳게 다짐하는 것이다. 평생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 기도는 바로 그 의지의 수단이 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 즉 사람은 궁극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오늘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람이 의지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오히려 잘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다. 기도해도 그냥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 응답도 응답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반면에 사람을 통한 도움은 오히려 확실한 것 같다. 자녀 문제는 세상의 전문가가 훨씬 더 잘 해결해 주는 것 같다. 재정 문제도 마찬가지다. 부부 문제, 진학 문제, 직장 문제 등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성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것 같고 그것들이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의지가 된다고 느껴진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쟁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평생 기도하지 않아도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으니 더 이상 기도는 필요 없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의지할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려고 하기 때문이지, 정말로 그들이 의지할만해서가 아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애초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응답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래서 더 기도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기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경우 기도하고 있지 않은지 모른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한다(살전 5:17).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더 의지할 수 있다.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보여주신다면 그에 이어지는 반응은 또 다른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은혜에 대한 둘째 반응은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평안(7절)

116: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셋째 반응은 평안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응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한 ‘의지’와 함께 가는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지가 되신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평안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란 확신 가운데 앞으로도 평안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단순히 “평안하라”고 표현하지 않고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라고 표현했다. 사람의 정상(원래) 상태가 평안함이기 때문이다. 여기 시편 기자처럼 죽음을 앞둔 상황까지는 아니어도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은 그 평안함을 깬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인생의 ‘폭풍’, ‘풍랑’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폭풍은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후대하셨다. 하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평안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여전히 슬픔이 남아있다. 앙금이 남아있다. 상처가 남아있다. 분노가 남아있다. 이런 모든 남겨진 감정들이 우리를 평안하지 못하게 한다. 사실 호수라면 바람이 멈추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평온함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감정이 더 커질 때도 많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무 바람도 없는데 그 마음에는 파도가 일렁일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자기 영혼에게 평안함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을 때 그의 영혼은 불안하고 괴로웠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그 모든 남겨진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모든 일들은 어쩌다 우연히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겨우 해결해 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삶의 폭풍이 잠잠해졌다. 그러니 이제는 그 하나님을 믿고 본래의 자리로, 평안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시편 기자는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이다. 은혜 받은 사람이 평안하지 않다면 은혜는 은혜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은혜 받은 자는 평안해야 한다.

순종(9절)

사랑, 의지, 평안 다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시편 기자가 보이는 반응은 순종이다.

116: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지셨기 때문에(8절), 시편 기자는 죽음의 땅이 아닌 생명이 있는 땅에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제는 마음대로 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호와 앞에 행한다는 것은 구약에서 종종 사용되는 일종의 관용구와 같다. 그 의미를 가장 잘 말해주는 두 구절이 있다.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왕상 9: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여호와 앞에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복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눈에만 괜찮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온전한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16절이 이런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116: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은혜와 순종은 뭔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진짜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은혜를 자기가 편한대로 자기가 원하는대로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은혜를 이용하지 않는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 때문에 바울은 수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수고했다. 그리고 나서도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많이 사함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은혜는 우리를 무법한 자가 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받은 은혜로 인해서 더 순종하고 싶게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순종의 삶이 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드러낸다.

여기 시편 기자도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했던 것이다. 은혜 받은 자는 순종한다.

예배(13-19절)

사랑, 의지, 평안, 순종에 이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시편 기자의 마지막 반응은 예배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공적인 예배다. 사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가장 직접적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했다.

116:12–15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5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귀하게 보시고 구원하셨음에 대한 언급이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이 시편의 동기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시편 기자가 당장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17절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116: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서원을 갚을 것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공적으로 표현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특히 ‘공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마지막 18-19절을 보라.

116:18–19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모든 백성 앞에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서,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서원한 것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그냥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하면 안되는걸까?

물론 시편기자는 그렇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 자신의 간증을 가지고 나아가서 예배하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바로 하나님을 가장 직접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은혜롭고 의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서,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높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 받은 시편 기자의 마지막 반응이다. 은혜 받은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 받은 자는 은혜 베푸신 하나님을 예배한다.

도전

그럼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찾은 것은 사랑, 의지, 평안, 순종, 예배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것들이 정말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사랑, 의지, 평안, 순종, 예배는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평안을 누리고, 순종하고, 예배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스펄전, <시편 강해> 9권 (상), 296, “너무도 초라하고 가련한 나 같은 자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은, 더 많은 은총을 베풀어달라고 그분께 호소하는 것이다.”

어떨게 생각하면 참 염치 없는 대답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여전히 더 많은 은혜를 구하는 것이 어떻게 보답이 될 수 있을까?

이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도 이 원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무언가를 기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녀는 당연히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부모에게 무언가 구하기를 주저한다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 은혜를 받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떨까? 죄송스러워서, 송구해서, 면목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이미 받은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두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 자체가 부모에 대한 오해다. 부모는 자녀에게 더 주고 싶어한다. 자녀가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것이 부모의 기쁨이다. 하나님은 부모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항상 더 많은 것을 주기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즐겁고 만족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분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면 더 많은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까지 구하기만 할거냐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너희가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주신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더 큰 은혜를 구하면 된다. 은혜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평안함을 누리라. 순종과 예배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자랑하라. 그런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것이 최고의 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