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본문: 누가복음 19장 11절 ~ 27절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은 여리고에 가까이 오셔서 맹인을 구원하셨고, 여리고를 지나가시면서 유대인들이 손가락질 했던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유도 세례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죄인 대신 죽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요 1:29).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10).
- 은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두 가지 이유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절)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 곧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을 향하여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추가로 말씀하신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는” 이라는 말 이후에 그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여리고였고, 여기서 예루살렘은 약29km, 걸어서 여섯 시간정도면 도달하는 거리였습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일을 이룰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알리셨고,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오래전부터 기록되어 온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며, 채찍질 당하고, 죽임 당하지만 삼 일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눅 18:31-34).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사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싸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것이라 말씀하시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을 되찾아 왕이 되거든 좌우에 앉아 함께 다스리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르면 이스라엘을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이방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회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예수님이 비유를 더하신 이유입니다. “그들” 즉 제자들과 무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미래의 시점에 이루어질 일이고, 지금 예루살렘에 가서는 그 나라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사실을 이 비유를 통해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이다(12, 14)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12절)
…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하였더라(14절)
비유의 시작을 보시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여기 한 귀인(귀족)이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고 떠납니다. 왕의 자리를 먼 나라에 가서 받아온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조금 이상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에겐 너무나 친숙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여리고에 서 있는데, 그 여리고에는 분봉왕 헤롯 아겔라오가 건축한 아름다운 궁전이 있었습니다. 수년 전 아겔라오는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고 다른 형제들과 아버지가 다스리던 땅을 분할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지역인 유대땅의 왕이 되고 싶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로마로 떠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배국인 로마가 다스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의 인준이 있어야만 왕의 권한을 가지고 유대땅을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겔라오가 로마 황제 아우그스투스에게 왕위를 받고자 청원할 때, 유대인들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50명의 사절단을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아겔라오는 유월절에 유대인을 3,000명 이나 살해한 악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도 왕위를 받으려는 귀족을 미워하는 백성이 등장합니다(14절). 그들은 사절단을 보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청원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그들에게 친숙한 사건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도 곧 온 세상을 다스리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실 것입니다. 그곳에 가셔서 세상을 다스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을 보면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인준을 받아 온 세상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신 것입니다.
비유의 내용처럼 예수님을 모두가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 받았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묻자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말합니다(요 19:15).
“이 사람 예수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 고향 나사렛, 자기 백성의 수도 예루살렘, 그리고 오늘날에도 자기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피조물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절당하십니다. 예수를 내 삶의 주인,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헤롯 아겔라오는 결국 로마 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합니다. 유대땅을 다스릴 권한은 얻었으나 끝내 왕의 직임을 받을 수 없어 분봉왕이라는 직책만 얻고 일하다가 결국 파직되었습니다. 황제는 결국 아겔라오를 반대하던 이들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준을 받아 이미 온 세상의 주인이요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왕권을 가지고 다시 돌아와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때, 끝까지 반역한 이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까요?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이라는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멀리 떠나 왕권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시는 날, 이 땅에 그 왕권을 온전히 세우시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또 하나의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이미 시작됐다(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13절)
13절을 보시면 비유 속 귀족은 왕위를 받으러 먼 길을 떠나기 전 자기의 종들을 부릅니다. 열 명의 종에게 은화 열 므나를 나눠줍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열 명이 은화 열 므나를 받았으니, 한 사람당 한 므나를 받은 것입니다. 한 므나는 100드라크마이고, 약 100일치의 임금, 약 4개월 정도의 임금입니다.
종들은 주인의 이름으로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대리인으로서 주인의 이득을 창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왕위를 받기 위해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기의 재산과 사업을 방치해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는 종들에게 이 일을 위임했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너희가 내 일을 대신 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왕권이 완전히 발휘되는 시점은 아직이지만, 내가 가져올 왕국을 위한 일은 멈추지 않고 지금 너희를 통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시고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20).
이것이 제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을 하셨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하는 일, 그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돌아올 그 때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그 왕권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종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명이 맡겨졌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장사하라” 너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일이 계속 되어야 한다. 이윤을 남기고 최선을 다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선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맡겨진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주가 왕권을 가지고 돌아와 결산할 것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실 것이고, 우리를 불러 모아 결산하실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에서 심판이 기다린다(15-27)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15절)
자, 여기 귀족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왕으로서 권세를 가지고 자기 나라와 백성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의 종들을 부릅니다. 각각 나눠준 은화를 가지고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결산하기 원합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16절)
첫번째로 나온 종은 장사를 아주 잘했습니다. 천퍼센트의 수익을 냈습니다. 은화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와 같은 막대한 수익을 내는 것은 드문일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칭찬했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하고(17절)
두번째로 나온 종 역시 장사를 잘했습니다. 첫째 종에 비하면 적었지만 그도 오백퍼센트의 수익을 냈습니다. 은화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18절)
주인은 그도 칭찬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하고(19절)
세번째 종을 만나기 전에 주인이 칭찬한 두 종에 관해 좀 더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첫번째와 두번째 종이 남긴 이윤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같은 돈을(은화 한 므나) 받았지만 그들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이가 발생한 것입니다(열 므나, 다섯 므나).
또 한 가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주인이 그 결과에 따라 엄청난 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고 칭찬했는데, 은화 한 므나는 사실 그렇게 큰 금액의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앞으로 맡을 일과 비교해서 아주 작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열 므나를 남긴 종은 열 고을,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국무장관, 도지사 정도로 높이 추대한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이 주인이 왕권을 가지고 올 그 기간동안 맡겨준 일에 충성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릴 나라에서 그 충성도에 따라 함께 다스릴 권세를 나누어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교훈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왕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왕이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온전한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얼마나 맡겨진 일에 충성을 했는지 계산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받을 보상은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바울의 표현처럼 그 기업의 영광이 풍성할 것입니다(엡 1:18).
지금 여러분이 보내는 시간, 하루, 한 시간, 가볍게 흘려 보내지 마십시오. 아무 의미 없는 시간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든 충성을 다하여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우리 주위에, 내가 속한 사회 속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파는 장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밑천이 없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장사는 건강해도 할 수 있고, 병들어도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있어도 할 수 있고,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있어도 할 수 있고,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아도 할 수 있고,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살날이 얼마 없어도, 아주 많이 남아도 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워도, 적게 배워도 할 수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이 장사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충성할 수 있는 장사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와서 우리에게 주실 보상은 엄청납니다. 지금 이 땅에서 내가 하는 것이 크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보상을 가져오는 일이라는 생각을 꼭 기억하십시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렇게 대단한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저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천국문을 통과해서 그 나라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이 땅에서 열심히 뭔가 하는 것은 올바른 동기로 일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정직하고 겸손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을 위해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종을 만나보겠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0절)
여기 한 종이 주인에게 나와 말을 합니다. 그는 주인이 맡겼던 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수건에 싸서 보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엔 돈을 보관할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땅에 묻어두거나 수건에 싸 두는 것이 돈을 보관하는 보편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주인은 분명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해서 이윤을 남기라’고 했는데, 왜 이 종은 그냥 돈을 가지고 있다가 그대로 돌려준 것일까요? 여기 종이 그렇게 한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1절)
종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매정하고 엄격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분입니다.”
종이 볼때 주인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은화 한 므나를 맡겨놓고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맡기지 아니한 이윤을 찾으려 하니까요. 심지도 않고 거두는 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누가 장사를 합니까? 종이 다하는데, 왜 주인이 거두어 갑니까?
‘돈을 벌면 당신이 다 가져갈 것이고, 돈을 잃으면 엄히 벌할 것이니, 당신처럼 악한 주인에게는 맡긴 돈을 그대로 돌려주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종은 그런 취지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종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자기 재산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집착하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도 왜 너는 열 므나를 남기지 못했냐고 책망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오히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것을 엄청난 보상으로 갚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왕권을 가지고 돌아와 함께 다스릴 권세를 충성한 자에게 모두 나눠주는 선하고 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주인은 심지도 않고 거두거나, 맡기지 않고 취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더 취하기 위해 대리인으로 열 사람의 종을 따로 불러 재산을 맡긴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 종은 자기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조차 망각하고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았으면서 그 모든 핑계를 주인의 성격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의 속마음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22-23절)
‘그래? 만일 네 말대로 내가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려는 악한 사람이라고 치자, 정말 네가 나를 그렇게 봤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맡겨서 내가 돌아왔을 때 이자와 함께 찾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주인의 이 말에 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한 말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적당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우리에게 적당함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충성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많은 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정직하고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서 우리에게 많은 상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기뻐하는 것을 우리도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 그 나라에서 많은 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마지막 종처럼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할 필요 없이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나태하고 게으른 말입니다.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예수님은 악한고 엄한 주인이라고 비난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내 삶의 참 주인, 참된 왕으로 모시고 그가 명령하신 것을 충성스럽게 따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입술로는 ‘주인’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이 예수라는 사람이 내 삶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과연 어떤 판결을 받게 될까요?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24-26절)
여기 왕이 행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먼저, 마지막 종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겼습니다. 그가 가졌던 것은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다른 종들이 ‘주여 그가 이미 열 므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주인은 그들에게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주인은 종들이 남긴 이윤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종들에게 맡겨 관리하도록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종이 말한 ‘맡기지 않은 것을 취하는 주인’이라는 말은 더더욱 잘못된 말입니다. 열 므나를 남긴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인은 더 풍성히 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반면 주인은 게으른 종을 가리켜 22절에 “악한 종”이라고 불렀고, 26절에서는 가지고 있던 한 므나를 빼앗아버리고 “없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종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었지만 충성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믿었다고 착각하는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악한 종”은 아주 강력한 부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악한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둘째, 누가복음 8장 18절에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주인의 말과 유사하지요? 있는 줄로 착각하는 자, 그는 사실 없는 자입니다. 믿었다고 착각하는 믿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셋째, 마태복음에는 달란트 비유가 있는데(25:14~30) 열 므나 비유와 유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충성되지 못한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내미는데, 여기 악한 종과 유사합니다. 주인은 그의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주인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라고 말합니다. 심판의 표현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이런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마지막 종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나 자기 영혼의 유익을 위해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자, 입술로는 예수를 주인이요 왕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왕으로 도무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는 다음의 심판 대상과 함께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27절입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하였느니라(27절)
예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하는 사람,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 그들에 대한 심판이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실 그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왕의 눈 앞에서 모든 대적이 영원한 멸망이라는 판결을 받고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끊어짐을 당하는 영원한 죽음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예수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왕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왕이 오고 있습니다. 그분은 선하고 인자하고 은혜로운 왕입니다. 그 나라를 당신과 함께 다스리기 원하시고 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영원히 상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대적하는 이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분입니다. 왕이 오시기 전까지 기회가 있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편에 서지 말고, 그분 편에 서십시오. 그분이 돌아오기 전에 그분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십시오. 아직 당신에게는 영원을 뒤바꿔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