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거듭난 삭개오
본문: 누가복음 19장 1절 ~ 10절
설교자: 조정의

이제 2주만 있으면 복음집회입니다. 복음집회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난 3주간 13명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일인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나를 찾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른 잃어버린 자에게 소개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거듭난 삭개오의 간증을 들으려 합니다. 그의 간증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변화된 삶으로 증거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예수님을 만나기 전(1~4)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1절)

때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통하여 지나가실 때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앞을 볼 수 없던 두 사람을 만나셨고(18:35), 그들의 육체와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고 구원 하셨습니다. 그 후에 여리고에서 만난 또 다른 인물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헤롯 대왕이 재건한 새 도시, 여리고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 꿀이 많이 생산되는 곳, 큰 종려나무 숲이 있고, 대추야자 열매가 많이 나며, 발삼 향나무 숲이 있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값비싼 발삼 향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희귀한 사이프러스 나무(장수, 반 고흐그림에 등장), 미로발란 나무(가자나무, 옷 염색) 등도 있어 1세기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곳을 신성한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온화한 기후라 왕족들의 휴양지로 자주 애용되었습니다. 수영장, 정원, 목욕탕, 경마장, 극장을 갖춘 거대한 궁전이 있어 정치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이스라엘 북부 주요 해안도시와 남쪽 애굽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막대한 재물이 모이는 도시였습니다(스윈돌, 539).

그래서 성경학자 바클레이의 말에 따르면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곳이었습니다(바클레이, 320). 그리고 오늘 만날 삭개오는 이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절)

삭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자카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아이러니하게도 “깨끗한”, “순결한”입니다. 마치 조직폭력배 팔뚝에 “착하게 살자”라고 어울리지 않게 써 있는 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다는 뜻을 가진 삭개오의 직업은 당시 유대인이 경멸했던 세리,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들의 대장인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장은 로마 정부가 관장하는 지역(여리고) 이곳 저곳에 설치된 세금 징수처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마태도 세금 징수처에 앉아서 세금을 받는 세금 징수원(세리)이었는데, 이런 세금 징수원을 여럿 두어 조직하고 그들이 거둬들인 세금 가운데 일부를 자기 몫으로 챙겨 막대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세리장의 자리였습니다.

여리고에 드나드는 정치인들과 은밀한 만남을 갖거나, 그들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여러 혜택을 얻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부패하기 쉬운 자리에서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렸던 사람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누가의 기록대로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유대인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지만, 세리는 경멸했습니다. 같은 유대인으로서 자기 동족을 배신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강제로 그것도 부당한 양을 털어서 지배국가인 로마에게 바치고, 동시에 자기 배를 불리는 세리들의 대장을 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배웠으나 세리에게는 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세리를 미워했습니다. 성경에서 세리는 거의 대부분 “죄인”과 함께 등장하고, 세리가 어울리는 사람들 역시 세리,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아브라함자손에 도저히 포함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뉴스나 신문을 통해 공직에서 세금을 받으며 정치인과 결탁하여 개인의 부를 축적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가 힘들게 일한 만큼 그들의 탐욕과 비리에 분노하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교회 집사나 성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거북하고 역정이납니다. 차라리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조금의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다고 해도 부와 권력에 눈이 먼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3-4절)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기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눅 7:34). 그의 제자 가운데 세리가 있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눅 5:27). 세리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면, 성전에서 하늘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내용에 흥미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눅 18:13-14).

어떤 이유에서든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로막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으니, 하나는 수많은 군중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작은 키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삭개오의 작은 키가 소심한 마음, 시시하고 탐욕스러운 성품, 낮은 자존감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더 나아가 그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세리장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본문에서 거기까지 유추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두 가지 장애물은 삭개오가 얼마나 예수를 보고 싶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사울왕처럼 다른 사람보다 키가 커서 멀리서 예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맹인처럼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부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 베짱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시게 될 곳을 보고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전엔 “뽕나무”로 번역된 이 나무는 떡갈나무와 비슷하여 나무 기둥이 짧고 가지들이 좌우로 넓게 뻗어 있는 나무로, 오르기 쉽고 몸을 숨기기 쉬운 나무입니다(벅, 829). 그렇게 해서라도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원했습니다. 소란피우지 않고 남에게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자기 혼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어 했습니다.

누가는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원했다”고 두 번 반복하여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맹인이 예수님께 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8:41). 계속해서 “보는 것”이 강조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놀라운 신비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보기 원하는 마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눈이 가려진 그들이 참빛이신 예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하나님께서 삭개오를 예수님 곁으로 이끌고 오셨습니다. 나무에 올라갈 정도로 간절히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예수님은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2. 예수님을 만났을 때(5~7)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니(5절)

마치 무술의 고수가 나무 뒤에 숨은 적을 한참 전에 알아차리고, “숨지 말고 나와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삭개오가 나무 위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예수님은 삭개오가 나무 위에 있는 것을 아셨지만 조용히 가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같은 아브라함 자손으로 동족을 괴롭히는 삭개오를 무시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가 숨은 나무 위를 쳐다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는 감짝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나다나엘을 놀래키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을때, 예수님은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8).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알 수 없는 자신의 속 마음과 상황을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에 숨은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예수님은 아셨고, 진정으로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기 원했던 그의 마음을 아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그를 영접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만나기 원하고, 네가 보기 원하는 나를 보여주기 원하니, 어서 네 집으로 가자, 지금 빨리 내려오너라!”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6-7절)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삭개오는 즐거웠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즐겁지 않았습니다. 수군수군 거리면서 어떻게 저런 죄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가? 불평하고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인의 특징을 봅니다. 죄인은 서로 차별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는데(롬 3:20), 죄인들 사이에 구분을 두고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와 신문에 나온 죄인이 더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을 부당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롬 3:22).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원한 심판을 받을 죄인이고, 모든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차별이 없습니다.

죄인 삭개오를 영접한 예수님을보며 수군거린 군중들은 자기들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온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악한지, 평판이 좋지 못한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관계 없이, 예수님을 보기 원하여 예수님 앞에 나온 자를 예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그 이름을 기억하시며 자기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함께 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3.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8~10)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8절에서 삭개오가 어디에 서서 주님께 말했는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시점에 삭개오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한 것 같습니다.

삭개오의 고백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새로운 삶을 향한 자기의 결심과 의지를 봐달라고 요청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당하게 거둔 세금에 대하여 네 배로 보상해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진 전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사용하기 원합니다.

삭개오는 이제 그 이름대로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훔친 것은 두 배로 갚아야 했는데(출 22:4), 삭개오는 그것의 두 배인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는 앞으로도 속여 빼앗지 않고 정해진 세금만 걷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고, 과거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한다는 표현입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푼 요한에게 세리가 나와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했을 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눅 3:12-13). 여기 진정으로 회개한 세리장, 삭개오가 그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절반도 잘못된 과거를 돌이키는데 사용합니다.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은 재물을 섬기는 그의 문제를 보시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관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 근심하며 주님을 떠났습니다.

재물에 눈이 먼 부자 관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여기 대표적인 예로 삭개오가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재물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먼 부자 세리장의 마음을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세리장을 만나주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은혜롭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유하면서 그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기 재물을 전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하기 원했습니다. 더이상 죄에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이것은 확실한 선포입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 그래서 그도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선언입니다. 유대인은 혈통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지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돌로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꾸짖었습니다. 

참 아브라함 자손은 단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삭개오처럼 그 결과로서 변화된 삶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구약 선지자 에스겔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2)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십니다. 흐리고 캄캄한 날 참빛으로 오셔서 어둠 속에 흩어진 모든 영혼을 찾아 건져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지금도 예수님은 이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를 보기 원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그들을 구원하여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죄인을 부르시고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둘째,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를 배웁니다. 셋째, 그 자비하심을 맛본 자, 진정 거듭난 자가 어떤 삶의 변화를 보이는지 배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죄인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다면 여러분의 동료 맹인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부패한 세리장이었는데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면 죄 가운데 사는 동료 세리들을 초청하여 그분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전도는 다른 게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였던 나를 찾아 구원하신 내 영혼의 구세주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자가 되어 마귀와 세상과 죄에 종노릇 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자 예수께서 당신을 찾고 계신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려 놓기 위해 그리스도가 당신을 찾아 구원하신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선교단체 CCC의 명강사이자 기독교변증론의 대가인 조쉬 맥도웰은 그의 책 “누가 예수를 종교라 하는가” 마지막 장에 자기 간증을 적어 놓았습니다.

맥도웰은 세상 어떤 사람보다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로 마을에서 소문이 나있었고 작은 마을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맥도웰은 참 수치스러웠습니다. 아버지의 튀어나온 술배도 증오했고, 친구들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조롱하면 같이 맞장구치며 웃었지만 마음으론 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어머니를 때렸는데, 그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너무 심하게 맞아 일어날 수 없는 상태로 거름더미에 누워 있는 것을 종종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너무 미워 어느날엔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을 때, 아버지를 헛간으로 끌고 가서 묶어 놓고, 아버지 차도 숨겨둔 뒤, 아버지는 다른 곳에 가셨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정도로 아버지가 밉고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던 맥도웰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다섯 달쯤 후에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눈을 바라보며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진심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말은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어느날 맥도웰이 자동차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지 않은 상태로 아들을 찾아와 불안한듯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조쉬, 어떻게 나 같은 아비를 사랑할 수 있니?”

조쉬 맥도웰은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전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어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제 삶에 영접한 후에 삶이 변했어요. 아버지,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증오를 사라지게 하셨고, 사랑할 능력을 주셨어요. 아버지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

약 한 시간을 대화하고 나서 맥도웰은 자기 삶의 최고의 떨리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조쉬야, 하나님께서 너의 삶에서 행한 일을 내 삶에서도 하실 수 있다면, 그분에게 기회를 드리고 싶구나.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서 그분을 받아들이고 싶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행하신 일을 우리는 말과 행함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구원하셨습니다.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도 이러한 구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간절히 찾기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도 간절히 끝까지 찾아내 건지십니다.

우리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 있든지, 가정에서든지,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그래서 그분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도록, 은혜의 도구,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누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