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낮아지심의 이름들(4)

본문: 히브리서 2장 5-18

설교자: 최종혁

 

작년(2024년) 첫 수요예배의 설교로 “새해에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 인격, 속성, 뜻, 약속 등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새로운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나눴었다.

한 해를 지낸 이 시점에서 지난 해를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사람은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다면 그래도 의미있는 한 해를 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또 다른 1년을 흘려보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시간은 어차피 흘러간다. 그 시간을 정말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삶과 죽음의 결과 뿐 아니라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를 통해 솔로몬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만이 해 아래의 헛된 삶을 아름답게 하실 수 있고 의미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낮아지심의 이름들>이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2:5-18의 나머지 말씀(17-18절)을 나누게 될텐데,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같은 메시지를 듣게 된다. 하나님만이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 죄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를 살리셨고, 죄악된 세상 가운데 어떻게 살게 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17–18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대제사장 – 낮아지심의 이름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지금까지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다.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으셨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혈과 육을 지니셨다. 이런 낮아지심을 통해 예수님은 새로운 이름들을 얻으셨다. 구원의 창시자, 거룩하게 하시는 이, 해방자가 그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셨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을 얻기 위해 예수님은 낮아지셨다. 그 낮아지심을 17절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앞선 낮아지심의 표현에서도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구원한 자들 사이의 연대성이 강조되었었는데, 여기서는 더욱 분명하게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특히 “범사에”라는 단어가 그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사람이 되셨다. 사람처럼 보이거나 혹은 사람같은 요소가 조금 있거나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끔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어른이 몸만 아기처럼 되는 설정 같은 것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못하는 아기 같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하는 말 다 알아듣고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사람이 되셨다. ‘인간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인간인’ 구원자가 되셔야 했다는 말이다.

앞서 14절에서는 예수님이 혈과 육을 취하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거기에 추가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단순히 죽기 위해서라면 굳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야만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성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어도 죽음 자체는 가능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혈과 육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셔야했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중보자)이다. 비슷한 역할을 했던 선지자도 있지만, 선지자는 좀 더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면 제사장은 인간의 입장에 서서 인간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주임무이고 제사장은 사람의 말을 하나님께 전하는 것이 주임무다. 물론 선지자도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원론적인 면에서 각자의 주된 역할의 차이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은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제사장의 역할은 의복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출 28장).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특별한 옷을 입어서 그들이 구별된 역할을 수행함을 나타내야했다. 그 중 겉옷 위에 입는 (우리가 볼 때) 앞치마처럼 보이는 옷이 있는데 이를 ‘에봇’이라고 불렀다. 에봇은 실을 정교하게 짜서 만들어 견대(어깨받이) 둘로 이어붙이게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견대 위에 호마노라는 보석을 각각 달게 하셨고 각각의 보석에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여섯 씩 새기게 하셨다. 또한 판결 흉패라는 것을 가슴에 달게 하셨는데, 거기에는 12개의 보석을 달고 그 보석에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하나씩 새겨넣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의복에 이렇게 하라고 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대제사장이 당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단순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역할, 제사지내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그런 일들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1년에 한번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대제사장이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표로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5:1은 제사장의 자격과 직무를 이렇게 요약했다.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즉,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으로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사람이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셔서 사람의 대표로서 자격을 갖추셨다. 심지어 구약의 다른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 문제도 있기 때문에 온전한 대표가 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자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야말로 온전하고 유일한 제사장,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렇게 예수님은 온전하고 유일한 참 대제사장이 되셨다. 대제사장으로서 온전히 합당하시지만 또한 그 어느 대제사장과도 같지 않으신 것이다. 그들이 하고자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중재자) 역할을 예수님은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온전할 뿐 아니라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시기도 하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잘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는 분도 아니시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 땅에서의 삶, 또한 죽음이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쩔 수 없이 오셔서 대충 해야할 일만 하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을 부모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자녀처럼 행동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찾아 오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다. 그리고 우리의 대표자로서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셨다.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끝이 아니다. 이미 해야할 일은 충분히 다 했으니, 이제는 우리보고 알아서 살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신다. 자비가 아니면 하지 않을 일이다. 신실함이 아니면 하지 못했을 일이다. 16절 말씀처럼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우리 편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자비와 신실로 일하셨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 일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두 가지로 말한다. 죄를 속량하는 것과 시험 중에 돕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죄를 속량하심으로 죄 가운데서 우리를 살리셨다. 또한 예수님은 시험 중에 도우심으로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살게 하신다.

죄를 속량함 – 죄 가운데서 우리를 어떻게 살리셨는가?

여기까지 말씀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야 했던 원론적인 이유는 인간의 타락, 즉 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통치하지 못한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광이 아니라 멸망을 향해 간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의인이 아닌 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원수가 되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예수님은 이 모든 죄의 결과를 되돌려 놓으셨음을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살펴봤다. 그럼 죄 자체는 어떻게 된 것일까? 17절 말씀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셨다고 말한다.

여기 사용된 “속량”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속죄’, ‘대속’ 등과 유의어 정도로 생각될 수 있지만 실은 그보다 좀 더 강조하고 있는 의미가 있다. ‘속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를 강조한다면, ‘속량’은 하나님과 관련된 변화다. 속죄가 죄 용서를 강조한다면 속량은 죄 용서를 위한 값의 지불을 강조한다.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는지에 대한 답이 속량인 것이다.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뿐 아니라 공의도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를 만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계시록의 심판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의 죄와 죄인에 대한 태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 말씀을 남 얘기로 읽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직면할 미래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직면하신 과거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께 쏟아 부었다고 말할 때, 그 진노가 바로 우리가 당했어야할 진노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면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 죄가 문제가 된다고 해도, 사랑으로 그것을 그냥 용납하고 받아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그런 일을 한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고 그냥 용서해주는 것이다. 없었던 일로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냥 받아줄 수 있다. 하물며 사랑이신 하나님이 그것을 할 수 없었을까? 당연히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죄 문제는 결국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형벌의 장소인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만드는 불경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그렇다면 히브리서 2:5-18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를 눈 감아 주는 것으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면, 왜 예수님은 낮아지셨겠는가?  왜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고, 1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필요한 일”이고, 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땅한 일”이 될까? 왜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까지 기도하셨는데(마 26:39), 십자가를 지게 하셨겠는가?

만약 그냥 빚을 탕감해주는 것처럼 우리 죄를 하나님께서 없는 셈치시면서 용서해주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님은 혈과 육을 입고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어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하셨으니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건 정말 불필요한 일을 한 것 뿐이다. 어리석은 일을 한 것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모욕하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속량’이라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셨다고 말할 때, 그 안에 죄 용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속량’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완성, 하나님의 진노의 해소와 같은 중요한 개념이 들어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죄를 모른체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죄에 해당하는 값을 치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셨을 뿐 아니라 화목제물도 드리셨다.

생각해 보면, 실제적으로 죄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어야 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측면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신 분이었다면 애초에 죄에 대한 형벌도 없고 멸망도 없다. 따라서 구원도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셔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우리가 해결해야할 궁극적인 문제가 거기에 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죄를 눈감아 주실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동그란 네모를 만드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일관성을 깨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일이다. 마땅하지 않은 일이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 마땅한 것은 그 둘 다가 충족되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을 드리시는 것으로써 해결해 주셨다.

3:23–26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범사에 우리와 같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신 일이다. 속량하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를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지 않으신다. 물론 하나님은 믿는 자를 징계하시긴 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하는 것이지 재판관으로서 죄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이미 끝난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같은 죄에 대해서 두 번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일사부재리(이중처벌금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로 인해서 다시 진노하시고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요한일서 1:8에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말한 것이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가능한 것 같은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과 의로움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우리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당하신 진노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 언제나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리고 믿고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 중에 있던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주었을 것이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면 우리의 죄는 속량되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고난(환난)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는 아니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구약의 욥의 탄식을 보면 그는 현실의 고난으로 인해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적이 되셔서 그를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는 아버지의 징계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재판관의 형벌처럼 느껴졌었다. 욥은 분명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그에게 드러났던 계시와 약속이 지금의 우리와는 달랐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욥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이후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마찬가지고,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의 종착지는 멸망이 아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진노를 그치게 하셨다. 우리의 결국은 심판이 될 수 없다.

그래도 지금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지난 한 해가 그런 시간들이었을 수 있고, 다가 올 한 해가 그런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가장 힘든 때라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든 날이 될 것이다.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의 운명은 반대였다. 지금이 가장 좋은 날이고 영원한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바꾸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해야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지금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에도 동일한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신다.

시험 중에 도움 –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를 어떻게 살게 하는가?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는 이 말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너무나 하고 싶었을 것이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계속 되는 질문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사는 것이, 그래서 고난을 받는 것이 옳은지, 혹 그렇다면 그것이 가능하긴 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들에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셔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예수님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시험과 고난은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우리는 시험을 받으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다는 것은 시험을 계속해서 견뎌냈다는 의미다. 시험을 견디지 않으면 고난은 없다. 욥의 경우를 보라. 욥이 시험을 견디지 않고 처음 사탄의 시험에 하나님을 원망했다면, 최소한 그 이후의 고난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더한 시험과 고난이 찾아왔었다.

광야에서의 40일을 마치고 사탄의 시험을 당하셨던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했을 때 그렇게 했으면 고난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배고픔을 더 견디셔야 했다. 계속되는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십자가보다 쉬운 길을 제시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것, 사탄에게 절하는 것, 그 자체로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시험이었고 예수님은 그 시험을 견디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삶을 사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그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는 것은 단 한순간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순종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의 평생이 그러했다. 예수님은 범사에 우리와 같은 몸으로 그렇게 시험을 받으시고 견디시면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분으로서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죄를 범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 똑같은 어려움을 당해봐야 도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건 마치 시험에서 100점을 맞는 사람이 어떻게 50점 맞는 사람을 도울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문제를 틀려본 적이 없으면 문제를 맞추게 도울 수 없을까? 그렇지 않다. “시험을 받는다”라는 표현에서 이미 그것에 패배했을 때의 위로를 생각할 만큼 우리는 패배에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시험 받는 자를 도우신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시험을 이길 수 있게 도우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시험을 견디신 분으로서 능히 우리를 도울 수 있으시다.

또한 예수님이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는 말을 예수님은 우리처럼 시험(유혹)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100kg의 무게는 그것을 들어본 사람만이 안다. 이미 50kg을 들으려다가 포기한 사람은 100kg의 무게를 알 수 없다. 예수님이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험의 가장 강력한 강도였다는 의미다. 그래서 웨스트콧은 이렇게 말했다.

B. F. 웨스트콧, <히브리서>, 59. 그분이 당한 시험을 통해 죄를 동정하심은 범죄의 경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유혹의 강도를 경험하는 것에 좌우되는데, 그 완전한 강도는 무죄한 자만이 알 수가 있다. 유혹에 넘어지는 자는 최상의 압력을 겪기 전에 굴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험까지도 경험하셨다고 할 수 있다. 그 시험을 견디심으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런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시험 중에 우리들도 욥처럼 괴로워할 때가 있다. 때로는 원망이나 불평이 우리 입에서 쏟아져나올 때가 있다. 진짜 하나님이 사랑이신지, 진짜 지금도 나를 돕고 계신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것은 아닌데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가 연약한 자들로서 이 죄악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도 변하지 않고, 이 세상의 죄악됨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 믿음을 지키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더 쉽지 않다. 새해가 되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시다. 리처드 필립스는 이 단락에 대한 주석 끝에 이렇게 정리했다.

리처드 필립스, <히브리서>, 150. “하나님의 친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온갖 필요를 충족하는 완전한 구주가 되기 위해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에 대한 세상의 불평은 참으로 공허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고뇌의 세상 가운데서 탄식하면서 늘상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째서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제껏 요청하거나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흙먼지 속을 걸으셨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무덤 앞에서 우셨으며,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이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약한 자와 지친 자, 죄인 및 세리와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보다 성경에서 더 아름다운 장면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죄로 상처 입은 이 세상을 괴롭히는 가시를 취하셔서 자기 머리에 쓰실 면류관을 만드셨습니다. 사랑으로 팔을 벌리심으로 창조물을 빚던 손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우리를 정복하려는 모든 것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 죄를 속량하셨고 지금도 죄와 싸우는 우리를 도우신다. 그러기위해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이제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이 시험을 견딤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하신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우신다. 죄로 인해 여전히 넘어지고 고통 받는 우리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도우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도전

결국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이름들은 우리를 구원한 이름들이다. 죄에서 구원한 이름이고 지금 우리 삶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름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여전한 죄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죄의 시험이 있고 유혹이 있다. 그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붙드는 것이다.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명령은 아주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그냥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생각 자체를 깊이 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 일상이 바쁘다. 시간이 있어도 그 시간들을 다른 것들로 채우고 있다. 이런 것들은 해야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것들로 우리의 시간을 지우고 있다. 중간 중간에 있는 약간의 시간들은 스마트폰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도 모르게 생각이라는 것을 점점 덜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을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다고 말하는 그런 생활 습관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잡아야 한다. 일부러 예수님을 더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것들은 무엇이든 제거 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했을 때 누릴 수 있는 유익들이 많이 있다.많은 유익들 중에 아마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을 더알수록 예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괴롭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것은 사실 그만큼 예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는데, 내 마음이 그렇게 쉬고 있지 못하다면 잘 배우고 있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식으로도 예수님을 더 알아야 하고 경험으로도 알아야 한다. 알아야 즐거워할 수 있다.

다른 것들은 깊이 알다 보면 실망스러운 부분들이 생기기도 해서 너무 깊이 알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 사람이 그렇다. 정말 괜찮아 보였던 사람이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운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실망할 것이 없다. 놀랄 것만 있다. 즐거워할 것만 있다. 그러니 힘을 다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더 알아가자. 더 순종하자.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더 알고 더 사랑해야 한다. 계속해서 더 깊이 예수를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한 해가 우리 앞에 어떻게 펼쳐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욱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그것이 우리 삶의 변하지 않는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