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낮아지심의 이름들(3)
본문: 히브리서 2장 5-18
설교자: 최종혁
크리스마스가 뭐하는 날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아이들은 선물 받는 날이라고 답할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뭐하고 싶냐고 물으면 선물 받고 싶다고 할 것이다. 질문에 답하는 대상이 달라져도 사실 답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장난감 선물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하는 식사와 같은 것들로 바뀔 뿐이다. 혹은 자신이 그동안 기다렸거나 소망했던 다른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할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그런 날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위한 방이 없다. 여관에 방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에 방이 없다. 예수님은 시간이 지나 어느 한 구석에 의미없이 놓여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것 자체가 그렇게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 마음 한켠에 있긴 하지만 이제는 크리스마스에서 예수님을 빼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이렇게 변질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크리스마스가 구약의 안식일처럼 우리가 지켜야하는 어떤 날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이나 침례처럼 우리가 지켜야 할 어떤 의식도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변질되면서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 그 목적,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구원자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마스가 말하는 예수님의 낮아지심, 즉 성육신이 중요하고 그 의미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진리다. 어쨌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크리스마스가 이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난 몇 주간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이름들이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2장 5-18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그 결과로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다. 오늘 본문 14-16절에서 우리가 보게 될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이름은 ‘해방자’,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이시다. 특히 이 이름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필연성’, 왜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야만 했는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준다. 그 필연성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간단히 말하면 혈과 육에 속한 자녀들을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기위해 예수님은 낮아지셔야만 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
먼저 14절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확고하고 놀라운 진술로 시작된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
여기서 “자녀들”은 바로 앞의 문맥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께서 구원한 자들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다. 피와 살, 즉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다.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특히 사람의 연약함과 한계를 강조한다. 이것이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구원할 사람들이 혈과 육에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렇게 되셨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말씀을 보면 계속해서 예수님과 우리 사람들의 연대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처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가 되기 위해 우리의 고난에 뛰어 드셔서 실제로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 믿는 자들도 영광에 들어간다. 예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믿는 자들도 거룩하게 함을 입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구원 받은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예수님은 그들을 형제라 부르신다.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이루어진 일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사람이 되시지 않고 사람처럼 되셨어도 가능했을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읽었던 14절의 말씀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한다. 예수님이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자녀들”(사람들) 사이에 차이는 존재한다. 자녀들은 본래 혈과 육에 속한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자녀들의 특징, 즉 인성을 취하셨다. “함께 지니셨다”는 말은, 인성은 예수님이 본래 가지고 계시던 특징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내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혈과 육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 혈과 육을 취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육신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이런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시지 않았다.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예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신은 되셨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도 동일하게 말했다.
빌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혈과 육은 우리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신 분이 그렇게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래 낮은 분이 아니라 낮아지신 분이시다.
흥미롭게도 교회의 초기 이단들은 대부분 이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하면서 생겨났었다. 이 둘을 함께 조화롭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한쪽을 부정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쪽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분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최초의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부여 받았다거나 혹은 가장 완벽한 삶을 산 인간이어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받아주셨다던가 하는 주장들을 했다.
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위해 인성을 부정한 경우도 있었다. 예수님이 진짜 사람이 되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던가 혹은 빙의된 것처럼 사람의 육체를 잠깐 빌리셨다거나 하는 주장들을 했다.
이런 주장들이 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일단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온전히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성경의 말씀은 앞서도 우리가 다루었듯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러니 둘 중 하나를 부정하면 훨씬 이해가 쉬워진다.
여기에 실제적인 의미를 추가하면 더욱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본래 예수님은 사람이셨다고 하면,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 잘 아시고 또 그런 연약함을 이기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예수님이 진짜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이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훨씬 쉬워진다.
이단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지금도 그렇다. 더 설득력 있고 실용적인 이야기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조심해야 한다. 요한도 그 당시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요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성경의 진리는 우리 입장에서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맞다. 논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논리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 혈과 육을 입으셨다. 그래서 유일한 하나님이자 사람인 존재가 되셨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야할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다. 왜 부족할 것 없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다.
성육신의 이유
사람이 신 혹은 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더 강하고 지혜로운 존재,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은 낮아지심이다. 굳이 왜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답은 이렇다.
히 2:14–15 …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혈과 육이 있는 사람이 되신 것이다. 영생이 지겨워져서 존재를 소멸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예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일이 두 가지 언급되어 있다. 하나는 마귀를 멸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 노릇 하는 자를 놓아 주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마귀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이고, 종 노릇 하는 자들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평생을 그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 종 노릇하며 산다. 이것이 이 땅을 산, 그리고 살고 있고 살게 될 모든 사람들의 상태다. 그들이 처한 재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모두가 자기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의 죽음과 그 세력을 잡은 마귀의 종으로서 살 뿐이다. 예수님은 이 종살이에서 사람들을 해방하시려고 사람과 같이 혈과 육을 입고 죽으셨다는 말이다.
먼저, 마귀, 즉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잡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자. 이 말은 그가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삶 뿐 아니라 죽음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계시록 20장을 보면 하나님은 마귀를 영원한 고통 속에 가둬두실 뿐 아니라, 사망과 음부까지도 둘째 사망인 불못에 던지실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원수가 예수님의 발 아래 놓이게 될텐데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말했다(고전 15:26).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주관하는 자가 사망은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명이 없는 상태가 곧 사망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죽음의 주관자이시기도 하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계 1:18).
욥에게 있었던 일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시면서 그 한계를 정하셨고, 그 중 하나가 욥의 ‘생명’이었다. 사탄이 죽음에 대해 궁극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다면, 죽은 자를 살리지는 못한다해도 산 자를 죽일 수는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그보다 더 높은 왕이셨고 그분이 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면에서 사탄이 죽음의 세력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죽음의 힘을 가장 잘 이용했다는 면에서 그렇다. 사탄은 죄를 통해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이 살게 하고 또한 죽게하여 그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사탄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라는 말의 의미다.
사탄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했다. 그들을 죄로 유혹했다. 사탄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고 물었는데(창 3:1),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 알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로 ‘죽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탄은 바로 그 죄와 죽음을 세상 가운데 들어오게 하려고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했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결국 사탄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서 살아간다. 한번 죄와 죽음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 보라. 누구도 아프지도 않는다.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누구도 서로를 속이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다. 남에게서 무엇을 빼앗지 않는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도 없다.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는 유토피아가 바로 이 땅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히려 지옥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진짜 현실은 또 다르다. 사람들은 이런 삶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원래 우리 삶이 이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의 삯인 사망이 우리로 이렇게 살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종이 된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서 진짜 지옥으로, 진짜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죽음 너머에 있는 진짜 죽음(영원한 죽음)으로 사람들을 데려간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 잡은 사탄의 최종 목적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죄로 유혹한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이 당연한거고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속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전 3:11). 세계 어디를 가도 장례 문화가 있고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은 죄로 타락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영원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테 사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게 만들거나 혹은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이 아닌 다른 내세관을 믿게 만든다.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은 선형이다. 즉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타 종교는 윤회 사상을 말한다. 윤회 사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희망은 무엇인가? 계속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엉망으로 살아서 다음 생에는 벌레로 태어날지라도 어쨌든 기회는 있다는 희망을 준다. 안타깝지만 기독교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가톨릭도 이런 면에 헛된 희망을 준다. 연옥의 교리가 그렇다. 죽음 이후라도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어쨌든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사탄은 세상의 종교를 통해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열심이나 헌신이 아니라, 우리를 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줄 해방자가 필요하다.
요즘은 이성과 과학에 따라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 본 어떤 과학 영상에 나온 과학자들도 모두 죽음 자체는 존재의 소멸일 뿐이기 때문에 전혀 두렵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정말 두렵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그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해서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열중하여 죽음을 그냥 잊고 산다. 이것도 꽤 흥미로운 모습이다. 우리는 무언가 두려운 것이 있거나 싫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잊으려고 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험 공부를 하다가 조금만 어려운 것이 나와도 폰을 집어 들고 숏츠를 보거나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사실 거기에 있다. 도파민 중독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기 싫은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쁘게 살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냥 사는게 바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 당장 사는게 중요한데, 교회니 구원이니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의 얘기처럼 들린다고 한다. 그냥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미래가 중요하다. 다음 주에 있는 시험이 중요하다. 아니, 그 전에 이따가 친구들하고 할 게임이 더 중요하다. 대학에 가고 돈을 잘 벌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게 중요하다.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면서 삶을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순리가 되는 죽는거지, 남들 다 죽는거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렇게 사탄은 오늘날의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탄의 입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을 때까지만 종으로 잘 잡아두면, 그 후로는 걱정할게 없다. 그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영원히 분리되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게 되겠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은 성경이 말하는 내세와 영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그가 바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혈과 육을 입으셨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노예가 된 그들을 해방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죽으셨다. 죽어야 하셨다. 이것이 참 놀라운 성경의 역설이다. 존 오웬의 말처럼, 예수님은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셨다.
그럼 왜 죽음으로만 이것이 가능했을까? 죄의 삯이 사망,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죽음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그 삯이 되었다. 사람보다 못한 짐승의 죽음은 죽음이 요구하는 값을 다 갚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한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모든 값을 다 갚고도 무한히 남는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음 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영원한 속죄가 드려졌고 이제 다시는 죄를 위한 죽음은 필요치 않다.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따라서 죄는 더 이상 죽음을 요구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 않으셨다. 자녀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죄에 대한 댓가가 치뤄진 것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은 더 이상 믿는 자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신 일이다. 단 한 번의 죽음이지만, 이 죽음으로 믿는 모든 자는 죽음이 아닌 생명에 이른다.
롬 5:18, 21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지니셔야 했던 필연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자녀들을 대신하여 죽으려면 죽을 몸이 되셔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승리를 선포하셨다. 혈과 육에 속하여 죄와 사망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 그 두려움 가운데 평생을 종 노릇하며 살던 자들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해방하셨다. 죽음의 해방자가 되신 것이다.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운명만 바뀐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음 때문에 평생을 종 노릇하며 살 사람들이 이제는 죽음과 관계 없이 평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이러했다.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몸으로 있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고 떠나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어디든 상관없다. 어디서든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고, 그 삶을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의 소망에 대해 기록하면서 그 마무리를 이렇게 했다.
고전 15:55–58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 났기에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끝을 앞두고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그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강권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딤후 1:10–12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믿는 자는 이런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지배에서 사람을 해방하신 해방자, 예수님을 바로 내 영혼의 해방자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모두가 이런 확신과 소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끝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누구를 위한 성육신인가?
히 2: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영적인 존재여서 죽지 않는 천사를 위해 하신 일이 아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기 위해 하신 일이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독자들이었기 때문에 저자는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지만, 꼭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서 회개할 것을 촉구 했었다. 결국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 믿는 자들을 붙들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지니시고 죽으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 자체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직접 지칭하는 표현으로 들렸을 것이다. 천사가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지니셨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이 말씀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같이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시려고 혈과 육을 입으셨다. 바로 나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앞서 오늘 본문은 성육신의 필연성을 말해준다고 했었다. 예수님만 생각한다면 성육신의 필연성을 말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취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예수님께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혈과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범해서 죽음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시려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취하셔야만 했다. 이것이 성육신의 필연성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근본적인 필연성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앞서 말한 필연성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결정하셨을 때 생겨나는 필연성이다. 그럼, 애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하는 필연성도 있었을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다. 하나님을 이미 배반한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운명으로 맞는 것이 하나님께 조금도 손해가 될 것이 없다. 유한한 하나님이라면 혹 그런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다. 우리도 어차피 시간과 자원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으면 좀 맘에 들지 않아도 그냥 쓰거나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아까워서 우리를 그냥 버리지 못하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유한한 존재도 아니시다. 시간, 공간,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무한하시다. 하나님 입장에서 아쉬울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혈과 육을 지니셔야했다. 필연성이 생긴 것이다.
나의 어떠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버려도 되는데 버리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말이 좀 차갑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하나님은 이 선택이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피조물과 같이 혈과 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알고 이 선택을 하셨다. 사람의 아기로 태어나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선택을 하셨다. 배가 고프고 피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선택을 하셨다. 인간으로서 기쁨과 슬픔이 무엇인지, 이별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체험해야 함을 알고 이 선택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찾아온 사랑은 이런 사랑이었다. 예수님의 우리 죄의 해방자가 되셔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셨다. 이 선택이 바로 사랑이다.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도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도 우리를 구원하기를 선택하셨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어떤 선물을 기대한다면 바로 이 예수님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선물보다 큰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제 우리가 그 선물을 받을 차례다.
우리가 오늘 예배의 마침 찬양으로 함께 드릴 찬양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다. 이 찬양의 영어 가사에는 이런 표현이 있는데, 우리말 가사에는 생략되었다. 바로 “모든 마음이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라”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우리를 위해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지셨던 예수님을 위한 자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