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날 때부터 눈 먼 사람(들) 2
본문: 요한복음 9장 6-34절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 우리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벌어진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고통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봤었다. 제자들은 (그리고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은 나쁜 것이며, 개인의 고통은 개인의 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고통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나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또한 개인의 고통이 반드시 개인의 죄의 결과는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다. 주권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나와 우리 삶의 고통을 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육적으로 또 영적으로 깊은 어둠 속에 있었던 맹인은 이런 하나님을 봐야 했고 만나야 했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보셨고, 이제 그에게 이런 하나님을 나타내 보게 하실 것이다. 맹인의 육적인 눈을 뜨게 하셔서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영적인 눈도 뜰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의 빛으로서 계속해서 해오셨던 일이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은 그 빛을 비추시고 이 빛은 육적인 맹인에게 뿐 아니라 영적인 맹인들에게도 환하게 비추어 질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이 비춰질 때, 진짜 맹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밝히 드러나게 된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가 드러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모습과 그 빛 앞에 눈을 감고 있으면서 스스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절대 눈을 뜨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더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이 바로 이런 자들로서 등장한다. 이들이 분명한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유의해 보라. 그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불신(믿음없음, 믿지않음)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보자.
예수님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세상의 빛으로서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해야함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다시 맹인에게로 시선을 돌리신다.
요 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 말씀을 읽으면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왜 하필 침인지, 왜 하필 진흙인지가 궁금하다.
-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이 사람에게 새로운 눈을 주셨다는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당시 랍비들의 일반적인 믿음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장자의 침에는 치유의 속성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믿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는 꽤 일반적이기도 했다. 비슷하게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분비물(배설물) 부정하지만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손을 통해 축복의 도구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주장도 있다.
- 혹은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제단 주위에 물을 부어서 이적의 의미를 더 극대화 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목적으로 진흙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눈에 진흙을 발라서 더 안보이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깨시려고 일부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반죽을 만드는 일)을 하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뭐가 맞을까? 어느 의견이든 맞을 수 있고 틀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밝히지 않으셨고 앞뒤 문맥을 통해 유추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다른 경우에도 이적을 행하실 때 침을 사용하셨던 적이 있다(막 7, 8장). 하지만 그때는 진흙을 사용하지는 않으셨다.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그저 말씀으로만 병자들을 고치셨었다. 권위와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은 굳이 침이나 다른 어떤 도구가 있어야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단지 치료를 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적을 보여주셨다. 그러기 위해 의료 도구나 행위 혹은 주술적 의식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서 왜 하필 침인지 왜 하필 진흙인지에 대한 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만들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침을 모아서 그곳에 있는 진흙과 잘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면 어떤 맹인의 눈도 뜨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치 구약에서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을 때 나병이 나았던 것과 같다. 굳이 요단 강이어서 병이 나은 것도 아니고 일곱 번 씻어서 나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엘리사가 요구했던 것이었고 나아만이 그대로 했을 때 그는 깨끗함을 받았던 것 뿐이다.
여기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하신 일도 그와 같다. 물보다 침이 더 치유에 도움이 되었다거나 거기에 진흙까지 더하면 효과가 강력하거나 했던 것이 아니다. 침이나 진흙 자체로서 무슨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더 분명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의 믿음을 증명하는 순종의 매개체로서 침과 진흙, 그리고 실로암에 가서 씻는 것을 요구하셨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명령에 맹인이 순종했을 때 눈이 밝아져 태어나서 처음으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면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행위로 인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고 볼 수 있다. 맹인은 예수님께 순종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순종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복을 누렸다.
요한은 특별히 ‘실로암’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를 굳이 언급했다. 실로암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을 상징하는 듯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진 못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인은 그곳으로 보냄을 받았다. 뒤의 상황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맹인은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 시점에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했을 뿐이다. 그러자 그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이것이 이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눈을 떠서 보게 되었다. 침이나 흙이 효과가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맹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다면 눈에 보이는 어떤 말이나 행동 없이도 맹인을 보게 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예수님께서 맹인의 순종을 사용하셨던 것 뿐이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의 순종을 통해 일하셨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이야임을 그의 순종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주제와 조금 벗어나지만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과 순종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맹인을 눈 뜨게 하기 위해 침이나 진흙이 예수님께 필요했던 것은 아닌 것처럼, 엄밀히 말해 하나님께 우리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 원하실 뿐이다. 그분의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이다. 그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하고 감사함으로 그분의 일을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침이나 흙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우리는 하나님께만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맹인의 순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지만, 그것이 맹인에게도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굴복시키면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려는 악한 군주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명령하신다. 따라서 순종은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순종한 사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맹인을 통해 하시는 일은 그가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가 드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의 또 다른 중요 인물들인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볼 수 있게된 맹인과 이웃 사람들
맹인이 돌아오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당황했다.
요 9:8–9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분명 그들이 알던 맹인과 겉모습이 동일한데, 맹인이 더 이상 맹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 눈 앞에는 눈을 뜬 맹인이 있었고 그들의 생각에 맹인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그들의 생각을 따라 이 사람이 맹인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사실을 따라 맹인이었던 사람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과 눈 앞에 보이는 사실로 인해 혼란스러워 할 때, 맹인이었던 사람은 “내가 그라”라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요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질문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다. 여기 맹인이었던 사람은 정말 어둠 가운데 살아왔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축하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함께 기뻐하지도 않는다. 뒤에 보면 그의 부모가 나오는데, 부모도 그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고 긍휼히 여긴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 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만 궁금해 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가 볼 수 있게 되자 마찬가지로 그 사람 자체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가 침과 진흙에 관심을 빼앗기는 것처럼 이들도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맹인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아는대로 사실을 말해준다.
요 9:11–12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그를 실로암으로 보내신 후에 자리를 피하셨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예수라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그는 꼭 붙들었다. 이 시점에서는 맹인이었던 사람도 아직 그 이상의 무엇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뒤에 가면 그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낸다. 그는 이제 영적으로도 눈을 떴기 때문에 보는 자로서 사실에 제대로 반응했고 결국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말을 들었어도 사람들의 ‘어떻게’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이 일을 행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 바로 바리새인들을 찾아 간다.
맹인이었던 사람과 바리새인들, Round 1
요 9:13–15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 뽀족한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같은 답을 들었다. 그러고 나자 바리새인 사이에서는 다른 면에서 의견이 분분해졌다. 그들은 보게 된 맹인에게는 더 관심이 없었고 그 일을 한 예수님께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보게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결국 그 일을 가능하게 한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요 9: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사실 22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예수님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시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출교 시키기로 결의했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이후로 이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 바리새인 중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모든 일을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뜬 맹인이 서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그들 중에 분쟁이 생겼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진리에 가깝게 가긴 했지만 여전히 소극적이다. 이들도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눈 앞에 보이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결론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고 또 오늘도 조금 뒤에 보게 될 것처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었다. 그들 눈 앞에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인해 진리를 깨달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전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전제이자 결론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결론에 맞는 설명을 원했고, 그들이 찾은 설명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되고, (그들 생각에)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은 일이니, 예수님은 일을 한 것이고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을 지킬테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처음 눈을 뜬 맹인을 만났던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맹인은 눈을 뜰 수 없다는 자신들의 전제를 바꾸지 못해 그 사람이 맹인이었던 자가 아니라며 사실을 부정했던 사람들이다. 여기 바리새인들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바리새인들은 그런 분쟁 가운데 맹인이었던 자에게 묻는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느냐”(17절) 이들이 무슨 의도로 이렇게 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자신들에게 동조해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긴 했는데, 어쩌면 진흙이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안식일에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와 같은 답을 원했을지 모른다. 혹은 ‘실은 전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예수라는 자가 돈을 주고 맹인 행세를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와 같은 그들의 논리에 맞는 답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사실에 근거해 있었다.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17절)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불렀었지만 이제 그는 “선지자”라고 부른다. 다 알 수 없지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고려해볼 때 예수님은 그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현재까지 그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다르게 일어난 분명한 사실을 생각해 볼수록 그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부모
당연히 이 대답을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해놓은 결론을 뒷받침해줄 다른 사실을 찾고자 그의 부모를 불러왔다.
요 9:18–19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여기서 어떻게 해서 보느냐’는 질문은 맹인이었던 자에게도 했던 질문이지만 의도는 조금 다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너희 아들이 진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맞느냐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다. 맹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맹인이 보게 된 것도 거짓이고, 따라서 예수님이 죄인이 아닐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물은 것이다. 부모는 이렇게 답했다.
요 9: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바리새인들의 첫 질문에 이들은 사실대로 답했다. 아들이나 예수님의 편에 서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딱히 그렇게 답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둘째 질문에 대한 이들의 답은 이러했다.
요 9:21–23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제대로 된 사실을 말했지만, 둘째 질문에 대해서 이들은 거짓말을 했다. 물론 유대인 사회에서 ‘(회당에서의) 출교’는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이었기에 꽤나 두려운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이 두려워 자신들의 아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형편없는 부모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또 다시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이 부인하려던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언만 하나 더 더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부른다.
맹인이었던 사람과 바리새인들, Round 2
지금부터 나누는 이들 간의 대화는 매우 흥미롭다. 평생을 어둠 속에 살아왔던 사람과 평생을 빛 가운데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간의 대화다. 한쪽은 저주 받은 죄인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한쪽은 의로운 자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을 보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입장이 바뀌어 있다. 이들의 대화를 보자.
요 9: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또 다시 이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결론을 이야기하며 맹인에게 그것을 인정할 것을 강요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여기서는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했던 말과 정확히 같은 의미다.
수 7:19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뭔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는 죄인’이라는 그들의 생각이 틀릴리가 없으니 맹인이었던 사람이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다른 말을 해줄 것이 없었다.
요 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가 죄인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정말 모르겠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확실히 알고 말할 수 있는 이것이 중요하다는 강조의 의미로 한 말이다.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장 확실한 사실은 자신이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바리새인들은 죄인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에게 바리새인들이 다시 묻는다.
요 9: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반복되자 맹인이었던 사람도 이것이 진짜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따라 결론이 내려지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이렇게 반문했다.
요 9: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는 확신에 차 있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어쩌면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눅들어서 살았을 그는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 자신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실은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에 기초하여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답답한 모습을 비꼬며 당신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거냐고 말했던 것이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발끈하여 반응한다.
요 9:28–29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리새인들이 볼 때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의 제자였다. 모세의 제자인 자신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였고 따라서 모세의 원수였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예수님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5:46).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종교, 자기들이 만들어낸 하나님, 자기들이 만들어낸 모세를 섬기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지 못했고 바꿀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아마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의 결론은 동일했다.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에 맹인이었던 자는 사실에 기초한 올바른 결론이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또한 담대함으로 그들에게 설명해 준다.
요 9:30–33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간단한 것을 왜 모르냐는 말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 내가 그 증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야다. 세례 요한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도 자신이 메시야임을 그렇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맹인이었던 자의 부모들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자는 담대하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선포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요 9: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말씀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맹인은 눈을 떴지만,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과 자신들을 여전히 분리했다. 그는 누구의 죄 때문이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고, 설령 그가 지금은 눈을 떴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죄인인 주제에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냐면서 그를 비방했다. 자신들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죄인이어도 자신들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들의 믿음이 옳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그릇된 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은 사실을,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진리를 알게 한 사람을 내쫓았다.
부모들이 두려워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맹인이었던 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편에 선 것으로 인해 출교를 당했다. 또 다시 맹인이었던 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왜 나에게 자꾸 이런 일만 일어나냐고 원망과 불평을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다음 주에 이어지는 본문에서 보게 될 것이다.
교훈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 불신의 특징을 보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물러나서 진실을 보려는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들 자신이 진실이고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 반하는 사실은 부정했다. 그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을 욕하고 쫓아냈다. 그들은 완고했고 교만했다. 거짓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진리에 적대적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은 이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직접 물어봐도 동일하게 답할 것이다. 스스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불신의 특징이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그 불신의 견고한 성이 무너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살고 있는 사람에겐 어둠이 진리이겠지만, 하나님은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혹, 아직 이런 어둠 가운데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해야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의 문을 여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사실을 사실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미 믿은 자들도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믿었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지 않을 때 그렇다. 참된 삶이 무엇이고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생각을 따라 산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 눈을 뜨고 볼 수 있는데, 여전히 눈을 감고 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등대가 길을 안내하는데 자기 감만 믿고 다른 길로 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여주시면 그 진리에 따라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메시야를 만나 눈을 뜬 자들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