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낙심 말고 확신하라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6절
설교자: 최종혁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2절에 있다. 1-2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낙심하지 않고 확신 가운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는 특별히 바울이 사역과 관련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에 맞서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우리의 사역과 관련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본문에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 바울이 주님의 일을 했는지를 볼 수 있다. 오늘은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어떤 상황 속에서
1절에서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다. 좌절하거나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은 더 나아가서 그로 인해 옳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이렇게 할 이유는 없다. 이 말은 그 바탕에 ‘낙심할만한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이 깔려있다. 어떤 상황이 낙심할만한 상황이었을까?
바울은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실 때 이미 의도하셨던 부분이다.
행 9:15-16 [15]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바울]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어떤 고난들을 받았을까? 먼저는 실제적인 고난들이 있었다.
- 실제적 고난
바울의 사역을 주로 기록한 사도행전의 후반부를 읽어보면 바울이 어떤 고난들을 당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이 처음 다메섹에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바울은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을 탈출해야 했었다. 이후에도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그를 박해하고 쫓아냈다. 때로 사람들은 그를 돌로 치기도 했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이런 고난들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정리했다.
고후 11:23-27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아마 오늘날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 믿으시면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울의 삶이었다.
이런 실제적인 고난을 당할 때 그의 곁에는 그를 응원해주던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대적들이 안팎으로 있었다.
- 대적의 비난
그들은 바울과 그의 사역을 비난하고 깎아내렸다. 고린도후서는 특별히 그런 비난과 공격에 대한 바울의 해명이 많다. 그들은 바울이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10장에서 보면, 그들은 바울은 글에만 힘이 있고 막상 만나보면 별 것 아니라고 했다(1, 10절). 바울이 육체대로 행한다고 비난했다(2절). 바울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의 자신이 한 것처럼 자랑한다고 했다(13, 15절).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바울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하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11:13). 바울은 사도로서 부족한 자이고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서(11절)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사실은 그들이 그런 자로서 교회를 이용했다(19-20절). 12장에서 바울이 “부득불” 자신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를 언급했던 것도 그들이 바울은 그런 경험도 없다고 비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비난들 받았던 것이다.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 그래서 가장 원하지 않았던 바로 그런 일들을 그가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해, 그 의도에 대해, 그 자신에 대해 말도 안되는 비난을 받았다. 억울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속을 뒤집어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바울의 삶을 보면 그의 대적은 비단 거짓을 전하는 사람 뿐 아니라 내부에서 같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 중에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은 감옥에 있었는데 그 때 열심히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다(빌 1:14-17).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한 부류는 사랑으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다른 부류는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틈을 타서 자신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바울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거짓 전도자들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바울이 그들이 복음 전하는 것에 기뻐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다.
어쨌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서운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다.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낙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여기에 또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 열매의 부족
사실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고난이 많을 때라기 보다는 열매가 잘 보이지 않을 때일 것이다. 열매가 보이면 고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린다.
바울의 사역은 열매가 있는 사역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많은 영혼이 돌아오고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기대한 만큼의 열매는 없었다.
특히 그의 대적들은 바울이 당하는 고난을 열매와 연관 지으면서 바울을 비난했던 것 같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보면서 회개하라고 했던 것처럼, 그들도 바울의 고난을 보면서 분명 바울이 뭔가 잘못했으니까 저런 일을 당한다고 공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4장 3절에서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고 열매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하지만 바울 자신도 열매에 대해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뭔가 더 편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해야하나하는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혹 교회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는 일로 성도들이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웠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열매들, 보여지는 것들이 자신의 기대와 다를 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고난이 된다. 바울에게도 그런 고난이 있었다.
이 고난들은 바울이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당한 고난들이다. 즉, 그가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았기 때문에 당한 고난들이었다. 역으로 말하면 그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는 고난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낙심이 되지 않겠는가? 그만하고 싶지 않겠는가? 혹은 좀 더 쉽고 편한 방법을 찾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확신을 가지고
- 직분에 대한 확신
바울이 자신이 맡은 직분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1절에서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라고 표현한다.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직분 자체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그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먼저 “이 직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 “의의 직분”(3:9), “영의 직분”(8절), “새 언약의 일꾼 되기”(6절). 이 직분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직분이다. 영으로 살리는 직분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다(5:18).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는 직분이다. 이 직분은 새언약의 직분이고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이다.
바울은 새언약이 영광스러운 것이기에 새언약의 일꾼이 되는 직분도 영광스러운 것임을 강조한다.
윌리엄 맥도날드, 고린도전후서 in 신자 주석, 287 “옛 언약 아래에서는 오직 모세 한 사람만이 그의 얼굴에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갖는 특권이다. 또한 우리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잠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 모두는 실제로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 모세의 얼굴은 단지 투영된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내부로부터의 변화된 영광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서 드러난 이 영광, 그리고 이 영광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직분이었다. 이런 영광에 그가 당하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었다. 고난 때문에 이런 영광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다음으로, 이 직분은 ‘받은 것’이다. 바울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어떤 노력을 해서 얻어낸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선택하셨음을 말씀하셨다. 소명(부르심)인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 내가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직분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그가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이 사도로서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직분이 그저 지기 힘든 짐인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것을 “긍휼하심을 입은 것”으로 표현한다. 무슨 말인가?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짐이 아니라 ‘특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은 ‘혼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겨서 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뛰어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열심이 있는 사도였다. 그런 그조차도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것만큼 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수고를 번거롭게 하시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다. 일을 효율성이나 효과를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그렇게 하기를 즐거워하신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에 대한 이런 확신이 있었다.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은혜로 받았으니, 낙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 직분을 주신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배신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열매에 대한 확신
직분 자체에 대한 확신 뿐 아니라 열매에 대한 확신도 바울은 가지고 있었다. 왜 일한 만큼의 결과가 없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결과를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열매에 대해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확신은 일의 열매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먼저 왜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열매 맺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3-4절).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이 가리어서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 즉 사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혼미하게 했다는 것은 쉽제 바꾸면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다는 말이다. 복음이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사탄이 일하고 있다.
사탄은 계속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 바울 당시에도 그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한다. 믿고 구원 받은 자에게는 너무나 쉽고 명확한 복음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보지를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눈을 떠서 복음의 빛을 보고 그리스도 앞에 나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6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사람이 빛을 보고 빛에 반응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태초에 하나님은 어둠 뿐인 세상에 “빛이 있으라” 말씀 하셨고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바로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어두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 우리는 빛을 보고 빛에 반응하게 된다. 그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뛰어나서 이 빛을 찾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별 것 아니다. 어리석어 보이고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다. 영광스럽지 않다. 별로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세상의 철학, 종교에서 말하는 것들이 더 멋져 보인다. 그것이 훨씬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다.
하지만, 어두운 데 빛이 비치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시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된다. 복음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에 있어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확신이다. 하나님은 구원하고자 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이런 확신에 따라 바울이 어떻게 일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함께 살펴보자.
정리
바울은 우리가 볼 때 충분히 낙심할 만한 상황에 있었다. 많은 불평을 쏟아내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그런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직분의 열매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낙심하지 않고 확신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사도는 아니다. 우리에게 ‘직분’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라면 모두가 이런 직분을 받은 자들이다. 누구도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 예외가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이미 낙심해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 앉아 있다. 다른 길은 어떤지 한눈을 팔고 있기도 하다. 불투명한 미래가 겁나기도 하고 그저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이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낙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직분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 보라. 영광의 주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을 나에게 맡기신 것인지 생각해 보라. 나를 구원 하신 은혜 뿐 아니라 지금 살게하시는 은혜를 생각해 보라. 이 모든 것에 확신을 가지고 신념을 가지라. 우린 그냥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맡은 일이 있다. 우리는 모두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 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 모든 일에 낙심 말고 확신하라. 이 확신이 이 길 끝까지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