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누구를 닮았는가?
본문: 에베소서 5장 1-14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혹시 누구와 닮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외모가 비슷하게 생겨서 듣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성격이나 성향, 삶의 모습이 비슷해서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닮았다는 이야기할 때는 많은 경우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닮은 부분을 발견할 때인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모를 닮은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닮았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저희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저랬는데 나랑 똑같구나!’ 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의 모습이나 행동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그래서 자녀에게서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육신의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런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선택사항이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고 순종할 수 있는 명령입니다. 여기 ‘본받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특징을 따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을 닮는 것이고 흉내 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따라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보는 것을 따라 하는 따라쟁이입니다. 동생은 형이나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금방 따라하고 친구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따라 하기도 합니다. 보통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서 친구에게서 나쁜 말을 배워옵니다. 나쁜 말을 하는 친구는 아마도 부모가 했던 말을 따라했을 것입니다. 아이들만 그런 건 아닙니다.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합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따라합니다.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따라합니다. 세상의 모습을 보고 따라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따라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따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 하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 따라쟁이가 되어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쩌면 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나?!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닮을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더 부정적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의무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단순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할 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가시며 우리를 하나님 닮도록 역사하십니다.
또 다른 면에서, 하나님을 닮는다고 하면 좀 막연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이 뭐지?! 무엇을 닮아야 하는 거지?!’ 질문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의 어떠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모든 면에서 망가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하나님을 사람으로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닮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으로 성화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냥 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계속해서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측면에서 계속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따라쟁이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명령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같은 명령이 두 번 나옵니다. “행하라”는 명령입니다. 2절에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명령이 나오고, 8절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사랑과 빛, 이 두 가지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명령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랑을 말할 때 그 사랑의 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자신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본은 자기희생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자기유익을 버리고 자기만족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고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행할 때 모두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고 참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을 희생하는 진짜 사랑이 아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을 채우는 가짜 사랑을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모습으로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첫째는 음행입니다. 음행은 모든 성적인 죄를 말합니다. 음행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사랑에 정반대됩니다. 사람을 죄악으로 빠뜨리는데 엄청난 위력을 가진 사탄의 무기입니다. 성은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부에게 허락하신 선물이며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혼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단지 쾌락을 위해, 거짓된 사랑으로 나타날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온갖 더러운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음행이라는 성적인 죄와 함께 사용됩니다. 성적인 죄는 사람을 더러움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습니다.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부부가 아닌 관계에서 얻으려고 합니다. 혼전순결은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되었고 간통은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갖 종류의 더러운 죄들이 세상에 가득하기에 사람들이 죄의 더러움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죄를 더럽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선택사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 행하는 일입니다. 볼 수 없기에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탐욕입니다. 탐욕은 다른 죄들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을 말합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이방인의 특징으로 말했었습니다(4:19). 탐욕은 자신이 우선되지만 사랑은 자신이 우선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탐욕 때문에 눈이 멀어서 배우자를 버리고 자녀를 방치합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사탄이 탐욕을 가지고 가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무너뜨리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해 인생을 구렁텅이에 내던져 버립니다.
자기중심적인 탐욕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온갖 더러운 것, 음행으로 인해 어떤 결과들이 있는지 생각해볼 때,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마땅하지 않은 이러한 죄들은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행동뿐만 아니라 말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들은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합니다(5:4).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키우지도 말고 그 즉시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죄들이 성도에게는 마땅하지 않은 것,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죄에는 무서운 결과가 있습니다.
엡 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엡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다시 세 가지입니다.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 그리고 탐하는 자에 대해서는 추가 된 표현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 탐하는 자, 자기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은 우상 숭배자와 같습니다. 자기만족이 최우선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그 사람의 모습이라면, 이러한 죄에 계속 빠져있는 사람이라면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행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 그러하며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탐욕에서 나오는 가짜사랑, 그러한 죄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행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 가운데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명령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나님의 자녀는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기에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빛과 어둠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전에 우리는 어둠이었고 불순종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되었고 또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 곧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 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안에 있는 자는 그분과 함께 빛이 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멸망 받을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이 되었고 빛의 자녀로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빛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특징, 대표적인 것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빛이 된 자의 삶에 나타나는 열매는 첫째 착함, 둘째 의로움, 셋째 진실함
존 맥아더는 세 가지 열매에 대해서, 착함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의로움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진실함은 나 자신에 대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빛의 열매가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 나에 대한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엡 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분별하여 그 일을 행하는 것이고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일,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의 일을 책망하는 것이 빛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토록 계속해야 하는 질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욕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시험해야 할 것입니다.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살피고 나의 마음을 점검하고 돌이키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내 욕심대로 내 뜻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욕심을 그럴 듯한 포장으로 감추는데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이 자리 잡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온전히 자신을 드리고 순종하셨던 주님,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삶의 여러 상황들 속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생각하며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빛의 자녀로서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어둠의 일, 그 악에 대해서 책망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 그러한 삶이 어둠을 책망하는 일이 됩니다. 주변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면 그 자체가 악을 대항하는 것이고 사람들과 같이 더러운 말을 하는 대신 깨끗한 말을 하고 속이며 말하는 대신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어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다른 삶을 보여 주는 것이 세상의 어둠에 대해서 예수님의 빛을 비추고 그들의 실상을 보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술을 즐기며 술에 취해 있을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들과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빛으로 어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내와 남편을 두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여자를 만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부부의 모습이 어떠한지 보여주고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빛으로 어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단지 나를 얽매는 거추장스러운 사슬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다양한 이성을 만나고 즐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주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기에 순결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 빛으로 어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삶으로 빛을 나타내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의 어둠을 책망하지만 때때로 직접적으로 책망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기회가 되었을 때 지혜롭게 입술로써 진리를 전함으로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지 않도록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에 따라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악하고 부끄러운 일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빛의 자녀로서 행한다면 우리의 말은 더욱 설득력을 가질 것이고 세상은 우리를 다르게 보고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은 어둠을 드러나게 하고 빛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고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죄는 어둠 가운데 있을 때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달콤하게 보이고 마치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참 만족을 줄 것처럼 보이지만, 은밀히 행하는 그 모든 죄는 부끄러운 것이고 추한 것이고 더러운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면 죄는 그 실체가 다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찬송입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당시 교회가 함께 불렀던 찬송이라고 합니다. 언제 부른 찬송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 차이가 있습니다. 침례를 행할 때 부른 찬송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부활절에 부른 찬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찬양은 복음을 짧게 요약하며 죄의 어둠에 잠들어 있던 자가 예수님이 비춰주신 빛으로 말미암아 깨어나 일어나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오라고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식에도 어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 부활절에도 어울리는 찬송입니다.
우리는 전에 죄라는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깨우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빛으로 나오게 하셨고 우리를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합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며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책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이자 계속되는 질문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빛이요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빛의 자녀답게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며 참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비추는 자로 세상의 어둠을 책망하는 빛의 자녀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어둠에서 일어난 자로서, 죄의 잠에서 깨어난 자로서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태도로 반응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서 행한다면, 그렇게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예수님을 닮은 자로 산다면 나의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내 직장과 내 학교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교회에 그렇게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까요?
내 삶이 내 가정이 내 직장이 내 교회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인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다릴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내가 먼저 예수님을 더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여러분을 사로잡는 열정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 닮고 싶습니다. 예수님 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고민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것 때문에 질문하고 또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 그냥 듣기 좋은 구호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말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삶으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오늘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하기를 원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를 닮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