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
본문: 고린도전서 16장 13-18절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전서는 편지 형식을 갖춘 글이고(서신서), 본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 “권면과 끝인사” 중에서 “권면” 부분에 해당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나서 교회 전체에 확실히 남기고 싶은 권면을 골라 마지막으로 단순명료하게 전달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쓴 저자인 사도 바울과 이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 그 둘의 관계와 겪고 있던 여러 상황에 관하여 다음번에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편지의 시작이 아닌 마지막 부분 중 일부를 먼저 다루는 것은 첫째, 오늘 유평교회에서 동역자로 수고한 이들을 알아준 것의 의미를 더욱 풍성히 나누기 위해서다. 둘째로 결국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할지 결론을 먼저 익히면, 고린도 교회가 씨름하던 여러 문제를 상세히 다룰 때, 우리가 결국 어떤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갈 것인지 분명한 이정표를 먼저 세워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다섯 가지 권면(13-14절), 모범적인 세 사람(15-18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모든 성도가 다 함께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그 일에 충성하는 성도의 예를 보여주면서 그들을 알아 줄 것을 요청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알고, 누군가를 그런 삶으로 이끌어주는 귀한 본보기가 되자.
1. 다섯 가지 권면(13-14절)
다섯 가지 권면은 다음과 같다: 1) “깨어 있으십시오”, 2)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3) “용감하십시오”, 4) “힘을 내십시오”, 5)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새번역). 다섯 개의 현재형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다섯 가지 권면 모두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힘써야 할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① 깨어 있으십시오(γρηγορεῖτε): 생각하라
먼저, 교회는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기 위해 힘써야 한다. 잠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마 24:42). 고린도 교회는 왜 분열과 범죄, 무질서와 교만의 문제에 빠졌는가? 결국 경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시탐탐 사탄이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벧전 5:8-9). 언제든 유혹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막 14:38). 주를 향한 처음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항상 애써야 하고(계 3:1-3), 그렇게 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거짓 교사와 그들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오직 진리로 무장하여 경계해야 했다(딤후 3-4장; 벧후 2:1). 주가 곧 오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벧후 3:10-12).
원수 마귀는 성도가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무 바쁘게 살고 열심히 무언가 하느라고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성도가 잠시 멈춰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려고 할 때, 마귀는 긴장한다. 비로소 영적 전쟁을 치를 군사로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라”(히 3:1; 10:29).
②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στήκετε): 읽어라
계속해서 한 자리에 굳게 서 있으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서 있는 곳이 견고한지도 중요하다. 그래서 본문은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하는 것이다. 굳게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믿음 위에 서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앞선 명령인 ‘깨어라’가 믿음에 불을 켜는 행위라면, 두 번째 명령 ‘서라’는 계속해서 믿음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불순물이 가득한 연료는 불을 금세 꺼뜨린다. 순도 높은 고급 연료는 불을 오랜 시간 활활 타오르게 한다.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으려면 순도 높은 진리,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공급되어야 한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탄은 우리에게 구원하는 믿음을 빼앗을 수 없으나, 믿음의 내용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686p). 빛을 잃은 교회나 연약한 성도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모호한 지식이다. 굳게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견고한 터가 아니라 모래다. 그래서 바른 교훈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하다. 그것이 성도를 믿음에 굳게 서게 한다. 그러므로 ‘읽어라’(“읽지 못하였느냐”, 마 12:3).
③ 용감하십시오(ἀνδρίζεσθε): 담대하라
개역개정에서는 “남자답게”로 번역되어 독립적인 명령어처럼 보이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로는 분명히 2인칭 복수 명령어가 맞다: ‘너희는 용기를 보여라.’ 다른 말로는 ‘너희는 씩씩하고 굳세라, 담대하라’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깨어 굳게 서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숱한 패배로 좌절하고 나약해져 겁을 먹고 뒤로 발을 빼고 있는 것에 익숙해진 것뿐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우리는 이 담대한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주저한다. 이런 마음을 먹어도 이렇게 살지 못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겁을 먹은 것이다. 우리가 용기를 잃고 무기력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원수뿐이다. 주님은 우리가 담대하기를 원하신다.
교회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서 그를 믿기 때문이다(“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엡 3:12). 우리는 세상에 맞설 힘이 부족해도, 주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다(요 16:33). 마귀를 대적하면 우리를 피할 것이라고 하셨다(약 4:7).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히 10:35). 날마다 담대하게 승리를 선포하라.
④ 힘을 내십시오(κραταιοῦσθε): 강하라
앞선 명령인 ‘용기를 내라’와 다음 명령 ‘강건하라’의 공통점은 수동성에 있다. 용기는 우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내기보다 예수님께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힘을 내라는 명령도 정확하게 말하면 힘을 구하여 얻으라는 간곡한 요구다. 두 명령어 모두 수동태로 사용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편지할 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기도했다(엡 3:16). 교회는 항상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세상과 맞서 싸울 담대함을 얻는다. 그리고 성도는 싸우는 동안 언제든지 성령님께 싸움에 필요한 지혜와 힘을 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새벽과 밤중에 깨어 아버지께 구하신 것처럼, 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즉시 구하셨던 것처럼, 후하게 주시고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께 지혜와 힘을 구하라. 그렇게 강건하라.
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γινέσθω) 사랑하라
성도 각자가 깨어 믿음에 굳게 서고 하나님께 얻은 담대함과 능력으로 죄의 세력과 싸우는 모든 일은 결국 다른 성도, 이웃을 사랑하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미성숙하고 변덕스럽고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점점 버리고 거룩하게 자라날 때, 성숙하고 일관성 있는 장성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가장 좋은 길, 사랑’) 시리즈를 통해 사랑이 무엇을 하는지 충분히 배웠다. 모든 일을 그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 이뤄야 할 분명한 목적이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별개로 여긴다. 믿음은 좋은데 사랑은 부족하거나, 사랑은 많은데 믿음은 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믿음과 사랑은 항상 함께한다(고전 13:13). 믿음의 수준이 사랑의 정도를 말해준다. 뜨거운 사랑이 강력한 믿음을 증명한다. 고로 ‘사랑하라’.
2. 모범적인 세 사람(15-18절)
이어지는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이름은 각각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이다(17절). 일단 세 사람은 고린도 교회 성도였다. 그들은 에베소에 있던 바울을 찾아와(17절, “온 것을 기뻐하노라”),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그에게 전달해 주면서(고전 7:1) 교회 소식을 알려 주었다. 고린도 교회 직접 갈 수 없는 부족함을 그들은 채워 주었다(17절). 그들을 통해 바울의 마음은 시원하게 됐다(18절). ‘소생하다’, ‘살아나다’의 뜻을 가진 이 표현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다시 한번 발견된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바울에게 와서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하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 이 세 사람도 바울을 살리는 교회의 간증을 전달해 준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지 소식을 전하는 전령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앞서 바울이 권면한 내용을 실천하여 교회에 본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18절 끝에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라고 권했다. 마땅히 존경하고 감사하고 인정하고 본받으라는 말이다. 단순히 고린도 교회 소식을 들고 온 점을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분명히 있었다.
라틴어 이름인 브드나도(‘행운’)나 아가이고(‘아가야에 속한 자’)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이름 때문에 출신이 노예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존경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이들을 본받고 존경해야 할 이유는 스데바나에 관한 설명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15절). 그는(그와 그 집에 속한 사람들) 아가야의 첫 열매였다. 사도 바울은 편지 초반에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고 말했다(고전 1:16). 아가야 지역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처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면서 동시에 이후로 맺은 열매들을 거두는 데, 많은 수고를 한 일꾼이었을 것이다(고전 15:20,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바울이 직접 칭찬한 내용이다: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15절). 그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작정했다. 그들의 섬김이 자기 유익이나 평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봉사라는 것을 교회가 다 알았다.
이어서 바울이 하는 이 권면에 주목하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같은 사람들과(예: 스데바나의 집)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예: 브드나도, 아가이고) 순종하라”(15-6절). 이들이 고린도 교회 임명된 목사(장로)였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흥미로운 건, 교회가 유명한 일꾼의 이름으로 각각 분열될 때,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자랑하는 이들은 있어도,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를 내세우는 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 무명이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들의 섬김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집사들을 세울 때처럼, 초기 교회가 일을 맡겨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일은 필요가 눈에 띄면 그 필요를 채우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졌고 지금도 그러하다”(695p). 직분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진다(사랑의 봉사).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섬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지 않고 아무도 함께하지 않아도 먼저 앞장서서 행한다. 바울이 권한 것처럼 모든 성도는 바로 이런 자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계속 홀로 일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이런 자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감사하고 또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주님의 모습을 엿본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며, 죽기까지 그들을 섬기신 주님의 모습을 본다. 우리 모두가 주님처럼 살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담대함과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계속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 사랑의 봉사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배울 수 있지만, 주님은 그분을 닮은 모범적인 성도를 통해서도 주님을 배우게 하신다.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는 서로 주님을 닮도록 이끌어주는 교회다. 믿음에 굳게 서도록 서로 돕고, 죄를 경계하고 멀리하도록 피차 권면하며,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도록 말과 솔선수범으로 격려하는 교회다. 직분도 은사도 성별과 연령과 배경도 모두 다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 함께 지어져 가는 건강한 교회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