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4: 기도는 함께

본문 :  마태복음 6장 5~15절

설교자 : 조정의

기도의 네 가지 본질을 배웠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틀로 빚어야 한다.

첫째, 기도는 관계다. 관계가 없는 기도는 허공에 외치는 주문이다(이방인). 사람 앞에서 하는 자랑일 뿐이다(유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기도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와 그분의 자녀가 누리는 교제다. 그래서 기도는 아주 특별한 은혜, 특별한 권리이다. 

둘째, 기도는 예배다. 관계 안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자세가 있다. 아버지와 대화할 때는 공경이 요구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로 나아갈 때 역시 우리는 경외심을 갖춰야 한다.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장착되어야 할 기도의 자세 곧 예배의 자세이다. 

셋째, 기도는 신뢰다. 우리의 물질적, 관계적, 영적 필요를 구할 때, 우리는 염려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과 회복과 보호를 신뢰한다.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시는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자백하면 아버지께서 죄를 사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지키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신뢰하며 필요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신뢰다.

마지막 기도의 본질은 기도의 공동체적 특징이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가르쳐주신 기도로 우리가 함께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5, 8, 9, 14, 15). 무슨 말인가? 너희가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문에서도 “우리 아버지”(9), “우리에게”(11), “우리가 우리에게”(12), “우리 죄를”(12), “우리를”(13)이란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셨다. 왜? 우리를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현대사회는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그러면서 기독교 진리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기도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가 ‘각도’(각자 기도)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를 위한 대표 기도가 어색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만찬 예배 시간에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게 왜 어려운가? 많이 안 해봤기 때문이다. 개인을 위한 기도를 자주 하지만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할 일이 별로 없다.

유평교회 기도 제목 책자엔 117가정의 성도 기도 제목이 적혀 있다. 그리고 제일 앞에는 교회 전체를 위한 기도 17개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자주 성도 가정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약 5:16). 하지만 우리는 우리 전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자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먼저 살펴보자.

1. 함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

첫째, 우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골 3:15).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대일 관계이면서 동시에 일대 다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면서 또한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이시면서 또한 ‘우리’의 신랑이시다. 주의 신부인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데, 그 몸은 여러 지체의 연합이다. 

결혼한 신랑이나 신부가 자기를 위한 기도만 하는 건 참 이기적이다. 상대방을 위한 중보를 해야 한다. 나아가 한 몸인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함께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지체된 우리는 다른 지체를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기억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그분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그분의 공급과 회복과 보호를 신뢰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자.

둘째, 성경엔 공동체적 기도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많은 공동체적 기도를 담고 있다. 구약시대 대표적인 공동체 기도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할 때 드린 기도다(왕상 8장; 대하 6장).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백성과 함께 통곡하며 기도했던 장면도 있다(스 10장).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예수님께 기도를 배운 제자들이 공동체적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교회는 맛디아를 세울 때(행 2장), 핍박받은 후 한마음으로(행 4장),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행 12장),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할 때(행 13장) 등 함께 기도했다(참고. 시편, 서신서의 공동기도).

특히 계시록 22장 3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을 세세토록 섬긴다고 말한다(섬기다, 예배하다). 기도의 예배는 영속성, 그것도 공동체적인 영속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종들(복수) 즉 우리는 함께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체적 기도를 이토록 강조한다면, 우리는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함께 기도할 때 함께 은혜를 경험한다. 국가대표 경기를 집에서 혼자 응원하는 것과 여럿이 함께 모여 응원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이기면 똑같이 기쁘지만, 체감하는 기쁨의 정도가 달라진다. 기도가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그분을 경험하기를,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더 크고 깊게 경험하길 원하신다.

가령 솔로몬의 봉헌 기도는 훗날 백성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회복의 약속을 붙들게 했다. 에스라의 회개기도는 백성이 함께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했다. 사도행전에서 온 교회가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인도하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걸 경험하게 하셨다. 특히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기도한 후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라고 말한다(31절).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공동체적 기도가 가져다주는 은혜다.

2. 함께 기도하자

첫째, 기도로 동참하라. 우리가 한 몸이란 사실은 우리가 지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만든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가장 많이 범하는 건 우리가 ‘기도하겠다’라고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어길 때다. 아버지가 투병 중인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식이 있나? 자식이 서로 원수처럼 다투는데 화목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는 부모가 있는가? 중요한 일을 앞둔 가족을 위해, 구원의 길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고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남보다 못한 사람이다.

조금 더 그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여 하늘나라 가족을 생각해 보자. 우리 중에 병과 싸우는 이들이 있다. 갈등 중에 가슴 아파 하는 이들이 있다. 코로나라 다들 어려운 짐을 지고 살지만, 남들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우는 이들이 있다. 교회 사역으로 성도를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두 손을 모으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한 몸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나는 교회를 내가 선택한 서비스 업체, 성도는 나를 위해 일하는 직원 정도로 여기는 셈이 아닌가?

유평교회 기도 제목 중 어떤 성도님은 ‘교회에서 실업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라고 기도 제목을 내셨다. 은사를 가지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자기 은사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섬길 기회를 얻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걱정하지 말라. 누구나 쉽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바로 기도하는 일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 기도로 동참하라. 교회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일에 기도로 동참하라. ‘기도하겠다’라고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로 기도하라.

둘째,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하라. 교회는 처음 시작된 날부터 기도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여기 기록된 네 가지 활동(가르침, 교제, 떡을 뗌, 기도) 모두 공동체가 함께 모여 힘썼던 활동이다. 

‘오로지~힘쓰다’는 여러 번 기도와 연결되어 사용되었는데(행 1:14; 6:4; 롬 12:12; 골 4:2), ‘전심으로 하다’, ‘고집하다’, ‘탁월하다’ 등의 뜻도 내포한다. 교회 사역의 핵심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교회는 전심으로 함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고집해야 한다. 함께 기도하는 일에 탁월해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함께 기도하기 위한 집회가 점차 사라지거나 매우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요일 기도 집회는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 많다. 수요일에 함께 기도하고 있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기도 제목 책자로 각자 기도할 수 있지만, 그 책자를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는가? 만일 소그룹이 모여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고 한다면, 당신은 얼마나 그 기도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는가? 얼마나 그 모임에 참여하기 원하는가?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아니,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생존할 수 없다. 교회는 함께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반드시 함께하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라. 기도에 최우선 순위를 두라. 오로지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라.

셋째,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훈련하라. 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일상에서 훈련이 가능하다. 남편은 가장으로 가정의 영적 인도자다. 가정에서 대표로 기도하면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자녀는 부모의 본으로 양육 받는다. 아빠의 기도로 기도의 본질을 맛보는 특혜를 입는다. 아빠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지식을 얻는다. 아빠의 기도에서 예배를 배운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에 동참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명하신 것을 보라. 하나님 구원의 손길을 기억하게 하고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게 하기 위해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가정이 함께 기도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와 살로 맺은 새 언약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면서 은혜를 함께 맛보지 않는가?

일상에서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실천하라. 식탁에서 가족과 함께 둘러앉았을 때,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는 기도 제목을 자녀가 알게 하고, 그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말해주라. 개인적인 기도도 필요하지만, 자주 가족 구성원, 성도와 함께 기도하라. “우리 같이 기도할까요?” 이 말이 당신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기 바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공동체를 위한 기도가 잘 훈련된 사람은 교회 전체를 위한 기도하는 자리에 서기 더 쉽다는 것이다. 평소에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예배의 날 교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표로 기도드리기 쉽다. 가정을 기도로 인도해본 사람이 교회를 기도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부지런히 훈련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잃어버린 당신에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신자의 영혼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호흡으로 몸이 사는 것처럼 믿음은 기도로 삽니다.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몸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19페이지).

기도하기를 쉬는 죄는 믿음의 호흡을 멈추는 자살행위와 같다. 기도에서 멀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다. 기도를 멈추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도 멈춘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게 되고, 기도를 쉬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도 쉬게 된다. 이래도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할 것인가?

기도의 영웅이나 기도의 위인은 없다. 영웅과 위인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의인의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힘이 많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인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임하신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자기중심적, 사람 중심적인 우상숭배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의 마음으로 가지런히 정리된다. 기도할 때 우리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하나님 주시는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지키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렇게 선언하자. ‘나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