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3: 기도는 신뢰다
본문 : 마태복음 6장 5~15절
설교자 : 조정의
11-13절은 우리가 주로 기도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기도, 우리의 필요에 집중된 기도다. 혹자는 앞서 다룬 기도의 관계적 측면, 예배적 측면을 간과하고 본격적인 기도는 지금부터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후반부에서도 우리는 기도가 관계이고 예배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14-15절에서 하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이고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기도다. 또한 11-13절까지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요청하는 모든 기도에서 예배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믿음, 신뢰를 발견한다. 그래서 “기도는 예배” 그리고 “신뢰”이다.
기도에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은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란 예화로 종종 강조되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실 때, 산 밑에서 남은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그러면 믿음만 있으면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도가 신뢰라는 것의 의미,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배워보자.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의 공급하심, 회복하심,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 믿음, 확신의 기도를 드리자.
1. 기도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11절)
기도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공급하실 것을 신뢰하는 고백이다.
11절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먹을 것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이 사용되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물질적 필요를 가리킨다. 논쟁이 되는 표현은 양식을 수식하는 “일용할”인데, 매일의 필요, 내일의 필요, 종말의 필요까지 구하는 것으로 범위가 넓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인은 아침 기도에서 오늘의 필요를 구하고, 저녁 기도에서 내일의 양식을 구하였다. 대부분 하루 일당을 받고 사는 이들에게 매일의 공급은 절실한 기도였을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가 실질적인 그들의 염려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냉장고에 음식이 가득하고, 옷장에 옷이 가득하며, 적어도 한 달 급여를 받고 큰 염려 없이 살아간다. 염려하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나, 그만큼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분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다는 걸 가르친다. 넉넉하고 풍족한 우리도 염려할 때가 있다. 병에 들거나 갑작스러운 경제적 타격을 입거나 간절히 원하는 배우자, 자녀를 얻지 못할 때 깊은 염려에 빠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6:34). 염려가 우리 상황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리어 기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능력이 있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간절히 구해야 한다(마 6:31-33).
신뢰가 있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나? 모세는 약속의 땅 앞에 진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우리는 떡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떡과 상관없이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구하는 것이다. 누구도 알지 못한 생명의 떡, 예수님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롬 8:32)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기도다.
2. 기도는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12절)
물질적 결핍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만큼 깨어진 관계는 고통을 가져온다. 다윗은 시편 6편에서 원수로 인해 탄식하고 피곤하며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토로했다(6절). 시편 51편에서는 자기 죄로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때, 구원의 즐거움을 잃고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서 쫓겨난 자처럼 괴로워한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를 겪고, 그럴 때 그 관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12절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는 빚과 같다. 갚기 전까지 나를 힘들게 만든다.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일으킨 범죄이고, 그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대가가 따른다. 누가 하나님께 자기 죄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탕감하셨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다 지불했다’고 선언하셨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죄를 짓는가? 그렇다. 그러면 이미 용서받았으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똥 묻은 자식도 자식이지만 그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먼저 오물을 씻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다음과 같이 하라고 명령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10).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바로 이 약속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 약속을 신뢰하고 자백할 때, 그분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할 때 회복하신다.
한 가지 흥미로운 단서가 붙어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형제자매를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정상참작해 주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용서를 구하는 자의 마땅한 태도를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로 설명하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진 종을 불쌍히 여기고 탕감해줬는데, 곧이어 만난 동료를 얼마 안 되는 빚 때문에 옥에 가뒀을 때, 주인이 어떻게 했는가? 너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용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는다. 참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다.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를 사랑하며 허다한 죄를 덮고 아들을 통해 죄인의 죗값을 모두 탕감하신 분께, 관계를 회복하실 것을 믿으며 구하는 기도, 그래서 기도는 신뢰다.
3. 기도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13절)
마지막으로 13절은 우리의 보호자, 아버지 하나님께 영적인 보호를 신뢰하며 구하는 기도이다.
13절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분인가? 야고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우리 믿음을 뿌리채 뽑히도록 흔들고 악에 빠지게 만드는 시험(유혹)은 사탄이 주도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에 악이 나온다(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한 자 마귀가 바로 우리를 죄와 그 파멸의 열매로 빠져들어 가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게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신다. 때로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그때 피할 길을 내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며 구하는 기도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이다. 이길 힘, 빠져나갈 방법을 달라는 기도이다. 그렇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철저히 의존하는 기도이다.
죄가 얼마나 강하고 끈질기고 파괴적인지 느낄 때, 사탄이 얼마나 강력하고 지혜롭고 악한지 체감할 때, 이 약속을 기억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
모든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함정에서, 울부짖으며 우리를 삼키려는 사탄에게서,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고(요 10:28), 아버지께서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약속하셨다(요 10:29).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다만 악(한 자)에서 구하시옵소서.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믿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풍족하게 공급하시는 아버지이시고, 놀랍게 회복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신실하게 보호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 아버지를 믿는다는 고백, 신뢰한다는 고백, 철저히 의지하고 그가 베푸실 것을 확신한다는 고백이 바로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신뢰고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서 이런 믿음을 보기 원하신다. 다윗의 기도 역시 예수님 기도의 본을 따랐다.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은 100세의 노부부에게 아기를 주신 분이다. 사별한 이방 여인에게 기업 무를 남편을 만나게 하신 분이다. 홍해를 갈라 적군을 피하게 하신 분이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없는 사막에서 40년간 매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공급하신 분이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를 보게 하신 분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섞일 수 없는 민족을 한 몸으로 만드신 분이다. 교회를 핍박하고 죽인 자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만든 분이고,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몰살하려는 사탄의 시도에서 자기 백성을 구하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분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셔서 자기 백성의 죗값을 대신 지고 죽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그 어떤 핑계도 만들 수 없게 한다. 당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당신의 기도에 얼마나 그 믿음이 뒤따르는가?
러시아의 한 고아원에 있는 아기들은 울지 않는다고 한다.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심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고아처럼 버린 아버지라고 오해하지 않는가? 갓난아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것뿐이라서 부모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고 부모가 자기 필요를 신실하게 공급할 걸 믿기에 운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떤 아버지라 생각하는가? 당신은 기도로 울고 있는가? 그 기도에 신뢰와 믿음이 담겨 있는가?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증거다. 아버지 없이 내 힘과 지혜로 살 수 있다는 교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