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2: 기도는 예배다
본문 : 마태복음 6장 5~15절
설교자 : 조정의
기도는 관계다. 기도는 숙제가 아니라 만남이고, 주문이 아니라 친교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누리는 기도의 축복과 은혜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 그때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있다.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기도의 본을 가르쳐 주시기 앞서 기도가 관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잘못됐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생각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요구만 하는 기도도 잘못됐다. 우리는 은밀한 곳에서 들으시고 우리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관계를 생각하며, 또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가 관계라는 사실은 우리 기도의 태도뿐만 아니라 방식 혹은 내용도 바꾼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과 인격으로 친교를 나누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에서 우리는 기도가 우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겸손히 그분께 복종하는 예배라는 사실을 배운다.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기도는 예배이고, 그래서 기도를 쉬는 것은 예배를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아야 한다.
먼저,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시작을 살펴보자. 9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9절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잘못된 기도를 금하신 후, “그러므로 너희는”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드려야 할 기도를 본격적으로 가르치셨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명령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런 기도가 삶의 습관이 되게 하라는 명령으로(현재형), 2세기 중반 디다케(8.3) 문서에 따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세 번 암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이 내용을 주문처럼 반복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모두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틀로 빚어지기를,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 모두 이 기도 원리를 따르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은 단지 그분이 계신 장소가 아니라 하늘에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라는 고백은 우리가 언제든지 기도로 친밀하게 그분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의 돌보심과 보호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담겨있다.
그러면 기도가 예배라는 사실을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전반부(9-10절)는 세 개의 요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하나의 연합된 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모두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 기도의 순서에 있어서 기도는 예배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 말미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33절). 그날의 필요를 하나님이 공급하신다고 굳게 신뢰하면서 가장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라고 순서를 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 역시 그 순서로 되어 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 둘째, 나라가 임하시오며, 셋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 모두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까지의 기도는 우리 영육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지만, 가장 먼저 제시된 기도는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 중심적이다. 십계명이 하나님과 관련된 법이 먼저 나오고, 이웃과 관련된 법이 나중에 나오는 것과 같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순서를 정하신 예수님은(마 22:36-40) 기도도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기도가 하나님을 위한 것,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의 필요를 구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린아이는 항상 자기의 필요만 구한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그 계획이나 생각을 들어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하지만 자녀가 자라면서 성숙할수록 점점 자기 요구만 하고 필요만 구하는 게 아니라 부모의 뜻과 생각에 관심을 두고 필요를 채우기 원한다.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성숙해진다는 증거다.
당신의 기도는 어떠한가? 당신은 먼저 하나님의 평판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자기 것만 요구하는가? 데이비드 터너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기 명분을 세우거나 자기 소원을 이루거나 자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구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우리 우선순위를 하나님 평판이 높아지고, 하나님 통치가 확장되고, 하나님 뜻이 실현되기를 구하는 것에 맞추는 것이다”(BECNT, 187p).
기도는 우리 마음의 묵상과 생각과 바람과 기대를 먼저 하나님의 것에 맞추는 예배이다. 죄성에 따라 항상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우리 육신을 쳐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도록 만드는 은혜의 방편이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쉰다면 우리를 제사장 나라 곧 예배하는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불충하는 죄, 직무유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기도는 예배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아야 한다.
2. 기도의 제목(내용)에 있어서 기도는 예배다
앞서 간단하게 살펴본 세 가지 기도 제목은 모두 종말에 온전히 실현될 내용이다(“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모두 부정 과거, 미래 도래할 역사적 사건).
하나님의 이름 곧 그분의 성품, 권위 등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라는 9절의 기도 제목은 종말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배반하며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행 4:25-26; 눅 12:32 참고).
10절에서 임하시기를 구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을 따르는 백성 안에 이미 시작된 측면도 있지만(눅 17:21; 계 1:6), 그 온전한 성취는 역시 종말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통치, 다스리심이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빠짐없이 미치는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보는 죄악과 그에 따른 고통은 모두 그날이 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역시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만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게 순종하며 살아갈 그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패역한 세대요(눅 9:41), 불순종의 아들들이 사는 시대다(엡 2:2).
이처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순서상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일 뿐만 아니라, 내용상 철저하게 하나님이 앞으로 이루실 것들에 맞춰져 있다(“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모두 수동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실 그분의 계획과 뜻).
때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그분의 의를 구하지만, 그 또한 지극히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다(삶이 괴로우니까 빨리 천국이 도래했으면,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에게 하나님의 뜻, 심판이 빨리 임했으면). 정말 아버지 하나님께서 멸시받고 거절 받는 상황에 분노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될 날을 기대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만국에 미쳐 모든 만물이 그 뜻에 굴복할 날을 갈망하는가? 그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예배다. 예배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나 그분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이 땅에서 내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가끔 구하며 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반역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을 정복할 것을 기대하는 백성이, 그 나라의 도래나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의 명예와 통치를 거의 구하지 않으면서, 단지 지금 머문 곳에서 잘 먹고 잘살 것만 구한다면 말이다. 다른 말로 그런 기도는 예배하지 않으면서 구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쉬는 건 죄고, 그런 죄를 우리는 결단코 범하지 않아야 한다.
3. 기도의 실천(삶)에 있어서 기도는 예배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순서상 하나님 우선적이고, 내용상 하나님 중심적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 뜻을 구하는 기도는 그래서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기도를 이런 원칙에 따라 드리는 자의 삶은 어떠할까? 하나님 우선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를 드리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 우선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 다시 말해 기도가 예배인 사람은 삶이 예배라는 것이다.
9절에 나오는 기도, 하나님께서 그분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길 항상 구하는 자는 어떤 삶을 살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삶을 살 것이다(고전 10:31).
10절에 나오는 기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며 그분의 통치가 온 세상에 온전히 미치기를 항상 간구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거룩한 나라로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며 살 것이다(벧전 2:9).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 삶에 이루어지도록 철저하게 그분께 복종함으로.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길 항상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겠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나타내신 뜻이 적어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되기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명령들을(뜻을) 지키는 것이 자기 본분이라고 생각하며 살 것이다(전 12:1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했다(롬 12:1). 어떤 사람이 이런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이 세대를 본받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 자기의 뜻이나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구하는 사람.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는 사람이다(롬 12:2).
어떤 면에서 우리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영적 예배가 되는 데 실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우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우선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예배의 기도를 드리면 예배의 삶을 살 수 있다.
욥은 사람으로서 당할 수 있는 고난을 최대한으로 받은 사람처럼 보인다.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식을 모두 잃고, 배우자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친구들도 자신을 정죄하는 상황에서 물론 낙심하고 탄식하긴 했지만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다. 에스겔은 욥을 대표적인 의인으로 꼽고(겔 14:14, 20) 야고보 역시 욥의 인내를 복되다고 칭찬했다(약 5:11). 그런데 비결이 뭘까?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욥 1:1). 그 대표적인 장면은 자기 생일잔치를 마치고 나서 혹 자녀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하여 번제를 드린 것이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기를 구하였다. 그것을 구했고 그것을 위해 살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히 11:38).
기도는 예배다. 그러므로 결단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는 영원히 예배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이다. 기도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는 없고 기도가 해결하지 못할 장애물도 없다.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환난 중에 오히려 예배의 기도를 드려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것이다. 세상을 넉넉히 이길 것이다. 예배자로서 항상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