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라
본문 : 시편 64편
설교자 : 최종혁
누군가의 행동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본 적이 있는가? 뭔가 굉장히 특별한 일같이 들리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는 일이다. 특별한 연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는 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생각을 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처럼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볼 수 없는 우리는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말, 행동, 태도, 표정, 결정 등)을 통해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고 자연스럽게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 6절 끝의 말씀처럼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어서 첫인상이나 어떤 하나의 행동만을 보고 사람의 참모습을 알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또 결과적으로 판단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다른 사람보다 그런 것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을 알아야 내가 그 사람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지, 의지할 수 있는지,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그런 것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떨까? 하나님은 사람처럼 숨기지 않으시고 가장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 쪽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쪽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하나님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다.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하나님의 생각은 높아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때로 우리 입장에서 어느 순간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믿고 의지할만한 분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들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했던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얼마든 다른 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치 그들을 구원해내서 광야에서 죽게 하려는 심술궂은 분으로 이해했다. 그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악한 분처럼 생각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그의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에서 계속해서 “기억하라”, “잊지말라”, “생각하라”고 말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새로운 환경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살아가야 했다. 전쟁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이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면, 또 다시 광야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오해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참된 예배의 삶이 된다.
시편 64편에서 다윗이 그렇게 한다. 다윗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삶에서 계속해서 경험했다. 목자였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자와 곰에게 승리하게 하셨고,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셨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울을 자기 손으로 폐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 그렇게 하신 것을 경험했다. 왕이 된 후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승리하게 하셨음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들을 통해 다윗은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에 따라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한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바로 전쟁인데, 특별히 ‘테러전’이다.
일반적인 전쟁과 오늘날에 자주 보이는 테러전은 전쟁의 양상이 다르다. 일반적인 전쟁은 전쟁을 먼저 선포하는 선전포고가 있고 그 후에 군대와 군대가 맞붙어 싸워서 상대의 항복을 받아내야 끝난다. 이 싸움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테러전은 다르다. 테러는 비밀리에 자행되는 것이 핵심이다. 상대편이 모르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한다. 그 공격으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위협하고 공포에 빠뜨려서 결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테러의 대상은 군대보다는 오히려 민간인일 때가 많다. 그것이 효과가 더 확실하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그리고 있다. 다윗은 두려워하는 무고한 시민이고, 다윗의 대적은 두려움이 없는 테러군이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은밀하게 다윗을 노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때, 전쟁이 결국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전체 이미지는 이렇다. 대적 때문에 두려워 숨은 다윗을 노리고 있는 두려움 없는 원수를 노리고 계시는 모두가 두려워할 하나님이 계심을 다윗은 알기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상황이다.
본문의 말씀은 그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다.
- 다윗(1-2절) : 두려워하는 다윗의 행함
- 악인(3-6절) :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의 행함
- 하나님(7-10절) :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행하심
두려워하는 다윗의 행함(1-2절)
시 64:1-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2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여기서 먼저 우리는 다윗이 상황을 조금 파악할 수 있다. 다윗은 ‘원수’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그 공격은 생명까지 위협하는 공격이었다. 그들은 분명 악을 꾀하는 자들이고 또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다윗을 해할 합당한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다윗을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 완전히 드러나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서 은밀하게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행함에 대해서는 3-6절에서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첫번째 반응은 근심과 두려움이었다. 공포에 질려서 어찌할지 모르고 통곡하며 걱정하고 불평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만날 때,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도 정상은 아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무서운 것이 정상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독이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짐승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다윗의 경우 지금 보이지 않게 음모를 꾸미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한 근심과 두려움이 있었고, 이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삶에서 정확히 다윗과 같은 상황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상황들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때, 더 이런 위협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생명을 위협 받지는 않더라도 생계를 위협받거나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할 때도 있다. 그런 일에 대해 우리는 근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의 반응이다.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더 나아가서 그것에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 그것은 올바른 반응이 아니다. 두려워하는 다윗은 원망이나 불평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무기력해지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1절), “나를 숨겨주시고”, “나를 감추어 주소서”(2절)
다윗이 이렇게 구하는 이유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전쟁이 결국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수 갚는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윗은 막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하게 행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
다윗은 어둠 가운데 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 갖혀있는 것 같다. 자신을 향한 공격은 분명하지만 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너무나 답답하고 원망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알렉산더 맥클러랜, “사람이나 슬픔의 벽이 제아무리 높고 답답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그곳에는 언제나 하늘이 보이는 작은 구멍이 있고 기도는 그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구했다.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의 행함(3-6절)
다음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이 어떻게 행하는지를 보자. 3-4절에서 다윗은 이들이 하는 일을 날카로운 활을 준비해서 숨어서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그린다.
시 64:3-4 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이들은 먼저 화살을 ‘연마하고’, 활로 잘 ‘겨누고’ 끝으로 ‘갑자기 쏜다’. 그 대상은 ‘온전한 자’ 즉 무고한 자다. 화살로 공격할 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렇게 하는데 어떤 두려움도 없다.
여기서 이들이 쏘는 화살은 ‘말’이다. 즉, 언어적인 공격이다. 이들은 자신의 말을 칼 같이 연마한다. 가장 큰 해를 끼칠 수 있도록 날카롭게 다듬는 것이다. 논리적인 공격, 감정적인 공격 등이 모두 포함된다. 깎아 내리는 말, 비방, 거짓, 뒷담화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말은 독한 말이 된다. 이렇게 잘 준비된 말을 숨은 곳에서 갑자기 쏜다. 공격을 받은 사람은 어디서 이런 공격이 왔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방어할 수도 없다. 그저 공격을 당할 뿐이다.
말은 정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약 3:5-8).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
죄의 무기로서 말은 장점이 많다. 휴대성이 좋으면서 파괴력이 강하다. 근거리 공격이 가능할 뿐 아니라 여기서 다윗이 묘사하는 것처럼 원거리 공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칼이 아니라 활로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직접적인 타격도 가능하고 간접적인 타격도 가능하다. 심지어 간접적인 공격은 갈수록 힘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기도 한다. 완전히 자신을 숨기고 공격할 수 있다. 다윗의 원수들은 이런 말의 특징을 잘 이용해서 그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들은 두려움이 없고 확신에 차있다.
시 64:5-6 5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6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들은 완벽한 무기를 준비했고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이 모든 일에 하나가 되어 있다. 서로 격려한다. 다윗은 이들이 하는 일을 보면서 ‘참 사람의 마음이 깊다’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참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지만, 이들은 그들의 깊은 생각을, 견고한 확신을, 하나됨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에 차서 이런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자신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그들의 목표물인 다윗만이 보였고, 다윗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윗은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윗의 생애를 고려해 보면 이 사람들은 적국에서 파견된 스파이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다윗과 가까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윗이 볼수는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완벽한 계획을 세워 다윗을 공격했다.
언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도들과 교제도 한다. 성도를 위로하고 세워준다. 하나님은 이 말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여기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처럼, 우리도 말을 그렇게 사용할 수도 있다. 성도를 위로하고 세우기 보다 공격하여 무너뜨리는데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한다. 상처 받은 사람이 문제지 자신은 사실을 말한 것 뿐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죄없음의 증거로 버젓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저주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물이다.
원수들을 보고 두려웠던 다윗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구했던 것처럼, 여기 다윗만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도 하나님을 보고 그들의 악을 그쳤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완벽한 계략에 감탄하며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가까와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행하심(7-10절)
시 64:7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다윗에게 언어의 독화살을 날리던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화살을 쏘신다. 이 화살은 절대 빗나갈 일이 없다. 그들이 다윗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공격했던 것처럼 하나님도 악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셨고 모두 알고 계셨다. 다윗이 다 알 수 없던 그들의 깊은 생각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전쟁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 나타날 결과를 다윗은 세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번째는 악인들이다.
시 64:8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악을 갚으실 것이다. 부메랑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심판이 그들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들의 강력한 무기였던 혀가 그들을 해할 것이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마치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어 죽게 하려던 사람들이 오히려 사자굴에 던져져서 죽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 더 좋은 예는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일 것이다. 교만한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일 좋은 계략을 세우고 그를 달 높은 나무를 세웠지만 결국은 거기에 자신이 달려서 죽게 되었다.
하나님은 때로 이렇게 분명하게 악을 드러내시고 악인이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심판을 행하신다.
두번째는 모든 사람이다.
시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이런 일을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고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애굽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었던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전파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과는 둘로 나눠졌다. 대부분은 여전히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세번째는 의인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심으로 의인은 구원을 얻는다. 그 결과는 이렇다.
시 64:10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의인의 근심은 즐거움으로 바뀌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하며 찬양한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모습을 항상 보기 원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항상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세상의 사람들이 보며 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우리는 모두 바란다.
하지만 7절부터의 말씀이 모두 과거의 일이 아니라 다윗에게 미래의 일인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셔서 모든 악이 바로 잡히고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바라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기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 가운데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 뿐이었다. 다만 그것이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확실한 소망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고 그렇게 하시는 것을 이미 다윗은 경험했기 때문이다.
도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구약에서 보는 하나님은 신약에서도 동일하시고,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과 바울이 믿었던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고,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그렇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 보일 때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오해했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럴 수 있다. 다윗이 악인들의 교묘한 공격 속에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다면 결국 활에 맞아 엎드러진 사람은 악인들이 아니라 다윗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전쟁의 주관자, 악을 갚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그는 지금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다.
9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행하셨고 그 하나님의 행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또 한편으로 더욱 의지하고 기뻐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또 더욱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얻어가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라. 묵상하라. 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주목하고, 내 삶에서는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악을 그쳐야 한다. 누구도 보지 않는 죄는 없다. 완전 범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보시며 공의를 행하심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런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고 죄를 그쳐야 한다.
또한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즐거워하며 자랑해야 한다. 욥과 같이 티끌과 재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는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던져져도 마찬가지다. 바울처럼 환난과 곤고를 많이 겪어도 그렇다. 하나님의 때는 어긋난적이 없다. 혹, 지금 다윗처럼 어떤 고난 가운데 있다면, 이런 하나님의 행하심을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한다. 참된 위로가 거기서 올 것이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니 성경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임을 믿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그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경험하는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