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본문: 시편 103편
설교자: 최종혁
개인적 송축(3-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택에 대해서 생각할 때 다윗은 가장 먼저 ‘죄 사함’을 언급했다. 다윗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그래서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은택이 바로 죄 사함이다. 재판장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법적으로 죄 없다고 선포하셨고 이것이 칭의의 은택이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성화의 은택이라고 할 수 있다. 죄 사함의 이 두 측면을 균형있게 이해해야 우리는 구원의 확신 가운데 즐거워 하며 동시에 구원에 합당한 삶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불안함 가운데 마치 내가 뭔가를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살거나, 반대로 구원과 지금 내 삶은 전혀 관계 없는 것처럼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 구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할 뿐 아니라, 그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도 제대로 알아야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윗이 언급한 하나님의 은택은 병 고침이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말하는 ‘병’은 영적인 질병, 즉 앞서 언급한 ‘죄악’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보다는 실제적인 육체의 질병을 의미할 것이다.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약의 성도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질병을 포함한 삶의 고난을 훨씬 더 죄와 연관지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마치 욥이 어떤 죄가 있으면서 계속 숨기는 것처럼 그를 다그쳤고, 욥은 그런 죄를 찾을 수 없는데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을 두고 그것이 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질병도 그렇지만 이런 선천적인 질병은 더욱 더 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죄와 질병은 여러모로 관계가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질병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질병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시는 형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보셨고 미리암을 나병에 걸리게 하셨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통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리셨다. 어떤 병에 걸리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죄에 대한 형벌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질병을 종종 사용하긴 하셨던 것이다. 특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형통함도 약속되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질병과 죄를 매우 밀접하게 연관지었던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실 심판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염병, 폐병, 열병과 같은 질병이었다(신 28:21-22).
다윗의 시편을 봐도 이런 사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질병)을 당할 때, 다윗은 혹시 모를 죄가 그 원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아마 여기 3절에서 죄와 병이 함께 언급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다윗이 죄로 인해 질병에 걸렸다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동시에 치유하셨을 수도 있고, 단지 병에서 고침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죄 사함과 연관지었을 수 있는 것이다.
여튼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병 고침의 은택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윗의 표현에서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나님은 어떤 죄도 남김 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볼 때 하찮은 죄이든 반대로 너무나 중대한 죄이든, 상관없이 모두 용서하셨다. 구원받은 후 삶에서 범하는 죄에 대해서 회개할 때도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그 죄가 얼마나 중한지,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는지에 상관없이, 회개하며 자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병 고침은 어떨까?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고치시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참된 신자의 질병으로 그 범위를 좁혀봐도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고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욥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바울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 신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육체의 어려움을 주셨고, 바울의 경우는 그 육체의 가시를 끝까지 제거해주지 않으셨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질병으로 고생하는 성도들을 다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들의 믿음이 연약하다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각 사람이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질병이 없는 내가 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 믿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존경할만한 사람들도 많다. 믿음이 없어서, 어떤 죄 때문에 병으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유가 뭘까?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모든 병을 고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죄를 멸하시고 그 결과인 질병도 멸하실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는 다시는 질병으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한 아픔과 슬픔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실한 자들도 질병에 걸리고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치지 않으시기도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는 다윗의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다 고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병 고침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고치시지는 않으시지만 (못하시는 것은 아님), 병 고침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항상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앞서 욥과 바울을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병을 허락하셨다. 그러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면서, 믿음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면 어떤 병이든 나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으면 안된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하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것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떤 병이든 고침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른 의도가 있는 사람이다. 환심을 사려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금전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는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 뭔가를 하라고 한다. 기도는 명목상하는 말이고, 헌금을 더 하든, 교회에 헌신을 더 하든, 뭔가 눈에 보이는 일을 하라고 한다. 마치 무당이 돈을 내고 굿을 해야 집안의 우환을 쫓아낼 수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처럼 교회의 목사들이 그런 일을 한다. 누구 목사 초청 신유집회라고 크게 광고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 거짓말에 속으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고, 다윗의 말처럼 하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런데 마치 이렇게 저렇게 하면 무조건 병이 낫는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병이 낫고 낫지 않고를 떠나 비성경적이라는 말이다. 특히 질병 가운데 있을 때는 마음도 약해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기에 이런 말들에 더 솔깃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성경의 진리를 더욱 붙들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한다.
그럼, 여기서 생기는 또 다른 의문이 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느냐다. 누구도 아프고 싶지 않고 아프면 빨리 낫고 싶어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 사랑하는 자녀를 아프게 하시고 그 상태로 그냥 두시기도 하실까?
데렉 키드너는 죄 사함과 병 고침의 차이를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죄는 언제나 그것을 파괴하지만 병은 오히려 그것을 더 깊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죄를 사하시지만 병은 항상 고치지는 않으신다. 이 진리를 알고 있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을 때, 오히려 기뻐했다고 말했다. 병 고침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을 누리는 것이 더 유익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질병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는 간증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그런 시련을 통해 오히려 정제되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 가운데 때로 우리는 질병 가운데 두신다.
이것이 병 고침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병 고침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 기도에 하나님은 합당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때로는 YES로 때로는 NO로 답하실 것이다.
병 고침을 받았을 때는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택임을 기억하고 송축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막상 병이 나으면 그 기쁨 때문에 그런지 그것을 위해 기도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응답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다. 혹,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경우든 모든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송축해야한다.
그럼 병 고침이 없을 때는 어떨까? 그럴 때 우리는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상황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어지게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이런 질병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은 내 삶에서 어떤 죄를 제거하기 위해 질병을 주셨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를 단련하고 성장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나를 다시 하나님께로 이끄시려고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야고보서의 말씀처럼(약 1:5), 질병 중에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상황 자체를 위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내가 그런 상황에 있을 때도 그렇고 그런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도 그렇다. 병 낫기를 구하지만 동시에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 송축의 마지막으로 다윗이 언급한 하나님의 은택은 풍성한 삶이다.
시 103:4–5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먼저 4절에서 말하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표현인데,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다.
여기서 말하는 ‘파멸’은 구덩이 혹은 무덤을 의미하는데, 구약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스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속량’은 룻기에서 익숙한 ‘기업을 무르다’는 의미다. 이는 어려움에 처한 친족에게 친족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로서, 그 처한 어려움이 무엇인지에 따라 책임의 형태는 달라진다.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하고 해를 입은 경우 보복해야하기도 했다. 룻의 경우는 재산을 지키고 아이를 나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고, 보아스는 그런 룻에게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이런 사람을 ‘기업을 무를 자’ 혹은 친족구속자라고 부른다.
책임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룻기에 등장하는 다른 기업 무를 자의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임을 상기시키면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말했었던 것이다(룻 3:9). 마치 어미새가 아기새를 그 날개 아래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처럼, 그런 은혜를 보아스에게 구했던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책임이 있고 나는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친족구속자는 책임감을 가지고 어려움에 빠진 친족을 도와야했지만, 여전히 그 일은 은혜의 영역에 있는 일이었다.
이런 친족구속자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하시는 모습과도 같았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같은 단어인 ‘구속자’가 사용된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런 궁극적인 구속자가 되심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병을 낫게 하시거나 죽음의 위협에서 건져주기도 하시고 더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시다.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신다. 따라서 이에 대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송축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언급된 하나님의 은택은 우리의 연약함으로부터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다. 쉽게 말해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상태에서 이제는 원점(0)으로 끌어 올려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택은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문제만 없이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0의 삶이 아니라 플러스의 삶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관을 씌우는 것은 높임 받는 위치에 있음을 말한다. 물론 하나님이 관을 씌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높으신 분이시지만, 높으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이셨으니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했는데(시 8:5), 하나님께서 구속한 자들에게는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고 말한다. 어떤 보석이 아니라 8절에서 언급될 하나님의 속성인 인자와 긍휼로 된 관이다. 우리를 존귀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인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게 한다.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0에서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구원을 받은 것,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고백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로 우리에게 관 씌우신 것은 한 측면이다. 우리가 수고한 무엇으로 인해서 우리가 존귀하게 되거나 높아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기억해야할 다른 측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다. 왕은 공의로 다스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운 작은 왕들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떠한지를 나타내야 한다. 그 중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나타내야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다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게 해야하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는 또 다른 예배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5절에서 다윗은 구속 받은 자들이 누리는 풍성한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좋은 것들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은 좋은 것들이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준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모두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라고 잘못된 것으로 만족하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 삶은 독수리와 같이 새로운 힘으로 가득한 삶이 된다.
믿는 자의 삶에는 고난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좁은 길을 걸으며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삶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믿는 자의 삶에 대해서 때로 우리는 좀 우울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항상 괴로움과 슬픔이 먼저 있다. 하루하루 넘어지지 않고 견디기만 하는 것 같다. 때로는 인생에서 정말 이런 상황을 만날 수 있지만, 항상 그렇다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믿는 자의 삶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16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으로 만족했던 다윗의 고백인데, 이 시편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그는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말한다(1절).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며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5-6절). 그래서 여호와를 항상 그의 앞에 모시고, 그로 인해 기쁘고 즐겁다고 말한다(8-9절). 그리고 그 끝에 이렇게 말한다.
시 16:10–11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구약의 성도였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신약에 와서 사도들의 삶을 봐도 그렇다. 바울은 정말 많은 고난을 당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풍성한 삶을 살았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모든 것에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했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심을 알고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믿는 자로서의 삶이 그저 괴롭고 그래도 죽고나서 천국은 가야할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잘 생각해 봐야한다.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고 우리를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 내가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족하고 싶은 것이 다른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아무 감흥 없이 그냥 받고만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택에 익숙해져서 당연하게만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이 곧 하나님의 은택이고 우리는 이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
도전
다윗이 개인적으로 기억한 하나님의 모든 은택은 조금은 일반적일 수 있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편 103편의 개인적 송축(3-5절)을 통해 우리가 적용할 것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택을 기억하고 송축하는 것이다.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죄사함의 은택, 내 삶에 계속해서 필요한 병 고침의 은택, 그리고 풍성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택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때로는 나의 예배가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떡과 잔을 나누는 것도 그냥 하니까 한다. 함께 기도할 때는 그냥 눈만 감고 있고 함께 찬양할 때는 그냥 입만 벌리고 있다. 기도의 내용이나 찬양의 가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말씀 시간에 잘 앉아 있고 졸고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말씀이 그렇게 와닿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해, 예배에 대한 불평이 생긴다. 왜 찬양은 항상 모르는걸 하는지. 왜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똑같은 얘기만 하는지. 왜 설교자는 혼자 저렇게 열을 올리고 있는지. 왜 더 재밌게 하지 못하는지. 우리 교회 예배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혹은 이런 생각조차 없이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경우 자신이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일단은 자신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배가 이렇다면 아마 그 삶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조하고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어떤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택을 잊고 살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꼭 이런 질문을 던져보기 바란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택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는가. 계속해서 그 은택에 대해서 감사하려고 하고 있는가. 내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그렇다니까 그런 것 말고, 정말로 내가 감사하고 내가 찬양하고 싶은 제목들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죄는 어떻게 하셨는지. 모든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병은 어떻게 하셨는지.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어떻게 하셨는지. 하나하나 나열해 보라.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감사하라. 함께 드리는 찬양을 나에게 적용하고, 함께 드리는 기도를 나에게 적용하라. 그리고 들려지는 말씀에 더 적극적으로 순종하라. 그것이 나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돌봐주어야 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 그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고 우리의 예배도 생동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 당연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기쁨과 만족이 있다. 그러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되뇌이고 적어두고, 그 은택을 하나 하나 나열해 보라. 그럴 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보게 되고 다시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