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 안에 무슨 교제가 있거든
본문: 빌립보서 2장 1-4절
설교자: 조정의
왜 우리는 교제를 필요로 할까? 교제가 부족할 때 왜 힘이 빠지고 믿음에서 멀어지고 소망이 약해지고 신앙이 흔들릴까? 개인 신앙을 알아서 잘 챙기는 사람에게 교제는 덜 필요한 것일까? 교제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교제는 옵션일까?
근본적인 질문! 교제란 무엇일까? 단순히 사회성을 가진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격려, 위로, 권면의 말이 교제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떤 교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참 교제일까?
1. 교제: 더불어 사귀는 것(1절)
먼저 교제란 무엇일까? 본문에 “교제”라는 말이 따로 분류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교제’할 땐, 1절에 나오는 권면, 위로, 긍휼, 자비가 모두 함께 어우러진다. 그래서 NIV 성경은 본문의 “교제”를 “공유”(common sharing, 통용)로 번역했다(코이노니아, ‘나눔’).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의 교제는, 가르침, 물건의 통용, 재산과 소유를 나눔, 찬미, 기도, 성찬 등과 함께 어우러졌다(행 2:42-47).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특별한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말했다(요일 1:3).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교제의 동력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화목(사귐)을 이루셨고, 성령을 통해 그 사귐을 효과적으로 누리게 하셨다.
그래서 1절에 나오는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다.
① 성도는 서로 권면한다(살전 5:11). 주관적인 생각이나 세속적인 방식대로 서로를 권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선한 뜻대로 한다(롬 12:2). 그리스도 안에…권면,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권면, 얻을 수 있는 격려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라고 말했다(고후 5:20). 성도의 교제가 그렇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서로를 말씀대로 살도록, 주와 더불어 함께 살도록 격려하고 간청한다(골 3:16).
② 성도는 서로 위로한다(살전 4:18).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고난과 함께 위로받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했다(고후 1:5).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모든 위로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주신다(고후 1: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누리는 모든 위로의 원천이다(롬 8:39). 그래서 본문은 “사랑의 무슨 위로가…있거든”이라고 말한다(1절). 우리는 고난을 견디게 할 만큼 크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약속으로 위로받고, 또 그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도록 성도에게 견고한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통해 위로받는다(롬 15:4-5).
③ 성도는 서로 교제한다(갈 6:10). 본문은 성도의 교제를 성령의…교제라고 말했다(1절). 삼위일체적 교제의 완성이다: 그리스도 안의 권면, 하나님 사랑으로 위로, 성령의 교제.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시는 분이다(엡 4:3, 고전 1:9). 교제(코이노니아)의 기본적인 뜻은 ‘나눔’인데, 앞에서 권면, 위로 등이 주로 말로 나누는 것이라면, 교제를 통해서는 좁은 의미로 물질적인 것을 나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 자녀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한다(요일 3:18). 초대 교회 교제를 빛나게 한 보석은 접대와 구제였다. 헐벗고 먹을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와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 성도에 대하여 성경은 죽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평가한다(약 2:15-16, 26).
④ 성도의 권면, 위로, 교제는 긍휼, 자비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말과 행함뿐만 아니라 “진실함”이 요구된다(요일 3:18). 억지로, 의무감으로, 종교적 활동의 일부로 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한 긍휼과 자비로 교제한다. 성도의 처지를 바라보며 애타는 마음을 갖는 긍휼, 공감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자비는 가진 것을 나누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다. 참된 권면과 위로를 낳는 견고한 뿌리다.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마음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교제란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과 더불어 사귀며, 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자비의 힘으로 서로 진리로 권면하고, 사랑으로 위로하며 함께 주신 모든 것을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나누는 삶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편지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3).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함께 누리고 나누는 교제의 삶을 이렇게 감탄하며 노래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새번역). 그런데 형제자매의 교제는 때로 아름답지 않다. 즐겁지 않고 괴롭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답고 즐거운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
2. 원리①: 마음을 같이하라(2절)
1절과 2절 이후의 관계를 주목하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더불어 교제를 나눌 때(1절), 이런 방식으로 하여 이런 목적을 이루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2-4절). 2-4절의 내용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교제의 방식을 보여주고(원리), 목적을 제시한다. 이 방식대로 교제가 이루어질 때, 이 목적을 지향할 때,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아름답고 즐겁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아름답고 즐겁게 하는 원리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2절). 다양한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는 교제라면, 마땅히 그 하나 되심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가 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것에 같은 의견, 같은 삶의 방식, 획일적인 취향과 성향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5절에 보면 성도가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마음이다(11절). 바로, 이 마음이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한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에 있어서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고전 10:31; 빌 1:20).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제의 즐거움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상대방이 내 말에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에서 찾는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무례하게 여겨 암묵적으로 금기한다(현대 사회가 교제/상담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모습).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각자의 마음에 맞춰 말하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도록 돕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뜻을 갖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 각 사람을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다(행 20:31, 권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다. 사랑을 가지고(온유하게, 무례하지 않게,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진리로, 참고, 믿고, 견디고, 바라며, 고전 13장), 간청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성실하게 열정적으로 돕는 것이다.
3. 원리②: 겸손을 옷 입어라(3절)
성도의 교제를 아름답고 즐겁게 하는 두 번째 원리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절).
“아무 일에든지”는 겸손이 단지 그리스도인의 교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말해준다. 당연하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 본문도 예수님의 죽기까지 낮아지신 겸손의 마음을 강조한다(6-8절).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종종 다툼을 일으킨다. 다툼으로 번역된 단어, 에리떼이아는 “이기적인 야심”을 가리키는데, 타인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열심은 결국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 끝에 자기 욕구를 충족하는 승리를 거두면 짧은 만족이 주어지지만, 하나님 앞에선 칭찬받지 못한다. 본문은 그래서 허영이란 말을 썼다. 공허한 영광. 속이 빈 껍데기만 얻을 뿐이다.
다툼과 허영을 몰아내고 참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교제는 성도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곧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주어진다.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로. ‘이 교제를 통해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겠다’라는 마음으로 교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만족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4. 원리③: 서로를 돌아보라(4절)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아름답고 즐겁게 만드는 세 번째 원리는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이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4절).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그 영광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근면성실하다. 자기를 절제하고 규모 있는 삶을 산다(갈 5:23).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다. 그래야 자기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오늘날 양적으로 부족하고 질적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단지 시간이 없거나 관심이 적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바빠도 허비하는 시간은 적지 않다. 우리는 그 많은 시간을 자기 위로, 자기 보상을 하느라 다 써 버린다. 자기 일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하다. 주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던 것을 생각하라. 섬기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는가.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과 우리에게 미칠 선(유익)을 죽기까지 추구하셨다. 우리가 성도의 일에 그만큼 관심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자. 공예배 참석부터, 교회 학교, 성경 공부, 소그룹 교제 등 모든 것이 나를 돌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가?
특별히 본문은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마지막 명령어 하나에 나머지 문장이 모두 연결된 구조다. 바울은 성도들이 연합, 겸손, 돌봄의 원리를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자기의 충만한 기쁨으로 삼았다. 자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타적으로 돌보는 걸 볼 때 부모의 기쁨은 넘친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참된 교제를 나누며 기쁨을 누릴 때 목자의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주님의 마음은 어떠시겠는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지는 지역, 연령, 관심사, 성별, 성향의 공통점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달려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교제가 있든지, 그리스도의 마음 즉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신 마음,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마음,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셔서 다른 사람들을 죽기까지 돌보신 마음. 우리 각자가 그 마음을 가질 때, 우리 교제는 참으로 아름답고 즐거울 것이다.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해 우리 아버지께서 충만한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나아가 세상이 이 매력적인 교제에 이끌릴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지런히 사랑으로 교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