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인과 가정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1-6절
설교자 : 조정의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본문 말씀은 1-6절을 아내들에게 명령하고 있고, 7절을 남편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베드로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2장 9절 이후로는 계속해서 적용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구원에 대해 말씀했다면 이제는 그 구원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대해, 직장 안에서, 가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목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각 영역에서 강조했던 것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3:1-7에서는 가장 친밀한 관계, 가정이라는 영역을 살펴볼 것입니다(3:8-9은 교회입니다). 가정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아내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은 아내들에 대한 명령이고, 3-4절은 그 명령을 이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며, 5-6절은 예시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1). “이와 같이”는 앞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 즉 정부에 순종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사환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그와 같이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종과 같이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에 있어서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정부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압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내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내들은 남편들보다 더 세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침밥을 차려달라고 하면 ‘간 큰 남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시대의 아내는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습니다. 당시는 여성에 대한 존중이 없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법에 메어 있고 결혼하면 남편의 법에 메어있는 사람입니다. 남편의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 없는 문화였습니다. 남편이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가 구원을 받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당시 사회에서는 아내가 가정을 흐리고 있다, 남편이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라는 좋지 않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남편이 중요한 관직이나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아내만 교회에 다니는 경우 남편이 모르는 인간관계가 생기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소아시아 성도들 중 아내들은 어떻게 가정 안에서 구원의 목적을 이룰 것인가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1). 여기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벧전 2:8, 요 3:36). 당시는 결혼한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기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보다 더욱 큰 핍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와 같이 명령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 여기서 순종하라는 명령은 앞에서 계속 제시했던 그 명령, 즉각적이고 의지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마음에도 없이 억지로 하는 순종, 억압에 이끌려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하는 순종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하는 모든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견을 전혀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남편 위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내 의견을 말할지라도 최종적인 선택권은 남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십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매일의 수많은 말들과 행동 속에서 뚜렷이 드러날 것”(그루뎀). 이와 같은 태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가져야 한다면, 믿는 남편을 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1). 그렇게 하는 목적은 남편으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다”는 것은 ‘구원을 얻다’는 의미입니다(마 16:26, 고전 9:19).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남편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 같지만(물론 그것이 필요하지만), 당시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행실은 남편을 하나님께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러한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남편이 하나님께 나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2). 이것은 남편이 아내 가까이에서 관찰한 결과입니다. 아내의 삶을 지켜보고 ‘그 삶에 두려움이 있구나’, ‘정결함이 있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더욱 정확한 번역은 ‘두려움이 동반된 정숙한 행실’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정숙한 행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정결함”이라는 단어는 도덕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딛 2:5, 요일 3:3). 베드로는 이 편지를 통해, 믿는 자들이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모든 죄악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2:11).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이것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정결한 삶을 살며, 죄를 멀리하는 것은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입니다.
아내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죄와 멀어지며 성화를 이뤄간다는 것은 엄청난 간증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죄를 한가득 가지고 있는 아내가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어떨까요? 남편에게 ‘예수님 안에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어요’, ‘그분을 믿으세요’라고 말하면서, 평소에는 ‘나는 남편에게 만족할 수 없다’, ‘이 상황은 원망스럽다’, ‘나에게 기쁨이 없다’라고 말하고 반응한다면 어떨까요? 그럴 때 남편은 아내의 삶을 통해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악한 사람일 수도 있고 선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삶에서 죄와 멀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남편은 ‘아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가’, ‘이것은 어떤 힘인가’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남편을 하나님께 나오게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3절에서는 여자가 단장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3). 시대와 국가, 문화를 넘어서 여성이라면 미에 대한 관심이 참 많습니다.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단장하는데 소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적인 것을 꾸미는 것보다 더 우선시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머리를 꾸미는 것’, ‘금을 차는 것’,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머리를 땋거나(딤전 2:10)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악세사리를 착용하며 아름다운 옷을 입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그와 같은 치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아무리 어여쁘고 화장을 잘해 단장한다고 해도 세월이 지날수록 늙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합니다. 썩어질 것들에 투자하지 말고 속사람, 마음에 숨은 사람, 참 인격을 꾸미라는 것입니다. 참된 나의 인격을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4). 나의 참된 인격을 단장할 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온유함”은 겸손을 말합니다. 온유의 반대는 거칠고 까다롭고 퉁명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들입니다. 반대로 ‘온유’는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안정한 심령”은 온순함,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평온하십니까? 외부에 압력이 있어도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을 때 평온합니다. 내가 억울하고 좋지 않은 상황에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는 평온이 찾아옵니다. 바로 이러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온유한 심령, 겸손한 모습,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셨으나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겸손한 모습, 욕을 받고 고난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모습, 공의로 판단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던 모습, 양처럼 잠잠하던 모습 말입니다. 겸손과 평온한 심령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속사람을 단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썩지 않을 매력입니다. “대속함을 받은 것이 은과 금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벧전 1:18). 그러니 썩지 않을 내면의 참 사람을 계속해서 단장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못 생겼다 매력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값지다, 아름답다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가치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으로 여러분을 단장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아름답다 하실 것입니다. 아내가 내면의 사람을 단장할 때 남편에게 순종할 수 있고 그것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5-6).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을 말합니다. 그들도 이 원리에 따라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 예시는 사라입니다. 사라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동반자였기에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창 18:2에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남편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남편을 존경스럽게 높이는 표현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리더십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있어서 대단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것이 2번이나 있었습니다. 아내가 죽임을 당하거나 수치스러운 일을 경험할 수도 있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사라의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6). 그와 같이 행할 때 믿음의 조상의 계보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선을 행하는 것’과 ‘아무 두려운 일에 놀라지 않는 것’은, 앞에서 말한 ‘온유함(겸손)’과 ‘안정된 심령’과 비슷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문맥적인 의미로 볼 때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고 그것은 겸손한 태도입니다. 또한 ‘아무 두려운 일에 놀라지 않는 것’은 평온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의지할 대상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여인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였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아내들에게 하신 명령이라고 ‘나와는 상관없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장차 아내가 되실 분이 있고 또한 여러분은 이러한 원리를 기억하고 전달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남편을 두신 분에게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그리고 믿는 남편을 둔 아내에게도 매우 중요한 명령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어떻게 구원에 합당한 삶을 이뤄내시겠습니까? 잠언은 현숙한 아내의 모습에 대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잠 31:10)고 말합니다. 남편으로서 이러한 아내―남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존중하고 권위를 세워주며 최종결정권을 주고 따라주는―를 본다면 그런 아내처럼 값지고 아름다운 아내가 어디 있을까요. 그런 아내를 남편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30-31)고 칭찬할 것입니다. 내면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흘러나오는 여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어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남편을 주인으로 섬겼으며, 남편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행동으로, 주님이 그로써 어머니를 아름답게 만드신 그 행동으로 아버지께 주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마침내 어머니의 남편의 삶이 이생에서 거의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그를 주님께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