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Part I
본문 : 시편 22편
설교자 : 최종혁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은 우리가 참 많이 들어 익숙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모여서 주의 만찬을 놓고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셨던 일들, 십자가 사역을 기억하는 일이 참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이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조금씩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했을 때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인정하고 받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에, 그때부터 밝히 드러내시고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고난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영광의 메시아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압제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메시아였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리라 믿었는데, 고난당하고 죽는다는 말을 하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붙잡으셔서 고난의 길을 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그들의 이후 행적을 보면 그들이 왜 떠났는지, 그리고 어떤 면에서 실망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 24:13-14). 이 둘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고난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5,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걸어가셨고 이야기를 나누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19-21). 이들이 예수님께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7).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자세하게 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고난을 통한 영광을 듣고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에게 또 한 번 나타나셔서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44). 예수님의 고난을 통한 영광은 모세오경과 선지서, 시편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말씀하셨던 것들이고 다만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45-47). 여러분은 이와 관련하여 구약의 어떤 말씀이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이사야 53장일 것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 52:13-15). 하나님의 종이 받을 고난에 대한 말씀과, 그가 다시 높여질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그가 어떤 고난을 통과할지에 대해 나옵니다. 그리고 고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53:10,11). 이사야 말씀에서 이미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갈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시편은 기본적으로 예언서는 아닙니다. 시편은 예배책이거나 기도서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처럼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은 아니지만 시편의 어떤 말씀은 역사 속에서 왕을 통해 이뤄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시편 2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나오는데 그는 다윗이나 솔로몬 등의 인간 왕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른다는 말씀은 인간 왕으로는 성취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봐야만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그런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시편 16편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말씀도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질 말씀이고, 왕이 승리해서 감사하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 왕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뤄진 말씀이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시편 22편도 그러합니다. 이 시는 다윗의 고난의 시편 중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저 그렇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는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이 다윗이 병들었을 때 기록한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14절 말씀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이같은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병들었을 때 쓴 시라고 보기에는 다른 구절들이 문제가 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병에 걸렸다면 이렇게 조롱당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것이 조롱당할만한 병이라 해도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2,13)라는 표현은 주변의 공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 역시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을 전쟁에 나갔을 때 많은 공격을 당해서 죽음에 이르기 직전 상황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다윗이 그렇게 많이 다쳤다면 성경 어느 부분에는 반드시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16절에서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사람을 죽이려면 심장을 찔러야지 수족을 찌르다니요. 다윗이 어떤 공격을 당해서 그런 상황에 놓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 시편에는 고난의 시편에 으레 등장하는 표현, 죄에 대한 고백이나 원수에 대한 저주의 말도 없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있었던 어떤 경험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성경 주석가 보이스는 ‘시편 22편은 질병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처형에 대한 기록이다. 특별히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좀 과장된 시적인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문자 그대로 이뤄진 표현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뤄진 말씀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27). 세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뤄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다윗을 통해 이뤄진 것은 일부이고 이것이 온전히 이뤄진 것은 메시아를 통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고난(1-21절)과 영광(22-3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이 시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셨을 때 아마 이 말씀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이 말씀이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수족을 찔렀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다룬 영화들은 그것을 매우 자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사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더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의미를 잘 알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셨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내 손과 옆구리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흔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죽은 것은 주전 970년 정도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주후 33년 쯤입니다. 최소한 1000년의 차이가 있는 기록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십자가’라는 처형 자체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범죄한 사람을 나무에 매다는 일은 있었으나 그것은 십자가 처형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로마인들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7,18).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몸을 제비뽑았습니다. 그들이 왜 굳이 그 옷을 제비뽑아 가져가려고 했을까요. 당시는 오늘날처럼 옷이 흔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옷을 가족에게 주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옷은 귀한 재산이었습니다. 군병들이 제비뽑아 그 옷을 가져간 것은 성취된 말씀입니다. 또한 “내가 내 뼈를 셀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봤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은 옷을 벗은 상태를 보여줍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 19:24). 사도 요한은 이것이 예언의 성취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로마인들이 그것이 구약성경의 기록임을 알았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대로 행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성경의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마태는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조롱했는지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39-4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시편 22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 또한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그 말씀을 하셨다고 요한은 말합니다(요 19:2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시 22:15). 이것은 극심한 갈증에 대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22절의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습니다(히 2: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1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셔서 말씀하셨고, 목마르다고 하셨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시편 22:31에 있습니다.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다 이루었다”와 의미상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은 시편 22편을 마음에 담아두셨음에 분명합니다.
시편 22편은 고난과 영광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에는 고난에 대한 말씀이 있고, 뒤에는 영광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앞의 내용은 기도이고, 뒤의 내용은 찬양입니다. 앞 부분 고난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의 고난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라는 고난이었고, 둘째는 ‘사람들의 조롱’이라는 고난이었으며, 셋째는 ‘육체의 괴로움’이라는 고난이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고 구약을 통해 분명히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 정확한 시점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에 그대로 순종함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생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죄인을 위한 구속사역은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하실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도 이것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원래부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대신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평생에 그 은혜를 찬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익숙해져야 합니다. 직장에 가거나 진학을 하면 잘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익숙해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십자가의 대속사역입니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깜짝 놀라야 합니다. 어떻게 창조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있는지, 어떻게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그런 조롱을 받으셨는지 놀라야 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날마다 감격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전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여러분은 주일마다 만찬을 대하면서 마음이 뜨거우십니까? 이것은 어떤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마음의 동기가 되어서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