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
본문: 디모데전서 5장 3~16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상은 과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가 과부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통해서 교회가 어려운 성도를 돕는 방법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돕는 일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과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과부로 사는 것, 어떠했을까요?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보더라도 과부는 소외되기 쉽고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있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서비스가 있어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경제적인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 의해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함께 사회적 위치도 잃어버립니다. 당시 문화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유용한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 사람인가? 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과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돌볼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가 되는 것은 살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쓸모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할 때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의 재판장으로 말씀합니다(시68:5). 또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신10:18). 하나님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백성인 우리도 그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본을 좇아서 약자를 돌아보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고 이 일을 위해 일곱 명의 일꾼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부로 대표할 수 있는 어려운 성도를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일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먼저 생각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유익이 되도록 돕는 일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의로 도움을 줬는데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도울지, 어떻게 도울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에 따라 합당하게 실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기준과 지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3-8절까지 첫 번째 단락이고, 9-16절까지 두 번째 단락입니다. 그리고 각 단락은 핵심이 되는 명령으로 시작이 됩니다. 3절은 “과부를 존대하라”는 명령이고, 9절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성경은 9절이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명부에 올린다는 동사가 명령입니다.
그럼 본문에 나오는 두 명령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명령입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3)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부 중에서 참 과부를 존대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 존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 참 과부는 누구인가?
먼저 존대한다는 것은 가치를 둔다는 말인데 존중한다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의미로 물질적으로 돕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존대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존중히 예의를 갖추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명령입니다.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과부를 돌아보고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부에 대해서 이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존대하라”
다음 질문으로 교회가 존대해야 할 참 과부는 누구입니까? 참 과부라는 말은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라는 말입니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참 과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4)
참 과부는, 다시 말해 교회가 돌아보고 도움을 주어야하는 참 과부는 자녀나 손자들이 없는 과부입니다. 가족이 없는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는 경우에는 교회가 아니라 자녀가 과부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효”를 행하는 것이고 부모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서 효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효를 행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뜻이 우리에게 더 친숙합니다. 디모데전서에도 여러 번 나오는 ‘경건’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대하는 것, 그래서 재정적인 필요를 채우고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경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과부를 돌볼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우선은 자녀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시간이 흘러서는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정을 바로 세우도록 권면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맡겨진 의무를 다 하는 것이 경건임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잘못된 가르침, 거짓 교사는 가정을 무너뜨리고 왜곡된 경건을 가르칩니다. 신천지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거짓을 가르치며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면서도 신앙으로 포장하고 왜곡된 경건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과 다른, 참으로 악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가정을 바로 세웁니다.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 효를 행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과부에 대한 책임의 일 순위는 그 가족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과부에 대한 기준입니다. 참 과부는 자녀나 손자가 없는 과부입니다.
이것을 5절에서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라고 말씀합니다. 외로운 자라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외롭다는 말이 아니라, 참 과부는 홀로 있어서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과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은 가족의 유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참 과부에 대한 내적인 기준이 나옵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5-6)
참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합니다. 참 과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건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과부에 대한 내적인 기준은 과부 자신의 경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안나가 성전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며 섬겼던 것처럼, 그래서 때가 되어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그러한 경건한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즐거움을 좇는 자는 참 과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교회가 도와야 하는 참 과부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이 없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경건을 추구하는 과부입니다. 디모데는 교회가 참 과부를 돌보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고 그렇게 수고함으로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명령을 따르는 않는다면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8)
무서운 책망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가족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유무를 떠나서 믿지 않는 자도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하물며 믿는 자로서 우리는 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이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명령입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9-10)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부에 올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명부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위한 참 과부의 명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참 과부와 명부에 올리는 과부는 같은 대상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과부의 명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참 과부와 명부에 올리는 과부는 중복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견해가 더 나은지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견해를 두고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었는데, 그래도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과부의 명단으로 보는 것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분명한 답은 천국에 가서 물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여기 말씀의 명부를 섬김을 위한 명부로 이해하면 9절과 10절에 나오는 명부에 올리는 과부의 기준은 교회 사역을 위한 자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부에 올리는 과부의 자격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이는 육십이 넘어야 했습니다. 재혼을 하지 않는 나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 결혼 생활에서 신실했던 자여야 했습니다.
셋째,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겸손으로 성도를 섬겼던 과부에게 교회의 사역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과부를 돕는 일은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과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격 있는 과부에 대해서 그들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명부에 올림으로 섬김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을 돌아보는 일에 매여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를 얻어서 그 자유를 교회를 섬기는 일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수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부에 올리라는 명령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과부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러한 모델을 볼 수 있는데, 과부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비다입니다. 그녀는 과부들을 섬기며 구제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과부에게 섬김의 기회를 주는데 있어서 제외되는 대상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11-12)
당시에 과부로서 명부에 올리는 일은 계속 독신으로 남아서 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서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과부의 경우, 재혼을 선택함으로 이 서약을 저버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14절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고 집을 잘 다스리며 새로 맡겨진 가정을 잘 돌보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명부에 올린 후에 재혼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처음 믿음을, 그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생기지 않도록 처음부터 젊은 과부는 명부에 올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13)
젊은 과부의 경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서 교회의 어려움을 줄 수 있기에 연륜이 있는 과부가 이 일을 감당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제가 자칫 잘못하여 방향을 잃어버리면 다른 성도에 대한 험담이나 불만을 공유하는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모임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형제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남녀 구분 없습니다. 시작하면 끝없이 계속 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건강을 위해 마스크를 합니다. 혹시 모르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조심하고 막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쓸데없는 말, 악하고 죄가 되는 말들입니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해서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유혹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귀한 일을 정말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교회가 서로를 돌아보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돕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물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성도를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성도를 돕는 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명령은 교회가 모든 과부에게 똑같이 도움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되는 것이 교회의 도움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족이 우선적으로 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먼저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없고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형편을 살펴서 선택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이 낭비되지 않도록 형편에 따라 합당하게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풀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별하셔서 그 뜻에 따라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차별이 아니라 선별입니다.
둘째,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목적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귀한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른 성도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오히려 성도의 신앙을 흔들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를 도울 때 성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도를 돕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가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도록 성도를 세우는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도록,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계속 수고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따라서 성도가 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는 모든 수고는 결국 주님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를 돕는 귀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함께 하고 있고 여러분이 교회의 지체로서 여러 모양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성도를 돌아보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계속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시고,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형편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수고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가족이라는 것을 보다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