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책임 Part 2
본문: 시편 78편
설교자: 최종혁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고, 미래에 대해서는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목적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야 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그 목적은 7-8절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었다.
시 78:7–8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세대가 거듭되어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이 우리의 유산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만 의미있는 것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전해주어야 한다.
특별히 이 목적에서 시편 기자가 강조한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행한 과거의 실패를 기억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시로 제시한 것이 에브라임이다.
에브라임은 과거를 잊는 망각의 죄를 범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계속해서 반복했던 죄와 잘못인데, 에브라임은 그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시편 78편의 저자인 아삽은 실패를 망각한 실패를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고 이들의 실패를 길게 기록했다. 이스라엘과 같이 되지 말고, 에브라임과 같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망각(9-11절)
9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에브라임은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 중 동생이었다. 창세기 48장에서 죽음을 앞둔 야곱을 요셉이 찾아간 장면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안수하고 그들을 축복했는데, 오른손을 동생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었다. 이를 본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에게로 그 손을 옮기려 했지만 야곱은 자기가 실수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형인 므낫세도 크게 되겠지만 동생인 에브라임이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를 통해 여러 민족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창성, 번영’인데 야곱은 실제로 에브라임의 후손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민수기를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에브라임 지파는 숫자적으로나 위치적으로 그렇게 번영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였고(민 13:8, 16), 그들이 분배받은 땅에 세겜과 실로가 속해 있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 땅에서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장소였고,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도전했던 장소로서 언약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었고, 실로는 성막이 있던 곳으로서 예루살렘 이전에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하나님은 실로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라고 표현하기도 하셨다(렘 7:12).
이런 특혜를 받은 지파로서 에브라임은 가나안 정복 후에 북쪽의 영향력있는 지파가 되었다. 분열 왕국 후에는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로서 인정받았다(호 5:3). 그래서인지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할 때 에브라임 지파를 부르지 않은 것을 놓고, 기드온을 찾아와서 따지면서 다투었던 장면도 볼 수 있다(삿 8장). 입다가 암몬과 싸울 때도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입다와 그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삿 12장). 기드온과 입다의 대처는 달랐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들은 에브라임이 그렇게 따지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에 에브라임은 그렇게 지배력있는 지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9절은 그런 에브라임이 무기와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다고 말한다.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사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에브라임 지파에 있는 일반적인 특징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즉, 그들은 군사적으로 잘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전쟁의 때에는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경향이 있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했던 그런 사건들 속에서 에브라임은 그런 유사한 특징을 보였다. 그들은 전쟁에는 정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했던 말들이었다. 그래서 입다는 그들의 비겁함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그들과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기도 했다.
여호수아 생전에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함께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기업을 더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수 17장). 여호수아는 너희는 큰 민족이니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다 철병거가 있다면서 슬그머니 발을 빼려고 했었다.
에브라임이 이런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자명하다.
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병거와 말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병거와 말을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승리로 자신들의 힘과 용맹함을 증명하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승리로도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이러했다고 아삽은 기록했다.
10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즉, 이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복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고서도 승리를 경험했을 것이고, 그렇게 꼭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 땅에서 그들은 살게 되었지만, 정작 그 하나님의 언약은 잊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11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잊은 것, 망각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든지 관계없이, 과거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 없는 자들이 되었다.
그럼, 그들이 망각한 과거는 무엇일까? 아삽은 애굽에서부터 시작한다.
망각의 내용 1(12-39절)
12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한두번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이렇게 기이한 일을 행하시면서 그 능력의 어떠함을 증명하셨다. 사실, 이런 일 중 한번이라도 직접 경험한다면 그 뒤로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따를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하나님의 계속되는 이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17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20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여러 사건들이 떠오를 것이다.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로 인해서, 길로 인해서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특히 만나에 대해서 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고 울며 원망했었다(민 11:4).
이 때 쯤 모세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모세는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구하기도 했다(민 11:15). 그리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이렇게 반응했었다.
민 11:21–22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아마 모세의 이 말이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아삽은 이렇게 기록했다.
2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22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던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이들의 믿음 없음에 하나님은 노하셨지만, 메추라기를 몰아 오셔서 다시 한번 약속을 지키시고 그 능력을 보이셨다. 아삽은 이렇게 기록했다.
23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25사람이 힘센 자[천사를 지칭, 만나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의미]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26그가 동풍을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의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27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 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 같이 내리셨도다 28그가 그것들을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 29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아삽은 시적인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풍성히’, ‘넘치도록’ 먹을 것을 베푸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누구도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먹이셨을 때, 불평하던 자들은 “먹고 심히 배불렀”다. 그들이 불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셨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과 욕심에 대한 심판이 있음도 보여주셨다.
30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31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민수기에서는 이 사건의 결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민 11:33–34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기브롯 핫다아와’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시험하며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음을 잊지 않기 위해 그 땅의 이름이 ‘탐욕의 무덤’이 된 것이다.
이 정도 일을 겪었으면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알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조차도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32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33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범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능력은 잊고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서 불평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들을 날을 헛되게 만드셨다.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어야 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광야에서 그 삶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면서 그들 가운데는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4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마침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가 아니었다.
36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이들의 회개는 아첨이었고 거짓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불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단순히 그 심판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기억했던 것 뿐이다. 마치 매 맞거나 벌 받기 싫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했던 것 뿐이다. 결국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행동한 것은 동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심판 중에서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38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광야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실 수도 있으셨다. 실제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적도 있으셨을 정도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 중에 항상 긍휼을 베푸셨다. 사람들의 가식적인 회개에 속으셔서 그러셨던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인지를 아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즉, 광야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멸망하지 않은 것 뿐이다.
사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행한대로 모두 심판하셨다면, 누구도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진실이다.
아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해도 괜찮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해도 괜찮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고, 그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선택임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에브라임 지파는 교훈을 얻어야 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신뢰하지 않았다.
40절부터 아삽은 다시 한번 과거의 일을 되짚으면서, 이번에는 이 일들을 기억해야할 책임에 대해서 강조한다.
망각의 내용 2(40-72절)
40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는 아삽의 답답한 마음이 표출되어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고, 거듭거듭 하나님을 시험하고 노엽게 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정확하게 이들의 죄를 반복했다. 하나님을 망각하는 죄인 것이다.
아삽은 이스라엘이 기억했어야할 하나님의 권능의 손, 구원의 날을 말한다.
43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44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45쇠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46그들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47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48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51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여기까지는 애굽에 내린 재앙에 대한 말씀이다.
52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 사건이다.
54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55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 땅의 백성들을 쫓아 내시고 그 땅을 이들에게 주어 살게 하셨다.
이렇게 약속의 땅에 거주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2세대, 광야 세대다. 이들은 그들의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고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자들은 광야에서 모두 멸망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들의 조상처럼 살지 않으면 된다. 하나님만을 섬기며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은 또 다시 그들 부모들의 잘못을 반복했다.
56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이것은 사사 시대에 대한 묘사다. 광야에서 삶을 잊은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서 그대로 자기 조상들의 죄를 반복했다. 이번에는 우상숭배라는 더욱 분명한 죄로 그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났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 죄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또 다시 그들을 심판하셨다.
59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61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62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63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64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
이는 사무엘상 초반의 내용이다. 엘리 제사장의 때에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를 겪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다른 나라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오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미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언약궤를 가지고 왔지만 오히려 전쟁에서는 크게 패하였고 언약궤까지 빼앗기게 되었다. 그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게 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엘리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고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즉 영광의 없다는 뜻의 이름으로 지으면서 마무리가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떠나신 비극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아삽은 분명히 말한다. 즉 언약궤를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배한 것은 어쩌다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들의 배반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지만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다. 그리고 여기서 에브라임이 다시 등장한다.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로부터 에브라임은 언약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 내리시기를 멈추셨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아니라 유다 지파를 통해, 실로가 아닌 시온 산을 통해 은혜를 베푸셨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사울이 아닌 다윗이었다.
65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66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67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0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기이한 일을 잊었기 때문에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세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망각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의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유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아삽은 여기서 시편을 마무리했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다윗이라는 좋은 지도자를 통하여 다시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있는 상황이 그와 이 시편을 함께 나눴던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이기 때문이고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의 책임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 긴 시편을 통해 아삽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나님이 어떤 놀라운 일들을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셨는지를 말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심판하셨는지, 동시에 어떻게 긍휼을 베푸셨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잊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했다. 결국 현재의 이스라엘은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전해야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기 위해 현재의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계명을 지켜야 했다.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에브라임과 같은 실패를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다음 세대는 더 나은 세대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음 세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지만, 지금 내가 그 은혜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경험한 뻔한 실패를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도전
시편 78편의 교훈은 이 바울의 말로 정리할 수 있다.
고전 10: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11–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말씀은 교회와 개인 모두에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현재를 잘 살자. 과거의 죄에 매여 있지도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