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고난 중의 아멘

본문 : 시편 41편

설교자 : 최종혁

 

총 150편으로 이뤄져 있고 5권의 책으로 나뉘고 41편이 1권의 마지막 시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거나 강해를 할 때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몇 편은 편안하게 읽다가 어느 순간 반복되는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 고통, 괴로움 등이 그것입니다. 계속되는 내용에 읽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편에서는 복 있는 자와 악인에 대해 말하면서 인생의 두 길에 대해 말합니다. 2편으로 가면 인생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편부터 고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 쓴 시입니다. 4,5편은 공정치 못한 일로 인한 고난 가운데 기록한 시편이고, 6편은 여러 원인으로 절망하고 낙심할 때, 탄식할 때 기록한 시편, 7편은 억울한 상황에서, 9-10편은 악인의 형통 중에 괴로워하는 의인의 시편, 11편은 터가 무너질 때, 사회의 근본이 흔들릴 때 기록한 시편, 12편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13편은 버림 받았다고 생각될 때, 17편은 목숨의 위협 속에서, 계속 하다보면 한참 얘기해야 할 듯합니다. 전쟁과 육체와 정신적인 괴로움 중에,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쓴 시도 있고 아비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하다가 쓴 시편, 초조할 때, 죄로 인해 징계받을 때,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기록한 시편 등 고난에 대한 주제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41편 중에 28편이 이렇듯 고난 중에 쓰여진 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실텐데 왜 이렇게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말씀이 많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시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을 생각해 보면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때를 찾기가 더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없는 상황은 우리에게 많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어려움 뿐 아니라, 가정, 직장, 교회, 사회적, 국가적인 어려움이 계속해서 우리 삶 가운데 있습니다. 누구도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평안한 삶을 원하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어려움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너희가 (혹시) 시험을 당하게 되면”이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 시험을 당할 때 마다”라고 말합니다(약 1:2). 모두가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고난을 통과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낙심 중에 불평하고 원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인내하고 승리하여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편 1권을 통해 볼 수 있는 다윗 한 사람의 반응만 봐도 다양합니다. 다윗은 때로는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며 낙심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고 감사의 찬양을 올렸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기대하고 인내했던 모습도 있었습니다.

시편 1권의 마지막 시편인 41편을 통해 그런 고난의 상황에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인정해야 할 사실에 대해 세 가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그 3가지가 고통 중에 우리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결과적 승리에 대환 확신을 줍니다. 그 전에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한 상황을 먼저 보겠습니다.

 

고통 중의 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힘든 일들은 함께 올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은 한 번 있고 끝나는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은 여럿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동시에 당하고 있습니다.

 

질병(8절)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8절)

본 시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고난은 질병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3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시는 일 중 병 고치시는 일을 언급하고, 4절에서도 병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원수가 다윗에 대해서 하는 말도 그의 병에 대한 것입니다.

이 병이 어떤 병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그런 죽을 병에 걸린 사건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이 병은 꽤 중한 병이어서 다윗이 살아서 침대를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은 육체를 가지고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언제나 큰 시험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아질 것을 아는 감기 같은 것도 우리를 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 이 중요한 때에 감기에 걸리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삶 자체를 뒤흔드는 질병은 우리의 육체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도 힘들게 합니다.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는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고 기도도 하지만, 사실 그 고통은 내가 겪어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런 병 중에 있습니다.

 

범죄(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절)

이 말은, 내가 범죄해서 이런 질병에 걸렸으니 지금 내가 회개하오니 나를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있습니다. 죄가 모든 질병의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질병의 원인이 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도 다윗의 병을 ‘악한 병’(악한 데서 오는 병)이라고 하여 어느 정도 다윗의 죄가 병의 원인임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스스로도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치유를 구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명백한 다윗의 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인 우리는 죄는 원하지만 그 결과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은밀하게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죄는 어떤 식으로든 그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때로 그 결과는 양심의 가책일 때도 있습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소리에 괴로울 수 있습니다. 때로 정반대로 양심의 무뎌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죄를 낳는 결과를 얻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 죄는 소중한 관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 부모 자녀 사이가 작은 죄의 결과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때로 나의 죄가 다른 사람을 죄로 이끌기도 합니다. 때론 여기 다윗의 경우처럼 죄의 결과로 질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원수(5~8절)

자신의 죄로 인해 병 중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상황이지만, 여기에 더해서 다윗에게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원수”(5절), “나를 미워하는 자”(7절)라고 표현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병 중에 누워있는 다윗을 찾아옵니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6절)

그들은 다윗이 금세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와서는 중심에 악을 쌓아두고 입으로는 거짓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 앞에서는 나쁜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윗을 위로하면서 금방 나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다윗의 뒤에서 그를 비방하고 해를 입히려고 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7-8절)

그들은 다윗이 낫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정말 원했던 것이기도 합니다(5). 그들은 다윗이 죽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도 이 땅에서 없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더 이상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길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숨기고 그들은 다윗을 찾아왔고 나가서는 이제 다윗은 끝났다고 소문을 냈던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다윗이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그들에게 왔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최악인 것 같지만, 아직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친구(9절)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9절)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곱”의 이름 뜻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고 배신하는 것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 사람은 다윗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이 가고 불안한 사람이 아니라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떡을 나눠 먹는 것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가까운 관계를 말합니다. 공적으로 혹은 일적으로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도 가까이 교제하는 친밀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가까운 친구인데, 문자적으로는 “나의 평강(샬롬)의 사람”입니다. 정말 배신은 추호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다윗이 죄로 인해 병들고 대적들에게 비방을 받고 공격을 당할 때에 그를 배신한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믿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오히려 다윗을 배신한 것입니다.

당신이 다윗을 찾아 간다면 뭐라고 위로하고 힘을 주겠습니까? 혹,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다윗의 시편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런 고난은 다윗이기 때문에 더 자주 당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만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원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내 편은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견디기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죄가 반복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고난 자체가 즐겁고 기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안함을 유지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기본적으로 심지가 굳은 사람이 있고 연약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보다 더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있고, 이성적이고 둔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런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가 같은 어려운 상황을 더 큰 어려움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난 중에 넘어지고 낙심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이 당연하거나 합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내가 연약하다는 것은 내가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중요한 사실로 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있는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잴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때로는 원인을 나로 보고 자책할 수 있습니다. 여기 다윗의 경우라면 왜 내가 그런 죄를 지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끊임없이 자책하며 죄책감에 낙심할 수 있습니다. 혹은 반대로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내가 남보다 뭘 잘 못했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사람이 아무리 악해도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럴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원망하고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나를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합니다.

 

고통 중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1~3)

첫 번째로 그리고 이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1절)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는데, 예수님도 그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야고보는 반대로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윗은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라는 넓은 범주에서의 약속을 언급하고 조금씩 그 범위를 좁혀 자신의 상황까지 갑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2~3절)

다윗은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상황과 직결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뜻은 위에서 본 것처럼 다윗이 죽고 그 이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병상에서 붙드시고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지금 그렇게 해주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4, 10)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

그러하오나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10)

다윗은 내가 이런 것들을 잘 했으니 이제 나를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약한 자들을 잘 돌봤으니 이제 나를 고쳐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 우리는 그 약속을 바라보고 나가지만 동시에 은혜에 기대서 나가는 것입니다. 확신의 또 다른 근거는 은혜입니다.

사실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을 보면,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윗은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은 병들어 죽게 되었고 사람들은 비방하고 친구는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노력해온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상황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힙니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권리를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지, 나의 공로를 힘입어서 나가지 못합니다. 다윗도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11~12)

세 번째로 다윗이 고통 중에 기억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11절)

원수가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수가 아닌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면 결국 승리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영원히 안전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약속, 은혜를 기억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내 편에서 나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의 능력이 내 상황이나 대적의 능력보다 부족해도 확신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믿고 있고 은혜를 구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고통 중에 그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을 의지하세요’라는 말을 합니다. 어려움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론에 그치는 일도 아닙니다. 실제로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얼마나 큰 능력으로 일하시는지 기억하고 그것을 사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꼭 우리가 그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든, 죄의 문제든,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든, 어떤 상황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악으로 드러나는 상황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길 원하시고 이루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문제가 되는 상황들 속에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불평하고 때로 원망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니면 혹 알고 있어도 제대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정말 그런 것처럼 사는 것이 정말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도전

시편 1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3절)

시편의 각 권 끝에는 이런 짧은 송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이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사용했던 표현을 가져오면 ‘인정’입니다. 정말 그렇다고 인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니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것이 시편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말입니다.

주일 예배 시간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말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그렇습니다. 별로 찬양 같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것을 정말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서는 이 말에 아멘 아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이 내 상황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시려고 구원하셨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고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시편 1권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배웠습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했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는 때로 당황하고 괴로워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여전한 신뢰 가운데 결국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참 우리같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당황하고 불평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의 가장 기초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 은혜에 대한 신뢰,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때로는 견디기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아멘’이라고 우리의 삶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